흑치마 사다코
은미희 지음 / 네오픽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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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옹호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조선 땅에서의 그녀의 삶이 얼마나 비루했는지 충분히 알았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인간적으로 안됐다는 마음도 든다. 하지만 이해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갈 수는 없다. 그녀로 인해 죽은 사람들과, 그녀의 해악에 피해 입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어쩌면 이마저도 과분할지 모른다 . 인간적으로는 측은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재고의 여지도 없는 여인, 그녀에 관한 글을 읽었다.

그녀의 이름은 배정자. 사람들은 그녀를 매국노라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평생을 욕망을 따라 살았다. 흔들릴 법도 하련만 생의 처절함을 먼저 배운 그녀에게 조국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조선은 그녀에게 오로지 아픔만을 준 나라였다. 아버지를 죽인 나라, 결국엔 어머니마저 눈을 멀게 만든 나라, 한끼를 위해 어머니가 자신의 몸마저 자신의 것이기를 포기해야 했던 나라. 조선 땅은 단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전쟁터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 강대국의 눈치만 살피며 숨죽여 지내야했던 나라였다. 자국의 왕후가 일본의 무사에게 처참히 도륙된 후,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불에 태워진 참변을 당했음에도, 변변한 항의조차 못하는 실정에 있었다. 심약한 왕은 자신을 도와줄 사람만 찾을 뿐 스스로 방책을 강구할 여력도 없었다. 그런 풍전등화의 시대에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이라는 이름을 달고 궁궐을 제 집 드나들듯 드나들며 일본을 위한 음모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에서의 모든 일은 이토 히로부미의 계획대로 되었고, 배정자는 미천한 기생에서 왕에게도 댓거리를 하는 막후 조정자가 되어 천하를 주물렀다. 배정자의 행보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후에도 거침없이 이어졌다. 이제는 홀로서기를 위해서라도 일본에 더 충성해야 했다. 그녀는 만주에서 첩자로도 활약했고, 대동아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노구의 몸으로 위안부를 모집하는데 앞장서기까지 했다. 세상을 뜨는 그 날까지 배정자는 오로지 일본과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살았다.

매국노라 불렸던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룬 글이었기에 이 책이 처음부터 편할 수 없었다. 식민 치하의 아픔은 어떤 도움도 필요없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에 앞장 섰던 부정적 인물의 삶을 굳이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읽는 동안 회의가 들었다. 그러나 역사의 엄중한 평가를 받았음에도 그녀가 실존했음은 사실이라는 데에 관심이 갔다. 그녀가 왜 그런 삶을 살게 됐는지, 맹목적이리 만치 경도된 일본 사랑은 어디서 왔는지 한번 쯤은 알아볼 필요도 있다 싶었다. 왜 그렇게 이토 히로부미를 잊지 못했는지도 더불어 궁금했다. 이토 히로부미야말로 우리에겐 원흉이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고 바라보았더니 책이 새롭게 보였다. 위인의 삶도 소중하지만 간악했던 한 여인의 삶을 주목해 보는 것도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가치 판단이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한다면 배정자의 행위가 이해되는 면이 없진 않았다. 젊은 나이에 반역의 죄로 생명을 뺏긴 아버지와 그 충격으로 눈까지 멀게 되고 결국엔 생사도 알 수 없게 된 엄마, 뿔뿔이 흩어진 형제, 그리고 그녀 자신의 기막힌 삶등이 가엽긴 했다.

그러나 측은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행위가 덮혀질 순 없다. 그녀가 끼친 해악은 상상을 초월했고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미 그녀를 향해 엄중한 선고를 내렸다. 그러므로 그녀는 죽었어도 그 굴레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다. 당신은 그녀에게 어떤 선고를 내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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