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박동을 듣는 기술
얀 필립 젠드커 지음, 이은정 옮김 / 박하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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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상에서 시·공간의 제약을 유일하게 무력케 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사랑의 힘은 그렇게 컸다. 그런데 사랑이 성적인 이끌림과 혼재되면서, 사랑이란 말은 남발되었고 그 의미는 축소되었다. 누군가에게 매료되는 것을 사랑이라 착각하면서 사랑은 힘을 잃었고, 더 이상 사람들은 사랑의 힘을 믿지 않게 되었다. 본래 사랑은 신성한 것이었다. 그것에 맞닿아 있을 때에만 우리는 아름답고 이타적일 수 있었다. 신성에 접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숭고한 시간이 사랑 속에 있었다. 사랑은 그렇게 고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만은 지켰어야했다. 그것이 결국은 우리를 지키는 것이니까. 사랑을 즉흥적이고 찰나적으로 만들면서 사랑은 사라지고 말았다. 하룻밤의 격정 속에서 사랑을 찾으려니 사랑을 볼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이 그렇게 값싼 감상이었다면, 삶은 오히려 쉬웠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선택한 대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행위이자, 그의 삶이 내 삶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핑크빛 기쁨과 비례하는 삶의 뒷편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가볍게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랑은 찬란하다고 이 책은 선언한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의 결정이 사랑이며, 무형의 위대함이라 칭하며 그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현실에서는 슬픈 이야기로 불릴 수 밖에 없음 또한 암시하며 시작한다.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후 4 년이 지난 어느 날, 딸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미얀마로 향한다. 그곳에서 딸 줄리아는 우 바라는 남자를 만나, 아버지 틴 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버지의 고통스럽고 슬픈 어린 시절과 아버지가 평생을 마음에 두고 사랑한 여인 미밍에 대한 이야기는 줄리아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였다. 아니다.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가 아니라 그 날에 태어나서는 안되는 아이였다. 그러나 하필 그 날에 태어나면서 아버지는 저주받은 아이로 치부되며 자란다. 부모는 아이가 불편했고  제대로 된 사랑은 생각도 못했다. 병 중에 있던 친척이 죽어도 아이 탓이었고, 집에서 키우던 닭이 죽어도 아이 때문이었다. 불행을 가져다 주는 아이라고만 여긴 부모에게 점성술사는 아이의 특별한 점을 말해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날 남편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 버린다. 수치라는 아줌마의 극진한 보호 속에 자라지만 천애고아에 눈까지 보이지 않게 된 아이에게 삶은 결코 친절할 수 없었다.

 

그런 아이에게 어느날 다가온 소녀는 결코 단순한 친구일 수 없었다. 서로의 아픔과 각자가 가진 각별한 감성은, 가슴 깊이 드리워진 삶의 그늘을 지워주며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다. 빼어난 용모를 하고서도 네 다리로 걸을 수 밖에 없던 소녀에게 아이는 세상으로 향하게 만드는 새로운 출구였다. 이는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자신을 감싸고 있던 헤어날 수 없는 어둠이 소녀 곁에만 있으면 밝은 빛으로 바뀌었다. 두 아이에게는 서로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곳이었다.   

 

"틴 윈은 미밍에게 신뢰를 가르쳐주었고 마음 놓고 약한 모습을 보이게 해주었다. 틴 윈과 함께 있으면 미밍은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됐다. 틴 윈은 미밍이 네 발로 기어다니는 자신을 얼마나 부끄럽게 여기는지 털어놓은 처음이자 유일한 상대였다. 그녀는 또 이따금 깔로를 두 발로 걸어 다니고 공중으로 한껏 뛰어오르는 꿈을 꾼다는 말도 들려주었다. 그럴 때 틴 윈은 미밍을 위로해주지 않았다. 말없이 안아주기만 했다. 미밍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떤 기분인지 틴 윈이 이해하리라 믿었다. 두 발로 걷고 싶은 욕망에 대해 말할수록 그로 인한 고통은 줄어들었다. 게다가 틴 윈이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몸은 없을 거라고 말해주었을 때 미밍은 그 말을 믿었다."

pp 251~252 

 

