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찰을 전하는 아이 푸른숲 역사 동화 1
한윤섭 지음, 백대승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때 만났던 위인들 ]

어릴 때 위인전을 자주 읽었다. 위인전을 읽다보면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그런데 위인들 중에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계셨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그분들을 살리고 싶었다. 그분들에게 자신을 모함한 사람을 알려드린 후 나라를 위해 오랜 시간 자신을 드릴 수 있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상상을 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친 후 허연 머리와 수염을 하고 마루에 앉아서 어린 아이들과 웃고 있는 모습을 머릿 속에 그려드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억울한 죽음을 위로해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있어도, 과거에 있었던 일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때 부터 내 상상력은 빠르게 사라졌다. 위인전의 의미 또한 어릴 때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의 하나로 퇴색돼 버렸ㄷ. 그 이후 위인들의 삶은 현재의 내 삶에 밟혀 흔적도 찾기 힘들게 되었다. 그렇게 내 기억 속 지층에서도 저 밑에 자리하게 되었을 때 '서찰을 전하는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만나게 한 아이]

동학혁명에 대한 말하지만 녹두장군 전봉준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실패한 혁명의 이야기는 태생상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돼 있지 않다. 게다가 뻔히 아는 이야기 속에 특별한 무엇이 있을거라는 기대감도 일지 않았다. 그런데 노란 색으로 산과 마을을 표현한 책의 표지가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하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가 동학혁명과 무슨 관련이 있는건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나도 이 아이와 함께 내 어릴 적 그 마음으로 돌아가 그 시대의 냄새를 맡아야 겠다고.

아이의 이름을 작가는 알려주지 않았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시대에 어린 아이의 이름이 뭐 그리 대수일까. 아이 또한 지금 천지간 의지할 데라곤 없는 처지가 돼버렸는데 말이다. 3년 전 세상을 뜬 어미도 마음에서 다 지우지 못했는데 홀로 남은 보부상 아비도 도방에서 죽고 말았다. 아이에게 남아 있는 건 돈 몇 냥과 아비가 노스님의 심부름으로 누군가에게 전하려던 서찰이 하나 있을 뿐이다. 글은 한자로 되어있고 모두 열 글자다. 아이는 그 서찰이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구한다는 것을 아비를 통해 들었기에 서찰의 내용을 알아야만 했다.  

[13살의 아이, 역사의 현장으로 발을 깊숙이 디디다]

아버지에게는 그외에 어떤 말도 들은 바 없고 단지 전라도 땅을 향해 가고 있었다는 사실만 알 따름이다. 아이는 한자를 몇 자로 나눠 머리에 각인 시킨후 노정에서 돈을 주고 글자의 의미를 알아간다. 처음엔 글 두자에 두냥, 다음번엔 세자에 두냥, 그 후엔 세 자에 한 냥, 마지막 두자는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의미를 알아낸다. 세상에 거저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작가 한윤섭은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에 홀로 떨어진 아이에게 과하다 싶을 만큼 작가는 돈을 지불하게 한다. 돈을 지불하고 사람을 상대하면서 아이는 세상을 헤쳐나갈 지혜도 더불어 배운다. 그리하여 아이는 마침내 글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 의미는 '녹두리에서 경천이라 사람이 녹두장군을 팔아서 슬프다'라는 것이었다.

이제 아이는 아비의 뜻이자 자신의 바람이 된 서찰을 전할 수 있게 됐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아비의 말만을 떠올리며 떠났던 길의 목적지가 환하게 보이게 됐다. 아이는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도 마다하지 않으며 홀로 길을 간다. 그러던 중 위험을 피해 잠시 머물던 사찰에서 그렇게도 만나고 싶었던 녹두장군을 만나게 돼 스님 편에 서찰을 전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녹두장군이 관군에 잡혔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분명히 전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 아이는 압송되는 녹두장군을 길가에서 만나 울음 섞인 소리로 외친다. '왜 피노리에 왔냐고' 아이의 물음에 녹두장군은 '동지를 믿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며 아이를 위로한다. 아이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약이었던 자신의 소리를 녹두장군을 향해 들려준다. 녹두장군의 허리는 서서히 펴진다.

