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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간혹 이런 책들이 있어. 리뷰를 올리고 싶지만 내 능력이 닿지 않는 책 말이야. 그런 책들이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야. 속이 상하는 거지. 그간 놓친 책들이 꽤 있었어. 정말 괜찮은 책인데 글로 옮기지 못하다니......이렇게라도 글을 올리고 싶은 건 이 책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야. 그 감상을 어떤 식으로든 남기고 싶었거든.
인간이 얼마나 감정적인지 알아? 내가 오래도록 김영하의 책을 읽지 않은 이유를 말하면 웃음이 날거야. 그 이유가 뭐냐구? 그의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이유야. 하여간 이런 이유로 작년까지 그의 책을 한번도 읽지 않았다는 거 아니야.
'너의 목소리가 들려'란 책으로 작년에 그를 처음 만났지. 내겐 크게 남지 않은 책이야. 한번 읽고 다시 한번 훑어보기를 했는데도 그냥 그랬어. 하지만 그 한번이 있었기에 이 책을 집어들었을거야. 오늘 그의 얼굴을 다시 보니 괜찮게 생겼더만. 공일오비의 장호일이랑 금뚝딱의 박서준을 닮은 거 같았어. 그간 왜 싫어했을까? 편견이란 이런 건가봐.
이 책 무척 마음에 들었어. 책도 얇고 제목도 확 들어오잖아. 아멜리 노통브의 '살인자의 건강법'을 읽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몰라. 그 책도 재미있었거든. 냅다 읽었지. 정말 살인자를 주인공으로 했더만. 작가들은 대단해. 어떻게 살인자를 머리 속에 넣어둘 수 있을까? 그 잔상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뭐, 하여간.
주인공의 이름은 김병수래. 나이는 일흔이고. 25년전 살인을 그만 둔 후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나봐. 그에겐 은희라는 딸이 하나 있어. 그가 죽인 여자의 딸이야. 내 아버지는 나를 유괴한 유괴범이었다는 드라마의 광고 카피같지? 딸 아이는 자신이 입양됐다걸 알아. 그가 말해 주었거든. 근데 그 이후로 서먹해졌다나봐.
이 책이 마음에 드는 건 군더더기가 없어서야. 난 묘사가 많은 문장은 좀 괴롭거든. 왜 글로 모든 걸 다 설명하려 하지? 차라리 글보다 사진이나 그림을 넣으면 어떨까 싶어. 소설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게 묘사였던 것 같아. 예전 작가들이 묘사를 아주 길게 하셨지.
한 번 아래를 봐. 사설이 없잖아. 의도적으로 문체에 신경을 안쓴 것 처럼 썼지? 김훈 같은 문체도 좋지만 이렇게 편한 문체도 괜찮지 않아? 난 여기서 여백을 느꼈어. 독자가 상상할 여지를 다양하게 남겨줬으면 좋겠어. 감동만이 능사는 아니라구. 이 책의 장점은 시원시원하다는거야.
시를 가르치는 문화센터의 강사는 내 또래의 남자 시인이었다. 그는 첫 수업 시간에 엄숙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해서 나를 웃겼다.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그때는 이미 수십 명의 사냥감을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해 땅에 묻은 뒤였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이 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살인은 시라기보다 산문에 가깝다.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살인은 생각보다 번다하고 구질구질한 작업이다.
어쨌거나 그 강사 덕분에 시에 흥미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나는 슬픔은 느낄 수 없도록 생겨먹었지만 유머에는 반응한다.
어때? 내가 재미있다고 한 이유를 알겠지? 병수씨의 예전 직업은 수의사였대. 그래서 살인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더군. 병수씨가 살인을 멈춘 이유를 내가 말했던가? 살인에 아무 쾌감이 따르지 않더래. 그래 그만 뒀다더군. 요즘 병수씨는 치매에 걸려 사투중이야. 기억이 없어져 무척 괴로운가봐. 뭣보다 은희를 기억 못할까봐 걱정이지. 은희는 농대를 나와 지역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어.
