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욤비 -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
욤비 토나.박진숙 지음 / 이후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술의 달인 화교가 아시아권에서 정착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이 있다. 동남아권에서 화교가 각 나라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과 비교해 보면 과히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이는 이민족에 대한 우리의 배타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화교 자체의 현금동원력과 GDP(국내총생산) 세계 2위의 중국을 모국으로 둔 그들이 이정도라면,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피부색 다른 외국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받은 설움과 차별은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니 말이다.

 

인정하기 껄그럽지만 외국인 근로자에 대해 우리는 그리 대해 왔다. 돈벌러 왔다며 우습게 여겼고 불법 취업이라며 의도적으로 홀대하거나 박대했다. 한때 우리도 달러를 벌고자 독일로, 베트남의 전쟁터로, 중동으로 나간 적이 있음을 잊은 것 같은 행태였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도 나라를 잃고 중국의 만주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하와이로, 일본으로 가지 않았던가. 설사 그런 아픔을 겪지 않았다해도 타인의 형편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을텐데, 해도 너무했다.

 

이 책은 우리의 야박함을 몸으로 겪은 이방인 욤비 토나의 자서전이다. 욤비 토나는 자국인 콩고민주공화국의 정치적 박해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온 난민이다.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그가 우리나라에 오게 된 건 2002년이다. 연고라고는 중국에서 알게 된 이웃국 콩고인을 통해 주소지만 아는 실낱같은 인연뿐이었다. 조국을 탈출해 나왔으니 그에겐 동포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뼈까지 시려오는 고독과 두려움을, 그는 하루빨리 자리잡아 가족을 데려오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텼다.

 

콩고에서 욤비 토나는 비록 작지만 왕가의 자손이었다. 국립대를 나와 콩고비밀정보국에서 일하던 엘리트였고, 정보국에서 일하면서부터는 경제적 어려움 없이 지내던 특권계층이었다. 그러던 중 임무 수행에서 알게된 정권의 비리를 야당에 전달하려다 발각돼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상황에서 탈출하게 된 것이다. 한국말도 못하는 그가 삭막하기 짝이 없는 이국의 도심에서, 그 막막한 순간들을 어떻게 헤쳐왔을지 가슴이 짠해진다.

욤비 토나는 불법체류자들이 거치는 모든 과정을 몸으로 겪었다. 인쇄, 사료, 직물공장을 비롯 각종 공장들을 전전했고, 숱하게 월급을 떼였으며,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들었고, 때론 일을 못한다며 맞기도 했다. 탈장으로 쓰러지기도 했고, 기계에 팔이 끼는 등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는 시간들을 보내야했다. 그럼에도 고된 일상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부치는 돈으로 가족이 생계를 꾸려간다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플 수도 없었고 아파서도 안되는 모진 시간 속에서도 그는 난민 신청을 꾸준히 했다. 일하다 말고 인터뷰하러 가느라 사장의 눈총도 받고 같이 일하는 공원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국에 온 이유가 이였기에 수십 차례라도 응해야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늘 불허처분이었고 나중엔 이의신청 또한 기각되었다. 마침내 그를 도와주던 난민센터의 한국인 친구가 콩고에 가서 심문기록을 비롯 관련 자료를 가져왔지만 난민 신청은 또 불허되었다. 마지막 법무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드디어 승소판결을 받아 2008년 2월 욤비 토나는 난민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렇게 그리워하던 가족도 데려올 수 있었다. 어릴 때 헤어져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아빠지만 아이들은 반가워했다. 자랄 때 곁에 없던 아빠지만 자신들을 위해 애쓴 것을 안 것일까, 아이들은 착했고 한국에서도 잘 적응했다. 이곳에 올 때 셋이었던 아이는 이제 넷이 되었고, 아이들은 그보다 더 한국말을 잘 한다. 욤비 토나는 그간 난민구호단체와 인권운동단체, NGO 및 대학에서 난민과 관련된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이제 그는 한국에서 난민관련 전문가이다. 그의 이런 노력들이 인정을 받아 이번 학기부터는 광주대 자율융복합전공학부 조교수로 강단에 서게 되었다.

 

사진 출처: 동아일보

 

때론 '깜둥이', 때론 '새끼야'라며 인격적 모독을 당하고, 그럼에도 대꾸 한 번 못한채 참아야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분노하기보다 자신의 인격적 성숙을 위한 질료로 삼았고, 비록 떠나왔지만 언젠가 돌아가야 할 모국을 위한 배움의 시간으로 인식하고 달려왔다.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냐는 친구들에게 왜 난민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면 안 되며, 배움의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느냐고 묻고 싶었던 그였다. 그런 그가 화교들도 정착하지 못했다는 이 땅에 보통 사람보다 몇 배의 어려움을 갖고도 자신의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욤비 토나의 발걸음은 이제 한 개인사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작은 성취들은 이 땅에 거주하는 난민에게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