아이는 이제 서찰을 준 스님을 만나기 위해 북한산에 와 있다. 아이는 암자 위쪽에 있는 웅덩이에서 자신의 비춰진 얼굴을 보고 있다. 아버지와 같이 왔을 때는 봇짐장수의 얼굴이더니 이제 자신의 얼굴은 멋지게 변해 있다. 그 이후 아이의 소리에 있던 힘은 사라지고 아이는 녹두장군의 기상과 그 때 옆에서 사람들이 불러주었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가슴에 오래도록 세기게 된다. 

[어린 아이를 통해 지난 역사를 위로하다]

어릴 때 녹두장군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던 사진을 교과서에서 보았다. 상투를 틀었지만 망건이 씌어져 있지 않은 머리는 어린 내게도 그가 양반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압송되어가는 사람의 기상이 대단했다. 그 사진이 찍힌지 며칠 지나지 않아 그가 효수되었다는 글을 연이어 읽었다. 전봉준 뿐 아니라 수 많은 사람이 당시 죽었다. 백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밥만 챙기려는 양반들과 그들의 하수인, 그리고 청군과 일본군의 손에 무참히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서러운 죽음을 작가 한윤섭은 보잘 것 없는 한 어린 아이의 마음을 통해 위로해 주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죽음이 허망하지 않았음을 기억하길 원했다.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 할지라도, 설사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정신은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피는 이 땅에 뿌려져 후에 다른 모습으로 열매 맺게 될 터였음을 사람들이 알게 되길 원했다. 그 서찰을 전하고서도 전봉준을 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지키고자 했던 동학의 정신은 읽혀졌다. 비록 졌지만 동학의 정신은 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동료도 믿지 못한채 동학의 의미를 살릴 수 없었다는 전봉준의 고백은 죽음이 꼭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이제는 나도 죽음의 의미를 달리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세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버리고 대의를 위해 살았다면 그것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말이다. 어린이를 위한 역사 동화 속에서 나는 어떤 백과사전보다도 더 큰 가치를 배우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반양장) 반올림 1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세상에 죽음보다 무거운 것은 없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합쳐도 죽음의 무게보다 더할 수 없으며, 어떤 부피도 죽음보다 클 수 없다. 죽음은 세상의 도량형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 유사 이래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던 이 인간의 숙명은 생과 사를 나누었고, 진정한 슬픔이 무엇인지를 상실감을 통해 시간을 두고 가르쳤다. 오로지 혼자서만 치뤄야 하는 절대적 고독의 순간은, 인간 뿐 아니라 생명있는 모든 것들을 태어나면서부터 두려움에 떨게 했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는 죽음을 정면으로 다룬 성장 소설이다. 이 책은 죽음의 발자국을 직감적으로 아는 노년이나,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조금씩 준비한 장년을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죽음과 멀어도 한참 멀어야 할 어린 친구들이 너무도 이른 나이에 피어 보지도 못하고 맞게 된 죽음이 애처로워 이경혜가 오로지 어린 친구들만을 위해 쓴 책이다.

" 돌아다 보니 주위에는 그렇게 어린 나이에 어이없이 사라져 간 소년들이 뜻밖에 많았습니다. 이미 사라져 간 그 소년들에게 유별나고, 극적이고, 고통스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어디에도 비극의 그림자가 스미지 못하는 그런 평화롭고 사소한 시간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 소년들이 이 글 속에 머물러 아기자기한 삶의 한 자락을 잠시나마 누리다 갈 수 있게 말입니다. "

