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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일기 1 :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ㅣ 이오덕 일기 1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3년 6월
평점 :
이오덕 선생이 세상을 뜨신 지도 어느덧 10년이 됩니다. 선생의 부음을 신문으로 보면서 연세를 한번 더 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일흔아홉. 조금 더 사시지 하는 마음에 안타까움과 비감에 젖었던 당시가 떠오르는군요. 그런데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빠른건지 아니면 아니면 제가 무심했는지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가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아이들 글쓰기 지도에 관한 책을 찾으려고 서점에 들렀을 때였어요. 그전까지는 선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거든요. 생전 정직한 글쓰기, 살아있는 글쓰기를 강조하셨던 선생의 글은 꽤 강한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선생의 신념은 거의 종교와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저는 선생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장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아는 것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 책은 선생이 교단에 계시던 1962년부터 2003년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의 일기 5권 중, 맨 앞 부분인 1권입니다. 총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일선 교사의 눈으로 바라본 당시 산골 학교와 농촌의 실태, 학교 행정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어요. 선생의 고통스런 심정이 고스란히 들어있기에 읽기가 버거울 정도였지요. 1944년부터 교사 생활을 하셨으니 이십년 쯤이면 넘길 것은 넘기고 맞출 것은 맞출 수 있는 요령과 무덤덤함에 익숙해지기도 하셨으련만, 선생은 그렇게 되지 못하셨나봅니다.
1962년 9월 19일 수요일
첫째 시간 출석도 부르기 전에 돈을 내놓는 아이가 있다. 대구종합운동장 확장 기금이다. 아직 10여 명이 안 가져와서 이걸 그냥 두면 다음 또 다른 돈을 모을 때도 안 가져오겠다 싶어 어제 독촉했던 것인데, 오늘 한 사람 가져온 것이다. 못 낸 아이들을 불러냈다. 야단을 쳤다. 돈 2원이 없어서 못 가져온 아이 손들어라 하니까 대여섯 명이 든다. 거짓말이라고 또 야단쳤다. 훌찌럭훌찌럭 우는 아이가 있다……돈 독촉을 하고 나니 공부를 가르칠 기분이 안 났다.
1967년 3월 23일
여기서는 사흘이 멀게 술판이 벌어진다. 내 머리는 지금 너무나 어지럽다. 학교 돈을 걷어 먹으려고 눈이 뒤집힌 교장, 술, 아이들이 수라 장판이 되어도 방치해 두는 교사, 기성회비를 안 낸다고, 아니, 안 낼 것이라고 미리 예방 삼아 혹독한 체벌을 주는 '모범 교사'……내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아이들 밥도 제대로 못 먹이는 가정의 돈을 걷고, 돈이 덜 걷히면 아이들을 무섭게 혼내는 동료 교사들과 학교 책임자들을 보면서 선생은 무척 힘들어하셨더군요. 1957년 이미 중학교의 교감이 되었는데도 한 달만에 사표를 내고, 그후 1965년 초등학교 교감이 되었는데도 교사 강등 청원서를 내 선생은 다시 평교사가 됩니다. 불의와 부조리를 못견뎌할 뿐 아니라, 아이들 곁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해보려는 선생의 칼칼하고 외곬수적인 기질이 드러나는 순간들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선생도 행복한 일기를 쓸 때가 있는데 아이들과 같이 있을 때, 혹은 자연의 위로를 받을 때, 아이들 속에서 좋은 글을 발견할 때가 그렇더군요.
1964년 6월 6일 토요일
돌아오면서 엿을 사 주고, 나도 먹었다. 아이들 속에서 하루를 보낸 오늘은 너무 즐거운 날이었다.
1969년 12월 15일 월요일 맑음
밤새 눈이 와서 온 산천이 하얗다. 난로를 따뜻하게 피워 놓고 아이들과 마주 앉으면 이런 날은 교과서 따위를 공부하기가 싫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박 씨의 시를 읽어주니 아이들도 좋아하는 듯했다. 아이들을 얕보지 말 것이다. 이런 산골의 저학년 어린애들도 얼마든지 시를 이해하고 쓰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가슴 따뜻한 시간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겠죠? 선생의 분노와 아픔이 절절히 들어있는 1부를 넘으면, 1971년부터 1973년까지의 시간을 만나게 됩니다. 이 기간에 선생은 교감이 되지요. 여러 행정적 부조리 및 교사들의 비교육적 자세와 안일함은 여전히 선생을 힘들게 하지만, 조금씩 좋은 만남도 생깁니다. 읽는 이로서 얼마나 기쁘고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1973년 1월, 선생은 당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된 권정생 선생을 만나러 갑니다. 두 분의 만남과 교류가 제게는 마치 TV에서만 보던 연예인을 직접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네요.
그 만남 이래 두 분은 마음이 통했던 듯 싶습니다. 그해 9월 8일의 일기 중「 강아지 똥」에 대한 선생의 '참 놀랄 만큼 좋았다. 대화 같은 것을 좀 손대면 거의 완벽한 작품으로 보인다'는 언급은 마치 역사적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일기를 읽다보면 권정생 선생은 선생에게 여러 모로 의지한 듯 하고, 선생 또한 좋은 작가를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발품을 많이 파신 듯합니다. 이 밖에도 이 시기의 일기에서는 아동문학가인 이원수 선생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이 오르내립니다.
3부 1974년부터 77년까지의 일기는, 선생이 교장이 되면서 겪게 되는 일들과 아동문학 분야의 전문가로서 선생의 반경이 얼마나 넓어지는지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활동을 하다보니 때로는 구설에 오르기도 하고, 시비가 붙어 사과문도 게재하게 되면서 선생은 평론가로서의 자신의 자세를 점검하게 됩니다. 이 뿐 아닙니다. 75년 말에는 염무웅 선생에게 빌려준 책이 문제가 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이틀간 조사를 받는 곤욕도 치르게 되지요. 이런 다사다난한 일 가운데 77년 11월 29일의 일기를 마지막으로 1권은 마무리 됩니다.
이 책을 읽기 전 이오덕 선생을 저는, 바른 글쓰기에 대한 나름의 투철한 교육관을 가진 분으로만 이해했지요. 그런데 일기 속의 선생은 많은 규제와 제약 속에 제대로 된 교육이 무엇인가를 놓고 고뇌하고 갈등하는 힘없는 개인에 불과하더군요. 때로 선생의 민낯은 처절하리만큼 애처롭고 측은하기까지 했습니다. 선생의 고뇌로 첨절됐다 해도 과언이 아닌 1권이었죠. 그럼에도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교육관을 지켜온 끝에 선생은 정직한 글쓰기라는 글쓰기의 한 축을 세우게 됩니다. 그 주춧돌이 세워지는 광경을 저는 본 것이구요. 읽는 동안 어쩔 수 없는 감정 이입으로 조금 힘들었지만 그보다 몇 배의 기쁨을 되돌려 받았으니 저는 지금 행복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