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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을 위한 변명 - 해석에서 공감으로, 6개월의 마지막 여정
안석모 지음 / 두란노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죽음을 앞에 둔 한 인간의 내면을 본다는 건 비감스런
일이다. 그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는 사람에게 위로라며 입을 열어야하는 상황도 난감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통해 느끼게 되는 자신의 설명할 수 없는 감정
또한 여간
곤혹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자신도 겪게 될 일임을 알면서도 아직은 아니라는 안도감과 자신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그 야릇한 감정의 정체는, 우리가 맞닥트려야 하는 상대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시간 차만 있을
뿐 누구나 그 길을 가게 됨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그렇게 무겁고 고통스러우며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죽음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불청객이기도 하다.
지금껏 조금씩이나마 마음으로 준비해 온 시간들이 죽음의 통고 앞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절감토록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신앙인과
일반인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다음부터가 과제가 된다. 죽음의 통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 땅을 떠날 때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자신이 살아온 믿음의 길을 스스로에게
입증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불안의 이중고 속에서 신앙을 더 체화하며 깊은 곳으로 나아가느냐 주저앉느냐는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달려있으니 말이다.
그 시간을 감정의 과장이나 미화없이 병상일기로 써온
신학자의 기록이 있다. 감리교 목사며 신학교 교수인 안석모의 '욥을 위한 변명'이 그것이다. 2012년 5월 폐암 진단을 받은 후, 그해
10월부터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까지 안석모는 페이스북에 자신의 투병기를 올렸다. 환자로서의 감상만이 아닌 20여 년 넘게 돌봄과 상담을 가르친 교수로서,
투병과정에서 다른 각도로 만나게 된 예수님과 새롭게 깨닫게 된 신학적 지식을 그는 담담히 그러나 아프게 올렸다.
다음 날 전담 간호사가 척추 전이를 알려 왔다. '그래,
갈 데까지 다 갔구나.' 처음으로 내가 암 환자, 그것도 중증의 암 환자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환자가 되어 입원한 것이다.
비로소 그 사실이 인정되는 순간이었다.
2012년 10월 31일 부분 발췌
"하나님, 왜 제가 이런 질병을 앓아야 하지요?' 돌봄과
상담을 가르치는 교수가 돌봄과 상담을 직접적으로 받아야 하는 상황에 빠졌을 때의 당혹감을 아는가? 이는 마치 암을 고치는 의사가 암에 걸린
경우와 흡사할 것이다. 혹은 우울증을 상담해 주는 치료사가 우울증에 빠진 경우와도 비슷하다 할까.......(중략)....답이 있고, 원인이
있으면 그것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감내하려는 일말의 결심이라도 해보련만…. 그렇지 않을 때는 허공에 대고 분노하거나 항거할 일이다. 나는
"하나님, 왜 제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의 신앙은 하나님을 그렇게 비난하거나 혹은 그분께 원인을 귀속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병실에 앉아서 내 몸을 바라보며 "왜 내게?"라는 질문만 던질 뿐이다.
2012년 11월 1일 부분 발췌
누군가를 가르치고 돌보던 입장에서 추락하듯 하루
아침에 돌봄을 받아야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 이런 상황이 얼마나 난감하고 기막혔을까? 그러나 안석모는
좌절하고 낙심하기보다 조로증으로 아들을 잃은 랍비 헤럴드 쿠시너를 떠올리며, 그의 고통을 자신의 삶에 대입한다. 헤럴드 쿠시너의 책《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를 통해 '왜'라 물을 게 아니라 '어떻게'에 관심을 갖자며 스스로를 격려하고는 비록 납득 가능한 답은 쥐어지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순간을 의미로 채우는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결론 짓는다.
암 선고가 떨어졌을 때, 어느 성경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더듬거렸다. 식구들과는 복음서를 읽고 있었지만,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나만을 위한 말씀'을 읽으려
하는데......(중략).....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욥기를 읽어야지, 내가 바로 욥처럼 그런 정상에 빠져 있잖아 라는 속삭임이 있었다.
그러나 욥기를 읽기에 마음이 부담스럽고 또 기피하는 심정이 자꾸만 솟구쳐 올라와서 그러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방에 들어갔다가 아들
성경이 욥기를 펼쳐 놓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음이 울컥하였다.
2013년 3월 22일 부분 발췌
투병 기간은 단순히 병과의 싸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무너지는 자신을 보아야 하고 견뎌야 하며, 이제 자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절감하며 마지막을 정리하는 것을 뜻한다. 3월 22일 병상 일기 중 안석모는 욥기를 읽으며 분노를 넘어 격노했다고 표현했다. 이는 살고 싶다는 절규의 다름아니었다. 그러나 더 이상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지 못할 정도로 병이 진행되었고, 2013년 5월 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의 나이 육십 하나였다.
몸이 아플 때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누워 있는 것조차 고역인 그 때에도 안석모는 아픈 몸을 곧추세워 글을 써내려갔다.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폭풍처럼 그의 순간순간을 휩쓸고
갔을까. 생을 이런 식으로 급작스럽게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았을텐데, 안석모는 자신에게 주어진 병상의 모든 순간을 " 행복한 삶이었어요.
감사합니다."라는 마지막 인사를 통해 온전히 받아들이고 감사로 매듭짓는다.
페이스북에 올려져 생전엔 안석모를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자신의 고통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토록 한 글은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5월에 출간되었다. 한 인간의 진솔하고도 절절한
고백은 그가 생전 만났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과 만나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유를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 욥이 더 깊고 넓어졌던
것처럼, 안석모도 욥과 같은 고통을 통해 비록 지상에 없음에도 더 깊고 넓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시의 한
구절처럼 그의 책은 살아서 말하고 있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