그래서 이 책은 일찍 사라져간 어린 소년들을 위한 진혹곡이 된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무겁지 않으며 오히려 경쾌하다 싶을 만큼 산뜻하다. 그런 느낌이 나는 것은 비록 이 땅에 없을지라도 한때 생명력으로 충만했던 어린 소년들에게 안락을 선물해주고 싶은 작가의 숨은 배려일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재준이가 살아 생전 따뜻하고 살가웠던 것처럼 이 책 또한 그렇다. 재준이는 중학교에 다니는 남학생으로 또래보다 작은 키에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착한 친구다. 그런 재준이에게 처음으로 생긴 여자 친구가 유미다. 외톨이였던 둘은 금새 친해졌고 말 그대로 진짜 친구였기에 서로가 가장 편했다. 그런 재준이와 유미에게 짝사랑 상대가 생긴다. 둘은 서로 잘해보라며 격려도 하고 지원사격도 해보지만 둘다 보기 좋게 차이고 만다. 유미는 유미대로, 재준이는 재준이대로 이루지 못한 짝사랑에 가슴 아파하며 상처를 지우기 위해 춘천으로 놀러간다. 아픔을 씻기 위해 찾은 그 곳에서 유미는 재준이에게 일기장을 선물한다. 그 일기장에 재준이는 그 다음해 초부터 세상과 이별하기 삼일 전까지 일기를 쓴다. 일기장은 재준이가 사고로 세상을 뜬지 두 달이 지나서야 유미에게 전해진다. 재준이에 대한 추억은 이 책의 화자인 유미를 통해 그려지고 유미는 재준이의 일기를 보면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재준이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일기 속에는 더없이 평범하고 자잘한 일상과 어린 소년이 겪게되는 사춘기의 성장통이 고스란히 묘사돼 있다.

재준이는 자신이 짝사랑한 소희에 대한 감정을 일기 속에 솔직하게 드러냈다. 유미는 자신보다 소희가 차지한 자리가 크다는 사실에 약간의 배신감과 더불어 질투의 감정을 느낀다. 재준이는 소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오토바이를 배웠고 결국 오토바이를 타다가 변을 당했다. 유미는 일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소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변해 있음을 느낀다. 재준이가 사랑하던 사람이기에 자신도 미워할 수 없으며, 소희가 있었기에 짧은 생에도 불구하고 재준이가 사랑을 경험해 볼 수 있었음을 깨닫고는 오히려 고맙게 생각한다. 소희가 없었다면 재준이는 사랑도 못해보고 세상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일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제 유미는 재준이와 작별 인사를 한다.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삶에 무거운 사랑을 남기고 간 너를 잊지 못할 것이라며 고마웠다' 말하고는 잠을 청한다. 

 이 책에는 생과 사의 두 모습이 등을 맛댄 사람처럼 긴밀히 연결돼 그려져있다. 삶은 어리다고 봐주지 않았고 죽음 또한 어리다고 순서를 늦춰 주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직시했음에도 이경혜는 해맑았던 한 소년의 끊어져버린 삶을 결코 비극으로 채색하지 않았다. 더하여 상실을 슬픔안에 가두지 않음으로 그 의미를 성숙으로 가는 단계로까지 승화시켰고, 어린 친구들에게 삶과 죽음이 동일선상에 있음을 솔직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자신이 크게 의지했던 친구에게 자신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진 타인이 있음을 뒤늦게 알았음에도, 죽은 친구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유미의 모습은 왠만한 어른에게서도 찾기 힘든 모습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걱정하고 불안해하기만 했지 아이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지 않고 헤아리지 않았던 어른들에게 이경혜는 유미를 보여줌으로서 직접화법보다도 더 내재적이고 강한 공명을 불러 일으킨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어린 친구들의 눈높이에 맞춰 생동감있게 그려낸 이 책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학생들에게 그간 적잖은 위로를 주어왔다. 또한 언제든 일탈할 수 있고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정서적 불안정 속의 어린 친구들에게 죽음이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짝사랑하는 여자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목숨을 건 시도를 했고 결국 목숨까지 잃었지만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도전한 재준이를 아름다웠다고 기억하는 유미의 모습은 소년의 죽음이 결코 허망하지 않았음을 나직하게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재준이의 일기장 맨 앞에 쓰여진 말로 이 글의 마무리를 짓고자 한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켄슈타인 가족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책의 표지를 보나, 띠지로 보나 프랑켄슈타인 가족은 현대인의 정신적 병리 현상을 다루는 처럼 보였다. 다양한 병명과 증상이 표지의 뒷면을 장식하고 있었고 앞면엔 증상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화려하게 찍혀 있었다. 괴기스러워 보이는 나무를 뒤로 한 현대식 주택은 웅장하고 근엄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고,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고통스런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하늘 저 쪽엔 아직 날도 채 저물지 않았건만 음흉스런 박쥐 한 마리가 서성이듯 날고 있었다. 네 명의 남성들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두 명의 여성은 상반된 포즈를 취한 채 자신의 모습을 실루엣만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표지화는 이 책의 내용을 단박에 정리시켜 주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림을 살펴보았다. 표지화 속의 인물들은 불편하고 불안한 사람의 심리를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길을 몰라 헤매는 사람처럼 자신의 고통 속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비애의 느낌을 주었지만 실상 그들의 삶은 비참했을 것이며, 괴로운 심정은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의 처절함이 그들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좀 전보다 더 가까이 갔다. 나는 그들을 클로우즈 업하여 그들의 폐부까지라도 살피고 싶었다.

