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 줄로 사랑했다 - 카피라이터 윤수정의 카피 노트
윤수정 지음 / 달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마음 언저리에 늘 불안이 묵직하게 들어앉아 있던 20대
후반 쯤이었다. 신문을 보다 눈에 띄는 광고 하나를 발견했다. 카피라이터를 뽑는다는 극장의 구인 광고였다. 전에 했던
일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어 별 부담없이 지원서를 냈다. 서류 전형에 통과되면 2차는 극장에서 직접 시험을 치른다고 했다. 시험 당일 영화관에서
각기 다른 영화 4편을 본 후 각 영화가 끝날 때마다 헤드카피, 메인카피, 보조카피, 광고 문구까지를 10분 안에
써내야 했다. 오전에 영화 두 편, 점심 먹은 후 연달아 또 두편을 보자니 마지막엔 머리도 어질어질하고 속까지 메슥거렸다. 게다가 보는 걸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준비~ 땅!' 하듯이 시험지를 받자마자 카피를 쓰자니, 꽁지에 불붙은 쥐마냥 달려가듯 써내려가야 했다. 시험은 저녁 6시쯤
끝났고,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후 며칠을 우편함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지냈다. 그러고도 얼마 더 지나 결과를 담은 봉투가 왔다.
차라리 깔끔하게 결과만 알려주지, 위로한다고 적은 글귀가 자존심을 더 상하게 했다. 글 쓰면서 가장 어려운 게 제목
뽑기고, 전체를 한 줄이나 두 줄, 혹은 몇 줄로 요약한다는 게 쉽잖은 일인줄 알면서도 기분이 안 좋았다. 그 다음부터 카피 쪽은 고개도
안돌리고 지냈다. 자신의 실력은 생각도 않고 상처를 받았다고 여겼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때때로 카피 쪽에 관심이 갔던 것은
그들이 써내는 문구들의 특별함 때문이었다. 재미있거나 상큼하고, 가슴을 때리거나 잔잔히 스며드는 그 문구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 썼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한 줄로 사랑했다'는 내가 떨어졌던 그 세계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든 카피라이터 윤수정의 책이다.
윤수정은 영화 전문 카피라이터다. 내가 봤던 영화의 카피가 그녀의 손에서 나왔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밟지 못한 세계라선지 더 관심이 갔다.
그러나 초반 좀 긴 듯한 문장과 군더더기처럼 느껴지는 글들이 살짝 거슬렸다. 글과 매치되지 않는 듯한 삽화도 몰입을 방해하긴 했다. 하지만
그녀와 나의 호흡이 맞춰질 때쯤 돼서는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무엇보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자 편안하게 글을 따라갈 수
있었다. 카피라이터도 글로 자신의 카피를 풀자니 몸이 덜 풀린건 아닌가 하곤 이해했다. 아마 조금 긴장했었으리라. 카피와 책은 또 다른 세계일
수 있으니까.
윤수정의 글은 감성적이다. 그녀가 얼마나 여린 사람인지, 얼마나 감정을 잘 다칠 수 있는 사람인지는
글을 읽어가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도 글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그녀의 강함은 조직을 택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어간 걸 통해 알 수 있다. 또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인연을 조직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난다긴다 하는 사람이 모인
광고계에서, 거칠다면 거칠 수 있는 영화판에서, 그녀가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외연을 넓힌 것은 많은 순간들을 참고 견디며 자신 안에서
소화했다는 사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강함의 원천은 그녀의 감성에 있다. 그 감성을 붙잡고 인간의 소중함을 무엇보다 우선했기에
그녀가, 그녀가 쓴 카피가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
동생은 오전반 오빠는 오후반 운동화는 한
켤레
자, 이 착하디착한 영화에게 나는 어떤 카피를 주어야 할까.
오빠와 여동생, 그리고 그들의 운동화 한 켤레를 나눠 신는 아름다운 이어달리기가 이야기의 핵심이 될 것이다. 아이들이 타박타박 달려가는 리듬감을
담을 수 있다면 그래서 마치 동요처럼 읽는 것만으로도 동심이 느껴진다면 좋을 것이다. 하긴 느린 달리기와 동심은 최고의 친구다. 우리는 모두 그
달리기를 겪고 어른으로 자라왔다. 기억 속에 잠긴 어린 시절의 노래를 건져 햇볕에 말리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그 느낌이었다.
그렇게, 넉 점 반, 넉 점 반의 운율에 맞춰 줄거리를 정리했다. 오전반, 오후반, 운동화……그렇게 완성한 카피였다. 몽타주 기법에서 컷과 컷을
겹치듯 오전반의 동생과 오후반의 오빠를 겹치고 두 사람과 대비되는 갈등의 요소 한 켤레의 운동화로 마무리했다. "동생은 오전반,오빠는 오후반,
운동화는 한 켤레." 카피를 완성하고 읽다보니 동시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넉 점 반, 넉 점 반' 노래를 부르며 온 마을을 돌고 오는 아기가
오랜만에 내 마음도 들렀다.
천국의 아이들 pp.
111~112
어떤 상황에서도 윤수정이 택하는 것은 따뜻함이었다. 많은
방법 중에서도 그녀는 굳이 가장 약하고 흐릿한 방법을 택했다. 피튀기는 카피, 보자마자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극단적인 카피를 생각해 볼 수도 있으련만 그녀는 직선을 두고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카피를 뽑아냈다. 그랬기에 그녀의 카피는 힘이
있었고 생명력이 길었다.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 그래서 더러운 세상이 아니라 그럼에도 살만하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우리
안에서 찾아보지 않겠냐는 청유의 글로 그녀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또한
가라앉은 마음에 살포시 향기를 불어넣었고, 일상의 작은 행복을 가슴 깊이 느끼도록 했으며, 짝사랑의 애틋함을 세상 가득 비추는 찬란함으로
채워넣었다.
때로 수많은 말보다 한 마디의 말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때가 있다. 줄이고 줄여 더 이상 줄일 게 없지만 온기를 머금은 그런 말 말이다. 그런 카피 한 줄을 뽑기 위해 윤수정은 수많은 생각을 품고
버리며, 많은 밤을 밝혔다. 그래서 이 책은 '카피라이터 윤수정의 카피 노트'라는 부제가 붙었음에도 읽는 이의 생각을 바꾸거나 관점을 달리
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영화 카피를 뽑았던 시간이야말로 그녀가 빛나던 순간이었으며, 영화라는 대상과의 내밀한 이야기야말로 자신을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곱고 아름답지만 미화하지 않으며,
나직하지만 어떤 식이라도 할 말은 하는 카피이기에 격랑이 이는
영화판에서 그녀가 자신만의 자리를 갖고 있으리라. 마치 남의 연애편지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느꼈던, 잔잔한 재미가 넘실댔던 흔치
않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