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박동을 듣는 기술
얀 필립 젠드커 지음, 이은정 옮김 / 박하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지상에서 시·공간의 제약을 유일하게 무력케 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사랑의 힘은 그렇게 컸다. 그런데 사랑이 성적인 이끌림과 혼재되면서, 사랑이란 말은 남발되었고 그 의미는 축소되었다. 누군가에게 매료되는 것을 사랑이라 착각하면서 사랑은 힘을 잃었고, 더 이상 사람들은 사랑의 힘을 믿지 않게 되었다. 본래 사랑은 신성한 것이었다. 그것에 맞닿아 있을 때에만 우리는 아름답고 이타적일 수 있었다. 신성에 접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숭고한 시간이 사랑 속에 있었다. 사랑은 그렇게 고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만은 지켰어야했다. 그것이 결국은 우리를 지키는 것이니까. 사랑을 즉흥적이고 찰나적으로 만들면서 사랑은 사라지고 말았다. 하룻밤의 격정 속에서 사랑을 찾으려니 사랑을 볼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이 그렇게 값싼 감상이었다면, 삶은 오히려 쉬웠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선택한 대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행위이자, 그의 삶이 내 삶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핑크빛 기쁨과 비례하는 삶의 뒷편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가볍게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랑은 찬란하다고 이 책은 선언한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의 결정이 사랑이며, 무형의 위대함이라 칭하며 그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현실에서는 슬픈 이야기로 불릴 수 밖에 없음 또한 암시하며 시작한다.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후 4 년이 지난 어느 날, 딸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미얀마로 향한다. 그곳에서 딸 줄리아는 우 바라는 남자를 만나, 아버지 틴 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버지의 고통스럽고 슬픈 어린 시절과 아버지가 평생을 마음에 두고 사랑한 여인 미밍에 대한 이야기는 줄리아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였다. 아니다.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가 아니라 그 날에 태어나서는 안되는 아이였다. 그러나 하필 그 날에 태어나면서 아버지는 저주받은 아이로 치부되며 자란다. 부모는 아이가 불편했고  제대로 된 사랑은 생각도 못했다. 병 중에 있던 친척이 죽어도 아이 탓이었고, 집에서 키우던 닭이 죽어도 아이 때문이었다. 불행을 가져다 주는 아이라고만 여긴 부모에게 점성술사는 아이의 특별한 점을 말해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날 남편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 버린다. 수치라는 아줌마의 극진한 보호 속에 자라지만 천애고아에 눈까지 보이지 않게 된 아이에게 삶은 결코 친절할 수 없었다.

 

그런 아이에게 어느날 다가온 소녀는 결코 단순한 친구일 수 없었다. 서로의 아픔과 각자가 가진 각별한 감성은, 가슴 깊이 드리워진 삶의 그늘을 지워주며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다. 빼어난 용모를 하고서도 네 다리로 걸을 수 밖에 없던 소녀에게 아이는 세상으로 향하게 만드는 새로운 출구였다. 이는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자신을 감싸고 있던 헤어날 수 없는 어둠이 소녀 곁에만 있으면 밝은 빛으로 바뀌었다. 두 아이에게는 서로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곳이었다.   

 

"틴 윈은 미밍에게 신뢰를 가르쳐주었고 마음 놓고 약한 모습을 보이게 해주었다. 틴 윈과 함께 있으면 미밍은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됐다. 틴 윈은 미밍이 네 발로 기어다니는 자신을 얼마나 부끄럽게 여기는지 털어놓은 처음이자 유일한 상대였다. 그녀는 또 이따금 깔로를 두 발로 걸어 다니고 공중으로 한껏 뛰어오르는 꿈을 꾼다는 말도 들려주었다. 그럴 때 틴 윈은 미밍을 위로해주지 않았다. 말없이 안아주기만 했다. 미밍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떤 기분인지 틴 윈이 이해하리라 믿었다. 두 발로 걷고 싶은 욕망에 대해 말할수록 그로 인한 고통은 줄어들었다. 게다가 틴 윈이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몸은 없을 거라고 말해주었을 때 미밍은 그 말을 믿었다."

pp 251~252 

 

그러나 운명은 잔인했다. 서로가 전부이며 그 이상을 원치 않았건만 운명은 그들을 갈라 놓은 후 마음껏 휘둘러댔다. 그후 반 세기가 지나도록 그들은 만나지 못했고, 서로의 소식조차 듣지 못했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며 삶을 꾸려나갔다. 기다림에 지쳐 한번쯤 원망스런 말이 나오기도 하련만, 그들은 변함없이 사랑했고 흔들리지 않았다. 만날 수 없는 환경이 주는 불안함에도 그들은 꿋꿋했으며, 불행하다고 느끼기보다 지금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평온을 이끌어냈다. 그런 삶의 결과가 자신임을 알게 된 줄리아는 아버지의 삶과 사랑의 방식을 마침내 용납하게 된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 그 아버지가 왜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 없었는지 줄리아는 이제서야 이해하게 된다. 떨어져 있었으나 결코 혼자가 아니었던 그들이 어떻게 서로의 사랑을 간직했는지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들의 사랑이 이렇게라도 연결되어 다행이라 줄리아는 생각한다. 또한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게 아니라 본래 가야할 곳으로 때 맞춰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귀결임을 느낀다. 짐작도 못했던 아버지의 20년이 또다른 사랑의 선물로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줄리아는 사랑의 숭고함과 설명할 수 없는 신비를 가슴에 담는다.

 

사랑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사람 간의 신뢰가 제거된 세상에서, 꿈같고 동화같은 이야기 한 편을 읽었다. 조금 슬펐지만 마음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유일한 선이 사랑이라는 걸 미밍을 통해 다시금 느껴 본다. 충분히 절망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미밍은 인간 고통의 날 것으로 사랑을 오염시키지 않았다. 미밍에게 사랑은 포기하지 않아야 할 이유였으며 자신을 존케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사랑엔 실패가 없는데 자신을 사랑의 실패자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조용히 건내고 싶다. 사랑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아니 사랑은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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