혼자서만 비를 맞고 있는 창백한 중년의 신사와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사이엔, 얼굴의 반을 마스크로 가린 청년이 온 몸에 힘을 준 채 현관 계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늘 긴장 상태로 지냈는지 청년의 근육은 경직돼 보였고, 눈은 잠시도 쉬지 못한 자의 초긴장 상태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가족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 그림은 개체화되고 개별화된 현대인의 초상을 비추는 듯했다. 이들을 구원해 줄 사람은 없는가? 

이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유일한 한 사람, 소울 메이트 김인구를 만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신과 전문의인 김박사의 환자들로 이들의 증상은 김박사만이 다루고 치료해 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김박사는 말 그대로 이들의 소울 메이트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가정내의 불화로 사람들의 입초사에 오르내리더니 어느날 병원을 정리하고 가평으로 내려가 버렸다.

김박사는 요즘 고민이 많다. 딸 하나의 유학길에 뒷바라지차 같이 갔던 아내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이제서야 알았다며 영국인 여자친구와 결혼 해야겠으니 이혼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늘이 노래진 김박사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자신이 오랫동안 출연했던 TV 프로그램도 자진 하차해 버린다. 가족을 위해 살았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버리자 예전에 사둔 땅에 집을 지어 전원생활을 통해서나마 자신을 위로하려고 김박사는 지금 마음 먹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김박사의 꿈은 주택업자의 떨어지는 인테리어 감각 탓에 물 건너 갈 지경에 이르게 됐다. 

한편 김박사의 환자들은 김박사를 만나기 위해 현재 이 곳에 와 있다. 이 모임의 주동자는 카페의 매니저인 주택업자 제일이다. 제일은 김박사가 머물 가평집이 주말 별장인줄만 알고 지었다가 은퇴 후 머물 집이라는 것을 알고 난감해 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달래야겠다는 속셈을 안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집에는 주인은 없고, 조경업자 경수만이 와서 김박사를 찾는다.

그 시각 김박사는 지갑을 집에다 두고 온, 작다면 아주 작은 실수 하나로 인해 다단계 업체에 끌려가 감금 아닌 감금 상태에 있는 중이다. 핸드폰과 자동차 키를 빼앗긴 김박사는 정수기 업체 웰니스의 훈련소 겸 사무실에서 사회 저명인사에서 하루 아침에 엉터리 사기꾼 취급을 당하며 그토록 무서워했던 사람들의 입초사를 몸소 겪고 있는 중이다. 지금 집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면서 김박사는 김박사대로 집은 집대로 동시에 온갖 난리를 치루고 있다.