그러나 운명은 잔인했다. 서로가 전부이며 그 이상을 원치 않았건만 운명은 그들을 갈라 놓은 후 마음껏 휘둘러댔다. 그후 반 세기가 지나도록 그들은 만나지 못했고, 서로의 소식조차 듣지 못했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며 삶을 꾸려나갔다. 기다림에 지쳐 한번쯤 원망스런 말이 나오기도 하련만, 그들은 변함없이 사랑했고 흔들리지 않았다. 만날 수 없는 환경이 주는 불안함에도 그들은 꿋꿋했으며, 불행하다고 느끼기보다 지금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평온을 이끌어냈다. 그런 삶의 결과가 자신임을 알게 된 줄리아는 아버지의 삶과 사랑의 방식을 마침내 용납하게 된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 그 아버지가 왜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 없었는지 줄리아는 이제서야 이해하게 된다. 떨어져 있었으나 결코 혼자가 아니었던 그들이 어떻게 서로의 사랑을 간직했는지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들의 사랑이 이렇게라도 연결되어 다행이라 줄리아는 생각한다. 또한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게 아니라 본래 가야할 곳으로 때 맞춰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귀결임을 느낀다. 짐작도 못했던 아버지의 20년이 또다른 사랑의 선물로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줄리아는 사랑의 숭고함과 설명할 수 없는 신비를 가슴에 담는다.

 

사랑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사람 간의 신뢰가 제거된 세상에서, 꿈같고 동화같은 이야기 한 편을 읽었다. 조금 슬펐지만 마음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유일한 선이 사랑이라는 걸 미밍을 통해 다시금 느껴 본다. 충분히 절망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미밍은 인간 고통의 날 것으로 사랑을 오염시키지 않았다. 미밍에게 사랑은 포기하지 않아야 할 이유였으며 자신을 존케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사랑엔 실패가 없는데 자신을 사랑의 실패자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조용히 건내고 싶다. 사랑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아니 사랑은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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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왕 차공만 난 책읽기가 좋아
성완 지음, 윤지회 그림 / 비룡소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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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비애'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써도 될런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몰랐으면 싶은 말이지만 벌써 그 말의 의미를 알아버린 아이가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그렇게까지 못하는 것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못하는, 그래서 자신의 모순을 통해 생의 비애를 알아버린 아이 말이다. 다른 사람에겐 웃고 말 얘기만 아이에게는 아프고도 심각한, 그런 얘기를 아이는 가졌다. 그 아이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 차공만이다.

 

공만이는 이름 그대로 축구만을 생각하는 아이다. 아기 때부터 공만이의 관심은 오로지 축구에만 있었다. 한데 문제는 공만이가 축구를 못한다는 데 있다. 사랑하는 만큼 축구 실력도 좋으면 좋으련만, 공만이가 잘하는 건 얘기 뿐이다. 축구 박사 공만이가 헛발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공만이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곤란한지 알 수 있다. 이번에도 공만이는 자책골을 집어 넣어 자기네 반이 지는데 한 몫을 했다. 절친 당찬이가 앞으로 축구 시합에 빠지란 얘기를 했을 정도니, 공만이의 축구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민 끝에 공만이가 솟대 오리를 찾아갔다. 마을의 수문장이니 자신의 문제 쯤은 가볍게 해결해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런데 솟대 오리는 공만이의 고민을 듣자마자 대뜸 양말부터 벗어보란다. 고린내 나는 양말을 가만히 보던 솟대 오리가 공만이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나흘 후에다시 오란다. 나흘 후 솟대 오리는 공만이의 우상인 메시의 그림자로 한 올한 올 짠 양말을 주며 아무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말란다. 드디어 공만이의 전성시대가 왔다. 그렇게 어렵던 축구가 누워서 떡 먹기가 됐다.

 

 

그런데 세상에 좋은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닌지 이제는 아이들이 공만이를 끼어주지 않으려 한다. 공 만질 기회가 너무 없다나 어쩐다나. 하긴 공만이도 재미가 전 같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만이의 소식을 듣고 온 어린이 축구단 감독의 테스트를 받다 공만이가 쓰러져, 한바탕 난리가 난다. 공만이의 심장이 축구 실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이 일을 계기로 공만이는 그림자양말을 솟대 오리에게 다시 주기로 마음 먹는다. 솟대 오리는 대신 굼벵이양말이 자라고 있다며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한다. 공만이가 올때부터 이미 발에서 굼벵이 마법이 자라고 있었다나 뭐라나......