최근 병수씨가 사는 동네에서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있어. 병수씨는 자신이 한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지. 아닐거라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야. 요즘 병수씨의 신경을 거스리는 놈 하나가 나타났어. 차에 선팅을 하고 사냥용 지프를 몰고다니는 놈이야.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고, 병수씨는 예삿놈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지. 그 놈의 트렁크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걸 본 적이 있거든.
그런데 하필 은희가 사귀는 남자라며 그놈을 데려 온게 아니야? 기억이 왔다갔다 하는 중에도 병수씨 기가 막히지. 게다가 병수씨 주변에서 살인 사건은 계속 생기고, 경찰서의 안형사라는 자가 자꾸 알짱대. 한번은 경찰대 학생들까지 무더기로 데려왔어. 병수씨, 자신의 입을 단속하느라죽을 뻔했지. 자랑하고 싶어서 말이야.
참, 요즘 은희가 계속 집에 안들어오는거야. 병수씨 걱정이 여간 아니지. 은희만큼은 자신이 지켜야한다고 생각하거든. 은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각오가 돼 있지. 어느날 사복입은 경찰이 문을 두드리네. 병수씨를 주의해 봤나봐. 병수씨 그들 패거리 중에서 그 놈을 본거야. 박주태란 놈 말이야.
병수씨, 저놈 잡으라 외치는데 형사들이 웃어. 그놈이 형사라는 거야. 그리고 자기가 은희를 죽였다는구만. 은희는 재가 요양보호사라는 거야. 애당초 병수씨에겐 딸이 없었대. 이게 어찌된 일이야. 모든게 다 흔들려. 뒤죽박죽이고. 게다가 은희라는 이름의 아이는 제 부모가 죽었을 때 같이 죽었다는 거야. 병수씨, 정신을 못차리겠는거지.
이 책을 읽고나니 예전에 본 영화가 떠올라. 제목은 기억이 안나는데, 범인을 무섭게 추적하고보니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어. 식스센스도 있지. 알고보니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이었어. 이런 류의 결말은 한동안 얼 빠지게 하지. 충격이 커서 말이야. 그런 식의 반전까진 아니어도 이 소설 또한 만만친 않아.
이럴 때 즉 어떤 뜻인지는 알겠는데 설명하라면 할 수 없을 때, 나는 맨 뒤의 해설을 봐. 이 책은 권희철이 썼더군. 그의 해설을 몇 편 읽은 적이 있어. 그를 직접 본 적도 있지. 그의 해설은 처음엔 갸우뚱하게 하다가도 결국엔 굴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 처음에 왜 갸우뚱하냐고? 그가 말하는 걸 나는 말할 수 없으니까. 지기 싫어 그러는 거지 뭐 큰 이유가 있겠어.
독자로서 바람이 있다면 각기 다른 해설을 보고 싶어. 한 책을 읽고 표현되는 평론가들의 각기 다른 시선 말이야. 권희철도 쓰고, 신형철도 쓰고, 고봉준도 쓸 수 있잖아. 같이 쓰면 안되나? 그럼 다양한 시각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한 책에 한 사람의 해설만 실으란 법은 없으니 말이야.
이 책에 대해 다른 평도 있더만 나는 좋았어. 김영하의 글을 두 편 밖에 읽지 않아 기대가 없거나 낮기에 좋게 말하는 수도 있겠지. 그럼 어때.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보는 사람도 있지. 김영하는 작가의 말에서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고 했어.
나도 그런 말로 작가에게 돌려주고 싶어. '이것은 내 리뷰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라고 말이야. 이렇게라도 책에 대한 소감을 쓰고 싶어 애쓰는 내가 기특해. 김영하, 당신은 더 멋지고 말이야. 고마워, 작가분. 간만에 리뷰쓰는 재미를 알게해 줘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