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위증 1 - 사건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9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불행은 우리 안에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데 기인한다. 불완전한 인간 속에 병립 불가한 두 가치가 같이 있기에, 인간은 숙명처럼 불안을 달고 살아야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악이 나쁘다는 걸 알고 있다. 악한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악은 대개 저 깊숙한 곳에 숨겨지거나 눌려져 있다. 그러니 인간이 악을 저지를 때는 나쁜 짓임을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다룰 수 있는 한계치를 벗어났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악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불안케 하고, 불쾌하게 하며 위험하게 만든다. 그러나 무엇보다 조심해야 할 것은 악이 감당할 수 없는 마력으로 사람을 휘어감는다는 점이다.

 

악은 또한 은근하면서도 주도면밀하다. 아무도 몰래 다가와서는 결정적 순간 인간을 낚아챈다. 악에게 포획되면 누구나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이 악을 다룰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즐기다 결국 악의 노예가 되어 일을 저지르고 만다. 악이 무서운 건 단지 악으로 머물지 않고 반드시 행동으로 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 치명적 약점을 미야베 미유키는 다룬다. 그녀는 일본 미스터리소설의 여왕답게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어린 소년의 자살이란 슬프고도 충격적인 사고를 기점으로 인간 속에 내재한 악이 어떻게 증식하는지, 아이들과 학교라는 작은 공간을 통해 해부하듯 상세히 그려낸다.

 

1990년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고바야시 슈조는 전화 부스 안의 한 소년을 보며 불안함을 느낀다. 소년은 부스를 나와 보도 위를 걸어갔지만, 고바야시 슈조는 소년을 돕지 못했다는 초조함으로 어쩔 줄 모른다. 전화부스 안의 소년은 다음날 아침 조토 제3중학교 뒷문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죽은 소년은 이미 한 달 전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소년, 가시와기 다큐야의 죽음은 자살로 처리된다. 소년은 반 아이들과도 교류가 없었고, 소년에 대한 아이들의 기억은 지극히 단편적이다. 소년의 죽음은 잊혀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소년의 죽음을 둘러싸고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소년이 학교의 불량배 패거리에게 살해됐다는 고발장이 날아든 것이다. 소년이 속했던 반의 반장과 학교장, 소년의 담임에게 고발장이 배달됐다. 간신히 수습했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확산될 지경에 이르자 학교장은 반장의 아버지이자 경시청 소속의 형사인 후지노 다케시와 조토 경찰서의 청소년 담당 형사, 그리고 선생 몇 명과 이일을 수습하려 한다. 그러나 교장의 바람과는 달리 사건은 확산일로에 이르고 한 방송국에서 취재한다며 기자가 나와 소년의 집을 비롯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닌다.

 

소년의 죽음을 축으로 소년과 관계된 이들의 삶이 수면 위로 부상한다. 죽은 소년은 병약하고 얌전했지만 소년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차이가 난다. 소년의 부모와 형이 달랐고, 담임과 반 친구의 평이 달랐다. 소년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 사뭇 달랐던 듯하다. 미야베 미유키는 소년만 주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연관된 아이들의 삶까지 추적한다. 아이들의 삶은 좋건 싫건 부모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또래 집단에서 일어난 일이 발화가 되어 사건은 점차 확대되고 만다. 미야베 미유키는 자살과 학교폭력을 전면에 배치해놓고 또다른 작업을 시작한다. 그 작업은 아프고 슬프며 내밀하게 드러난다.

 

미야베 미유키는 "죽은 뒤에야 여러 가지를 알게 되는구나." 라며 말하는 같은 반 친구 마리코의 중얼거림을 통해 죽고난 뒤에야 관심을 얻게되는 소년의 측은한 처지를 나타낸다. 살아생전 소년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했다면 소년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러나 소년의 형이 전하는 독백은 소름이 끼친다.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고, 두려움에 떨고, 울부짖고, 슬퍼하는 얼굴 바로 아래 그 엷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형을 바라보는 눈에 그 냉혹함이 깃들어 있었다. 발버둥쳐봐야 소용없어. 내가 이겼으니까. 형이 진 거야. 히로유키는 때달았다. 진작 깨달았어야 하는 진실. 그가 설마설마하며 물러서고, 시선을 피하고, 그럼으로써 점점 더 자라도록 거들어버린 끔찍한 것, 이것이 녀석의 본성이다.'

 

하지만 아빠의 말은 또 다르다.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허약했던 탓에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는 성격이 된 건지도 모릅니다.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저희로서는 괴로웠습니다. 좀 더 편하게 살아도 된다, 인생은 그 자체로 즐거운 거라고 부모 입장에서 몇 번이나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가닿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너무 순수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담임이 기억하는 죽은 소년은 이렇다. "형은 가출했어요. 가족이랑 잘 안 맞아서. 우리는 그런 집이에요." 누가 봐도 에미코가 어떻게 받아칠지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도발적이었다. 풋내기 선생님, 이런 집안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난 문제 있는 가정의 아이라고요.

 

14살 짜리 소년에게 보이는 다면적 모습은 소름이 끼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년은 더 이상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려 죽음을 택한다. 아이들 속에 내재한 악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고발장을 낸 아이는 자신이 저지른 일로 불거진 사태와 문제에 대해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로 인해 친구가 죽자 그제서야 동요를 일으킨다. 이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이렇게까지 해야하는지는 아직 설명이 부족하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려는 건 단지 아이들의 악행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통해 투영되는 어른들의 모습이다.

 

그녀는 불량배 패거리의 부모를 통해 아이들의 문제 행동을 진정으로 마주할 생각이 없는 부모와, 법을 어겨서라도 모든 걸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제멋대로이며 폭력적인 부모를 고발하고 있다. 또한 체면 지키기와 몸보신에 급급한 학교를 통해 교육적인 방법을 동원하기 보다 은폐하고 외면하려는 선생들의 기만적인 모습도 폭로한다. 진정으로 교육적 행동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면 아프지만 잘 마무리 되었을 문제가 점점 확산되어 학교를 흔들고, 아이들의 삶마저 뒤흔든 폭풍이 되고 말았다.

 

외면하고 싶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악이 있다. 소설속의 누군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안에 내재한 악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선을 말한다는 건 위선적이다. 그래서 그녀가 이리 악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악과 악의에 주목하는 것은 회피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기에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이리라. 그를 통해 인간을 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일 터다. 지독하게도 질긴게 악이지만 그 악을 이기는 것 또한 인간 속에 내재한 선을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악은 규명되어야 한다. 악이 드러남은 악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 안의 선을 더욱 살리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글은 그래서 추리소설임에도 따스함이 있다. 피가 난무하고 사람이 잔혹하게 죽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진실을 외면하고 진상을 덮었을 때 일어나는 결과를 차분하고도 자세히 그려낸다. 도피나 도망이 결코 답이 아님도, 누군가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도 상세히 보여준다. 또한 맞부딪쳐야 할 때 뒷걸음치는 어리석음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도 낱낱이 드러낸다. 인간의 본질적 문제인 죄와 악을 사회의 부조리함 속에 잘 녹여낸 수작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날카롭고 아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