 

 

앞으로도 공만이가 축구를 잘 할런지 못 할런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토록 좋아하고 꾸준히 노력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하나 잘 할 확률이 더 높아보이는 것은 공만이의 신발에서 항상 고린내가 났다는 점이다. 좋아하고 노력하는 사람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 게다가 공만이는 잘하지 못 했을 때의 비참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않은가. 아직은 아니지만 공만이가 축구왕이 될 날이 그리 멀지는 않아 보인다. 이미 공만이의 전성시대는 시작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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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을 위한 변명 - 해석에서 공감으로, 6개월의 마지막 여정
안석모 지음 / 두란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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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에 둔 한 인간의 내면을 본다는 건 비감스런 일이다. 그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는 사람에게 위로라며 입을 열어야하는 상황도 난감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통해 느끼게 되는 자신의 설명할 수 없는 감정 또한 여간 곤혹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자신도 겪게 될 일임을 알면서도 아직은 아니라는 안도감과 자신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그 야릇한 감정의 정체는, 우리가 맞닥트려야 하는 상대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시간 차만 있을 뿐 누구나 그 길을 가게 됨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그렇게 무겁고 고통스러우며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죽음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불청객이기도 하다. 지금껏 조금씩이나마 마음으로 준비해 온 시간들이 죽음의 통고 앞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절감토록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신앙인과 일반인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다음부터가 과제가 된다. 죽음의 통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 땅을 떠날 때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자신이 살아온 믿음의 길을 스스로에게 입증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불안의 이중고 속에서 신앙을 더 체화하며 깊은 곳으로 나아가느냐 주저앉느냐는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달려있으니 말이다.

 

 

그 시간을 감정의 과장이나 미화없이 병상일기로 써온 신학자의 기록이 있다. 감리교 목사며 신학교 교수인 안석모의 '욥을 위한 변명'이 그것이다. 2012년 5월 폐암 진단을 받은 후, 그해 10월부터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까지 안석모는 페이스북에 자신의 투병기를 올렸다. 환자로서의 감상만이 아닌 20여 년 넘게 돌봄과 상담을 가르친 교수로서, 투병과정에서 다른 각도로 만나게 된 예수님과 새롭게 깨닫게 된 신학적 지식을 그는 담담히 그러나 아프게 올렸다.

 

 

다음 날 전담 간호사가 척추 전이를 알려 왔다. '그래, 갈 데까지 다 갔구나.' 처음으로 내가 암 환자, 그것도 중증의 암 환자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환자가 되어 입원한 것이다. 비로소 그 사실이 인정되는 순간이었다.

 

2012년 10월 31일 부분 발췌

 

 

 

"하나님, 왜 제가 이런 질병을 앓아야 하지요?' 돌봄과 상담을 가르치는 교수가 돌봄과 상담을 직접적으로 받아야 하는 상황에 빠졌을 때의 당혹감을 아는가? 이는 마치 암을 고치는 의사가 암에 걸린 경우와 흡사할 것이다. 혹은 우울증을 상담해 주는 치료사가 우울증에 빠진 경우와도 비슷하다 할까.......(중략)....답이 있고, 원인이 있으면 그것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감내하려는 일말의 결심이라도 해보련만…. 그렇지 않을 때는 허공에 대고 분노하거나 항거할 일이다. 나는 "하나님, 왜 제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의 신앙은 하나님을 그렇게 비난하거나 혹은 그분께 원인을 귀속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병실에 앉아서 내 몸을 바라보며 "왜 내게?"라는 질문만 던질 뿐이다.

2012년 11월 1일 부분 발췌

 

 

누군가를 가르치고 돌보던 입장에서 추락하듯 하루 아침에 돌봄을 받아야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 이런 상황이 얼마나 난감하고 기막혔을까? 그러나 안석모는 좌절하고 낙심하기보다 조로증으로 아들을 잃은 랍비 헤럴드 쿠시너를 떠올리며, 그의 고통을 자신의 삶에 대입한다. 헤럴드 쿠시너의 책《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를 통해 '왜'라 물을 게 아니라 '어떻게'에 관심을 갖자며 스스로를 격려하고는 비록 납득 가능한 답은 쥐어지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순간을 의미로 채우는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결론 짓는다.

 

 

암 선고가 떨어졌을 때, 어느 성경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더듬거렸다. 식구들과는 복음서를 읽고 있었지만,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나만을 위한 말씀'을 읽으려 하는데......(중략).....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욥기를 읽어야지, 내가 바로 욥처럼 그런 정상에 빠져 있잖아 라는 속삭임이 있었다. 그러나 욥기를 읽기에 마음이 부담스럽고 또 기피하는 심정이 자꾸만 솟구쳐 올라와서 그러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방에 들어갔다가 아들 성경이 욥기를 펼쳐 놓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음이 울컥하였다.