김박사의 환자들은 조경업자인 경수의 의심을 받기 싫어 가족 행세를 하기로 한다. 제일은 김박사의 아버지로, 영화배우 가인은 김박사의 처로, 매니저 임만은 시동생으로, 미아는 딸로, 나석은 아들로, 라희는 임만과 부부 행세를 하기로 한다. 제일은 홀수공포증을, 가인은 출생전부터 갖게 된 트라우마로 대중목욕탕 공포증을, 임만은 다중인격 장애를, 미아는 섭식장애를, 나석은 세균에 대한 강박증을, 라희는 과대망상증과 불면증을 갖고 있다. 이들의 이상 야릇한 조합은 조경업자 경수의 가솔인, 어머니 모촌댁과 부인 그리고 희철이의 등장과 맞물리며 김박사의 새 집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데 중대한 공헌을 한다. 김박사가 집을 비운지 며칠만에 새 집은 헌집으로 둔갑해 버리고, 임시 가족은 온갖 이상한 상황을 만들며 콩가루 집안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경수네 식구에게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희안하게도 그 며칠 동안의 일들이 그들의 증상을 완화시킨다. 얼떨결에 맞닥뜨리게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벽을 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김박사 또한 다단계 업체의 횡포 속에서 자신이 말만 친구였지 환자들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열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이 난리법석 속에 김박사의 딸 하나가 오고 가짜 가족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하나를 결박한 후 구석에 둔다.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렸건만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김박사는 이런 상황들을 보고도 하나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김박사는 자신 또한 환자였음을 자각하며 이제부터 자신이 이들의 진짜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다짐한다.

요절복통에 요란하기 짝이 없는 책 한 편을 끝냈다. 아주 시원하고 왠지 모를 통쾌함마저 느껴진다. 그 별난 일들을 치뤄낸 가짜 가족 6인방과 김박사, 그리고
짜투리로 등장한 경수네까지, 말미에 잠깐 등장한 하나까지 포함해 이번 일은 자신들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거짓말이 난무하고 그 거짓말에 빌붙어 한푼도 못되는 이득을 챙기려는 갖은 작태들이 여기 저기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허위를 벗어버리고 자신을 그대로 끌어안게 되었다. 트라우마, 상처, 아픔이라는 말은 자신의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껴앉는데서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특히 아주 작아지고 누구보다 초라해진 김박사는 찌그러지고 우스꽝스런 자신을 보면서 진짜 의사로서의 소명을 짜릿하게 받아들인다.

마지막은 나를 통해 전달되는 김박사의 전언이다.

"좀전 사람들 앞에서 당신들의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말했지만 당신들이야말로 이미 오래 전부터 나를 친구로 삼아주었다오. 내가 당신들을 위로하고 치료했던 게 아니라 당신들이 나를 보듬어주고 껴안았다오. 그걸 미련한 나는 이제서야 알았구려. 비록 괴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지만 우리 이 모습이대로 한번 부딪쳐 봅시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구병모와의 만남

지난 여름, 구병모의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녀의 글을 읽고 단번에 팬이 되었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직조하는 그녀의 글 솜씨에 매료된 때문이다. 특히나 내 마음을 끌어당겼던 건 소재를 대하는 그녀의 접근 방식이었다. 그녀는 다루기 힘든 소재에 대해 둘러 말하거나 돌아가지 않았는데, 그 직접적이지만 직설적이지 않은 방식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녀 글의 또다른 특징은 도회적 정서에 있었다. 작중 인물들에게서 우리의 고유 정서적 특징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작품 전반의 분위기는 꽤 따스했다. 피를 나누지 않은 남인데도 가족 보다 나을 수 있음을 제시하는 그녀의 글 '위저드 베이커리'를 통해, 다음 세대의 사랑의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열기로 흐물흐물 녹아버린 질척한 초콜릿보다 냉한 곳에서 딱딱한 상태로 있는 초콜릿을, 즉 뜨거운 사랑보다 이성에 의해 의도적으로 식혀진 차가운 사랑을 제시하고 있었다. 쿨한 그녀의 글이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돼 삶의 남다른 양식을 추구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정으로 끈끈하게 뭉쳐진 관계보다 사람 사이의 여백을 존중해 주는 관계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글은 맑은 공기가 피부에 닿는듯 그렇게 신신선하게 느껴졌다.