2013년 3월 22일 부분 발췌

 

 

 

투병 기간은 단순히 병과의 싸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무너지는 자신을 보아야 하고 견뎌야 하며, 이제 자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절감하며 마지막을 정리하는 것을 뜻한다. 3월 22일 병상 일기 중 안석모는 욥기를 읽으며 분노를 넘어 격노했다고 표현했다. 이는 살고 싶다는 절규의 다름아니었다. 그러나 더 이상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지 못할 정도로 병이 진행되었고, 2013년 5월 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의 나이 육십 하나였다.

 

 

몸이 아플 때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누워 있는 것조차 고역인 그 때에도 안석모는 아픈 몸을 곧추세워 글을 써내려갔다.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폭풍처럼 그의 순간순간을 휩쓸고 갔을까. 생을 이런 식으로 급작스럽게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았을텐데, 안석모는 자신에게 주어진 병상의 모든 순간을 " 행복한 삶이었어요. 감사합니다."라는 마지막 인사를 통해 온전히 받아들이고 감사로 매듭짓는다.

 

 

페이스북에 올려져 생전엔 안석모를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자신의 고통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토록 한 글은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5월에 출간되었다. 한 인간의 진솔하고도 절절한 고백은 그가 생전 만났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과 만나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유를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 욥이 더 깊고 넓어졌던 것처럼, 안석모도 욥과 같은 고통을 통해 비록 지상에 없음에도 더 깊고 넓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시의 한 구절처럼 그의 책은 살아서 말하고 있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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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홀리데이 (2014~2015년 최신판, 휴대용 맵북) - 타이베이.가오슝.타이난.타이중 최고의 휴가를 위한 여행 파우치 홀리데이 시리즈 8
우지경.이주화 지음 / 꿈의지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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괌이나 사이판처럼 매혹적이지도 않고 일본처럼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도 나지 않지만, 알면 알수록 정겨운 곳이 대만이다. 우리나라의 반도 채 되지 않은 땅 떵어리에 우리와 비슷한 느낌마저 있어 해외여행지로서 그닥 매력적인 곳은 아니지만, 대만은 어느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묵직함과 여유를 가지고 있다. 대만을 규정짓는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대만을 좋은 추억으로 기억토록 하는 건 호의로 여행자를 대하는 사람들이다. 씩 웃으며 느긋하게 대응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마치 우리네 농촌의 마음씨 좋은 아저씨 아주머니를 만나는 느낌이다. 그럴 때 여행자의 긴장은 풀어진다. 

 

마치 몇 년전 일처럼 떠오르지만 대만을 세 번 연속 방문하고 안 간지 벌써 10년도 넘었다. 그때만 해도 대만을 그렇게 많이 방문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일행과 함께 택시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클론의 구준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여기가 한국인가 하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전 세계 어디를 가도 K-POP의 위력이 상당하지만 그때는 초창기여서 외국에서 우리 가수들의 노래를 듣는다는 건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우리로 치자면 남대문 시장 같은 야시장에서 우리 가요가 흘러나올 때, 그때 느꼈던 뿌듯한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다 좋았지만 두어 가지 어려운 점도 있었다. 길거리에서 커피자판기를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애석한 일이었다. 또 하나 음식이 너무 기름져 여행 마지막 날에는 얼굴에서 기름이 흐를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단체로 간데다 숙소가 대학 기숙사여서 씻는게 어려워 머리를 며칠 간 감지 못한 것도 그런 느낌을 부채질하긴 했다. 세번 째 갔을 때는 불과 일 주일 전 대만에 큰 지진이 났던 터라, 계속되는 여진으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를 하루 전까지 고민했었다. 막상 현지에 가니 타이페이 공항도 멀쩡하고 괜찮았는데, 두번 째 갔을 때 방문했던 마을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선량하게 웃던 어른들과 외국인이라며 반겼던 아이들의 생사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대만에 안 간지 꽤 긴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았을 때 '홀리데이 타이완'을 만났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작년에 '꽃보다 할배'를 통해 대만을 만나긴 했지만 책으로 만나는 건 또다른 느낌이었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 제공을 넘어, 발품을 판 흔적이 역력한 책을 보니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만의 착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만에 볼 게 이렇게 많았던가.....알려지지 않은 대만의 구석구석이 다 들어있는 느낌이었다. 뭔가 밋밋하다고 느꼈던 대만은 사라지고 없고, 태초의 신비와 역사의 지층을 가진 대만이 있었다. 절경의 연속이라는 타이루거 협곡과 한 폭의 수채화 같다는 아리산이 있었고, 과거를 재현한 듯한 옛 거리인 라오지에와 노천 온천인 힐링을이 있었다.