'고의는 아니지만'은 이렇게 읽혔다

그랬기에 구병모의 근작 '고의는 아니지만' 에 대한 기대치는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에는 7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난해하진 않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들이 출격을 준비하는 비행기처럼 단단한 채비를 하고 대기중이었다.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담담하면서 기괴한 이야기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모든 이야기들이 편치 않은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에 의해 도배된 현실이 얼마나 힘들어 보이는지 차라리 우리가 발을 딯고 있는 이 자리가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마치 ……같은 이야기

구병모는 시인을 등장시켜 비유가 사라진 도시를 보여준다. 언어를 소재로 글을 이끌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기발함이 놀랍기만 하다. 도입부는 SF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의 흔적 조차 찾기 힘든 폐허의 도시는 왠지 삭막하고 메마른 느낌을 불러온다. 그녀는 비유가 사라진 도시를 통해 언어가 단순히 사전적 의미만 가지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준다. 언어란 우리의 생각과 느낌 정서의 총체로, 비유를 없앴을 때 우리의 정서도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그려주었다. 비유를 금지시킨 이 도시의 시장이 결국은 미무르라는 괴물로 변해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시인이 발견한다는 마지막 장면은, 수사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켜준다.

타자의 탄생

가장 흥미있었던 단편이었다. 어느날 한 사내가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구덩이와 사내 사이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다. 살기 위해선 사내를 둘러 싸고 있는 금속성 주물을 절단해야겠지만, 배 이하부터 왼팔까지 몸에 꼭 붙어 있는 주물을 제거하려면 사내도 다치게 된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 경위와 직전까지의 기억도 사내에겐 없다. 몇 년째 취직을 준비하던 사내는 아내와도 거리가 멀어져 있음을 이제서야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나 관공서, 방송국은 호기심 어린 몇 번의 관심을 보이다 말고, 그는 이제 사람들에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곰팡이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만다.

한 인간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과정을 구병모는 잔인하리만큼 자세하고도 찬찬히 보여준다. 그녀가 전하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는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어야 하는 사내가 측은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재수없이 걸린 사내에게만 해당되는 걸까? 구병모는 '구멍은 어디에나 있다'는 사내의 마지막 말을 통해 자신의 의중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사내의 말은 메아리가 될 뿐이다. 누구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는 유언 같은 경고마저도 허공으로 떠돌고 마는 불합리와 불확실한 우리 시대의 비극을 보여줄 뿐이다. 

고의는 아니지만

유치원 여교사의 이야기다. 그녀는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아이도 교육 현장에서 제외되서는 안된다는 교육관을 가지고 있다. 나름의 철칙으로 인해 녀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수고까지 아이들을 위해 감내한다. 그러나 그 수고스런 배려가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아이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그녀는 모른다. 어느날 아이들이 그녀에게 뚱한 소리로 반발을 하자 그동안 참고 참았던 분노가 한꺼번에 몰아치며 그녀는 해서는 안되는 말을 하고 만다. 그 때 저만치 건너편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그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즉시 깨닫고 후회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날 저녁 그녀는 퇴근 길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녀의 실언이 목숨을 앗아갈 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엎지러진 물인 것 만은 확실했다. 그녀의 죽음을 대하는 아이들의 반응이 은근하고 싸늘하다. 이 섬찟한 반응에 대한 답이 이 소설의 주제다.

조장기

사람에게서 나는 죽음의 냄새를 맡고 새떼가 달려들어 사람을 쪼아 먹는다는 이야기다. 히치코크의 영화에서나 볼 듯한 그림이 그려진다. 하늘을 까맣게 덮고 있는 새떼의 모습은 장관이 아닌 두려움을 떠올리게 한다. 새떼의 공격에서 벗어나려고 사람들은 별 강좌를 다 듣는다. 그런데 삶에 지친 여대생이 그 모습을 보며 죽은 자를 부러워한다는 이야기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힘든 세태를 구병모는 여대생의 입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누군가의 살점을 뜯어먹었을 새떼를 보고 '살점의 승천'이라며 부러워하는 여대생의 얼굴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절망의 냄새가 새떼를 부를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무엇이 어린 그녀를 그토록 벼랑으로 몰았을까? 삶의 힘겨움이 처연하게 드러나는 글이다.

어떤 자장가

다른 사람의 논문을 대필하며 사는 젊은 엄마의 이야기다. 그녀의 꿈은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하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남의 논문을 써주고 있지만 언젠가는 자신을 위한 논문을 쓰리라는 희망 하나로 그녀는 힘겨운 삶을 버텨나가고 있다. 어린 자식은 엄마의 사정은 아랑곳하지않고 오로지 놀아주기만 원한다. 게다가 밤에 잠을 안자는 아이 때문에 그녀는 요즘 기한 내에 논문을 마치지 못하고 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그녀는 상상 속에서 아이를 징벌한다. 세탁기에 넣고 빨거나 전자레인지에 넣고 굽거나 냉장고에 넣고는 가둬버린다. 그녀는 아이가 위태로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꺼내주지 않는다.  

삶이 얼마나 버거운지 엄마는 상상도 못할 상상을 한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어린 자식을 죽이는 상상 말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을 사는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양육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에게 가정과 일의 병행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생각케 한다. 그런데 구병모는 마지막에 아내와 어린 아이가 서로 껴안고 자는 모습을 남편이 보게 한다. 실제 벌어진 일이 아니어서 고맙지만 동시에 한숨이 쉬어지는 결말이다. 기쁨은 잠간이고 현실은 계속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희망을 말하는가, 아니면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계속될 삶의 고단함을 말하는가.

재봉틀 여인

감정을 제거해야만 살 수 있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극이다. 어린 소년은 자주 교사에게 구타를 당한다. 무지막지한 구타는 이미 사랑의 매가 아니었으며 어린 소년이 비행 소년이라는 근거는 글에서 찾을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소년은 시장통의 한 수선집에서 자신의 감정을 다 봉합해 버리고, 재봉질을 해준 아줌마의 자식이 된다.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된 소년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차 표현할 감정이 남아있지 않음을 알고 절망감에 빠진다. 청년인 소년은 결국 자신을 이렇게 만든 양어머니를 살해한다. 양어머니의 몸에는 온갖 바늘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감정이 고통을 더 깊게 만든다 생각했던 두 사람은 결국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더 비참한 생을 살았을 것이다. 구병모는 어린 소년이 감정의 출구를 봉쇄해야만 했던 이유를 자세히 알려 주었으면서도결과를 비극적으로 그려낸다. 감정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장치라는 삶의 희비를 그녀는 아프게 알려준다.

곤충도감

구병모만의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글이다. 이 글의 화자는 고등학생 소녀다. 소녀는 자신의 아빠의 아들, 그러니까 배다른 오빠에게 몇 년 전 강간을 당했다. 그 충격으로 아빠는 술에 절어 살다 길거리에서 동사하고 엄마는 사람들의 소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사가 버린다. 소녀의 엄마는 생계를 위해 어느 건물 일층에 자리를 얻어 식당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건물 다른 층에 오빠가 이사를 온다. 소녀는 알고 있다. 사실 그 때의 일은 강간이 아니었으며 서로 원해서 이뤄진 일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소녀의 오빠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여전히 말이 없으며 먹는 것도 거의 없이 죽은 듯이 살고 있다.