 

 

또한 여행자의 상황에 맞추어 선택할 수 있는 갖가지 여행 코스와 먹거리도 소개돼 있었다. 타이페이 근교를 여행할 수 있는 3박 4일 코스와, 커플과 아이들 및 기차 여행 마니아를 위한 하루 코스, 요즘 급부상하는 가오슝 3박 4일 코스도 들어있었다. 특히 대만 여행의 호사랄 수 있는 온천과 대만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먹거리와 다양한 숙소등이 잘 정리돼 있어 일일이 찾아야하는 수고를 겪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왠지 큰 짐을 던 듯한 느낌이었다. 가이드북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실제 여행에서 필요한 요긴한 정보가 잘 어울어져 있어, 이 책만 있으면 대만 여행을 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해외 여행이란 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이기도 하지만, 단체 여행이 아닌 이상 그만큼의 자질구레한 난관이 솔솔찮게 포진해 있는 것 아닌가.

 

 

대만 첫 방문시, 대만에서는 노점상도 벤츠를 탄다는 말을 듣고 깔깔 웃었던 기억이 난다. 돈 잘 벌게 해달라고 돈을 태우던 사람들, 노점에서 식사를 해결하던 사람들, 풀을 하도 씹어 이가 보라색으로 변했던 원주민들. 그들이 주었던 따스함이 생각난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대만도, 그 때 그 사람들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지금의 대만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책으로 만난 대만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으리 만큼 잘 꾸며져 있었고,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조감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었다. 작지만 묵직한 나라, 도도한 역사를 대륙에서 섬으로 가져 온 나라 대만은, 저력이 무엇인지를 실증하는 나라다. 그래서 한 번에 다 알 수 없고, 보고 또 봐야 윤곽을 잡을 수 있는 나라다. 그럴 때 여행자는 휴양지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안정과 평온함을 일상의 대만에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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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로 사랑했다 - 카피라이터 윤수정의 카피 노트
윤수정 지음 / 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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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언저리에 늘 불안이 묵직하게 들어앉아 있던 20대 후반 쯤이었다. 신문을 보다 눈에 띄는 광고 하나를 발견했다. 카피라이터를 뽑는다는 극장의 구인 광고였다. 전에 했던 일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어 별 부담없이 지원서를 냈다. 서류 전형에 통과되면 2차는 극장에서 직접 시험을 치른다고 했다. 시험 당일 영화관에서 각기 다른 영화 4편을 본 후 각 영화가 끝날 때마다 헤드카피, 메인카피, 보조카피, 광고 문구까지를 10분 안에 써내야 했다. 오전에 영화 두 편, 점심 먹은 후 연달아 또 두편을 보자니 마지막엔 머리도 어질어질하고 속까지 메슥거렸다. 게다가 보는 걸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준비~ 땅!' 하듯이 시험지를 받자마자 카피를 쓰자니, 꽁지에 불붙은 쥐마냥 달려가듯 써내려가야 했다. 시험은 저녁 6시쯤 끝났고,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후 며칠을 우편함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지냈다. 그러고도 얼마 더 지나 결과를 담은 봉투가 왔다. 차라리 깔끔하게 결과만 알려주지, 위로한다고 적은 글귀가 자존심을 더 상하게 했다. 글 쓰면서 가장 어려운 게 제목 뽑기고, 전체를 한 줄이나 두 줄, 혹은 몇 줄로 요약한다는 게 쉽잖은 일인줄 알면서도 기분이 안 좋았다. 그 다음부터 카피 쪽은 고개도 안돌리고 지냈다. 자신의 실력은 생각도 않고 상처를 받았다고 여겼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때때로 카피 쪽에 관심이 갔던 것은 그들이 써내는 문구들의 특별함 때문이었다. 재미있거나 상큼하고, 가슴을 때리거나 잔잔히 스며드는 그 문구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 썼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한 줄로 사랑했다'는 내가 떨어졌던 그 세계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든 카피라이터 윤수정의 책이다. 윤수정은 영화 전문 카피라이터다. 내가 봤던 영화의 카피가 그녀의 손에서 나왔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밟지 못한 세계라선지 더 관심이 갔다. 그러나 초반 좀 긴 듯한 문장과 군더더기처럼 느껴지는 글들이 살짝 거슬렸다. 글과 매치되지 않는 듯한 삽화도 몰입을 방해하긴 했다. 하지만 그녀와 나의 호흡이 맞춰질 때쯤 돼서는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무엇보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자 편안하게 글을 따라갈 수 있었다. 카피라이터도 글로 자신의 카피를 풀자니 몸이 덜 풀린건 아닌가 하곤 이해했다. 아마 조금 긴장했었으리라. 카피와 책은 또 다른 세계일 수 있으니까.