오빠의 몸에는 그 때의 일로 몸에 반생물-반기계가 주입돼 있다. 전자발찌로도 성범죄자의 성폭력을 제재할 수 없게되자 나라에서 성범죄자들의 몸에 반생물-반기계를 주입한 것이다다. 성적 흥분의 강도에 따라 반생물-반기계는 커지고 흥분이 극에 달했을 때 놈은 송아지만한 거대곤충이 되어 온 몸을 찢고 튀어나오게 된다. 소녀는 오빠를 증오하기도 했지만 이런 일이 생기길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오빠와 자신이 아직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오빠를 그 곤충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로 한다. 소녀는 아무도 없는 날 오빠를 유혹한다. 평소 감정의 변화를 일체 보이지 않던 오빠의 호흡이 달라진다. 오빠의 몸이 폭발하던 순간 몸을 찢고 나온 것은 놈의 날개가 아니라 천사의 날개 같다.

구병모는 사랑을 해체한 후 사랑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근친간의 경계와 나이의 경계, 생과 사의 경계가 그녀의 손 안에서 사라지고 있다. '사랑이란 무엇이며, 사랑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라는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질문을 이 글은 던지고 있다. 성범죄라는 도덕적으로 가장 비루한 삶의 자리에 있는 자와 강간을 당했던 어린 소녀를 통해서 말이다.

마침내 다 읽었다

역시 구병모는 능수능란했다. 머뭇거리거나 배회함 없이 이야기 속으로 돌진했고, 난데없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앞뒤 상황 설명도 하지 않은채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공간을 독자에게 주었다. 환상으로 도피하지 않고 환상을 현실의 자리로 끌고 왔다는 (문학평론가, 황광수) 말은 적합한 표현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과함이나 모자람 없이 이야기 속으로 이끌고가는 그녀에게서 폭우 속에서도 갑판에 꿋꿋이 서 있는 믿음직한 선장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전체적으로 구병모의 글은 날카롭고 날이 서 있었으며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메마르거나 건조하지 않은 건 그녀의 글 안에 있는 습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읽어 갈 수 있다. 또한 소름 돋을 만큼 구체적이고 강렬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이맛살이 찌푸려지지 않는 건 구병모가 그 속에서 냉정을 잃지 않은채 중심을 잘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오게 될 그녀의 글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비슷한 색깔의 글이 나올 것 같다. 그러나 채도의 차이는 확연히 있을 것 같다. 정밀하게 만들어진 물감에서 나오는 미세한 채도의 차이가 더 풍부한 질감을 부여하는 것처럼, 그녀의 글도 그럴 것 같다. 그래서 그녀의 글이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솔거의 죽음 한빛문고 11
조정래 지음, 이우범 그림 / 다림 / 200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관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

관심을 넘어 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다.

즉, 글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읽혀지느냐이다.

문체의 유려함을 본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글이 편안하지 못하고 덜커덩 거리는 작가는 내게 요주의 인물인 셈이다.

사소한 것을 넘기지 못하는 좋지 않은 나의 습관이다.

특히 작가가 대중의 지지를 받거나 평론가의 격찬을 받을 경우 더 유의하여 읽는다.

물 흐르듯이 흘러가지 못하는 작가의 글은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역시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나의 좋지 못한 습관이다.

책에 관심을 가지는 가진 사람이라면 거반 읽어 보았을 조정래의 책을 이제서야 잡게 되었다.

초반 기대가 커서인지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읽어 내려갈 수록 뚝심이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와 삶은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그의 삶도 그러했으리라.

이 책은 청소년용으로 약간의 손을 보아 나온 책이다.

말이나 생각이 우리와는 다른 세대이므로

책의 전체적인 느낌은 부담스럽지 않게 읽히는데 초점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삽화는 익살맞으나 가볍지 않고 글 속에 스며있는 맛을 결대로 느끼게 해준다.

불행하므로 고통스럽고

소외받으므로 설자리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작가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타낸다.

이태준의 소설이 불행한 자들에 대한 사랑을 연민 과 애절함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내었다면

조정래는 우리의 허위의식을 통해 드러낼 뿐만 아니라 덧붙여 실질적인 행동까지도 요구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이 두렵다고 어떤 평론가는 반복하여 말한다.

그는 참 많은 말을 햇다.

문장 속에서, 행간에서.

드러난 글을 통해 작가의 삶을 만나고 그의 생각을 만나고

게다가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됨은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