 

윤수정의 글은 감성적이다. 그녀가 얼마나 여린 사람인지, 얼마나 감정을 잘 다칠 수 있는 사람인지는 글을 읽어가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도 글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그녀의 강함은 조직을 택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어간 걸 통해 알 수 있다. 또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인연을 조직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난다긴다 하는 사람이 모인 광고계에서, 거칠다면 거칠 수 있는 영화판에서, 그녀가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외연을 넓힌 것은 많은 순간들을 참고 견디며 자신 안에서 소화했다는 사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강함의 원천은 그녀의 감성에 있다. 그 감성을 붙잡고 인간의 소중함을 무엇보다 우선했기에 그녀가, 그녀가 쓴 카피가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

 

동생은 오전반 오빠는 오후반 운동화는 한 켤레

 

 

자, 이 착하디착한 영화에게 나는 어떤 카피를 주어야 할까. 오빠와 여동생, 그리고 그들의 운동화 한 켤레를 나눠 신는 아름다운 이어달리기가 이야기의 핵심이 될 것이다. 아이들이 타박타박 달려가는 리듬감을 담을 수 있다면 그래서 마치 동요처럼 읽는 것만으로도 동심이 느껴진다면 좋을 것이다. 하긴 느린 달리기와 동심은 최고의 친구다. 우리는 모두 그 달리기를 겪고 어른으로 자라왔다. 기억 속에 잠긴 어린 시절의 노래를 건져 햇볕에 말리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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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느낌이었다. 그렇게, 넉 점 반, 넉 점 반의 운율에 맞춰 줄거리를 정리했다. 오전반, 오후반, 운동화……그렇게 완성한 카피였다. 몽타주 기법에서 컷과 컷을 겹치듯 오전반의 동생과 오후반의 오빠를 겹치고 두 사람과 대비되는 갈등의 요소 한 켤레의 운동화로 마무리했다. "동생은 오전반,오빠는 오후반, 운동화는 한 켤레." 카피를 완성하고 읽다보니 동시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넉 점 반, 넉 점 반' 노래를 부르며 온 마을을 돌고 오는 아기가 오랜만에 내 마음도 들렀다.

천국의 아이들 pp. 111~112

 

 

어떤 상황에서도 윤수정이 택하는 것은 따뜻함이었다. 많은 방법 중에서도 그녀는 굳이 가장 약하고 흐릿한 방법을 택했다. 피튀기는 카피, 보자마자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극단적인 카피를 생각해 볼 수도 있으련만 그녀는 직선을 두고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카피를 뽑아냈다. 그랬기에 그녀의 카피는 힘이 있었고 생명력이 길었다.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 그래서 더러운 세상이 아니라 그럼에도 살만하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우리 안에서 찾아보지 않겠냐는 청유의 글로 그녀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또한 가라앉은 마음에 살포시 향기를 불어넣었고, 일상의 작은 행복을 가슴 깊이 느끼도록 했으며, 짝사랑의 애틋함을 세상 가득 비추는 찬란함으로 채워넣었다.

 

때로 수많은 말보다 한 마디의 말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때가 있다. 줄이고 줄여 더 이상 줄일 게 없지만 온기를 머금은 그런 말 말이다. 그런 카피 한 줄을 뽑기 위해 윤수정은 수많은 생각을 품고 버리며, 많은 밤을 밝혔다. 그래서 이 책은 '카피라이터 윤수정의 카피 노트'라는 부제가 붙었음에도 읽는 이의 생각을 바꾸거나 관점을 달리 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영화 카피를 뽑았던 시간이야말로 그녀가 빛나던 순간이었으며, 영화라는 대상과의 내밀한 이야기야말로 자신을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곱고 아름답지만 미화하지 않으며, 나직하지만 어떤 식이라도 할 말은 하는 카피이기에 격랑이 이는 영화판에서 그녀가 자신만의 자리를 갖고 있으리라. 마치 남의 연애편지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느꼈던, 잔잔한 재미가 넘실댔던 흔치 않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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