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반양장) 반올림 1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세상에 죽음보다 무거운 것은 없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합쳐도 죽음의 무게보다 더할 수 없으며, 어떤 부피도 죽음보다 클 수 없다. 죽음은 세상의 도량형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 유사 이래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던 이 인간의 숙명은 생과 사를 나누었고, 진정한 슬픔이 무엇인지를 상실감을 통해 시간을 두고 가르쳤다. 오로지 혼자서만 치뤄야 하는 절대적 고독의 순간은, 인간 뿐 아니라 생명있는 모든 것들을 태어나면서부터 두려움에 떨게 했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는 죽음을 정면으로 다룬 성장 소설이다. 이 책은 죽음의 발자국을 직감적으로 아는 노년이나,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조금씩 준비한 장년을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죽음과 멀어도 한참 멀어야 할 어린 친구들이 너무도 이른 나이에 피어 보지도 못하고 맞게 된 죽음이 애처로워 이경혜가 오로지 어린 친구들만을 위해 쓴 책이다.

" 돌아다 보니 주위에는 그렇게 어린 나이에 어이없이 사라져 간 소년들이 뜻밖에 많았습니다. 이미 사라져 간 그 소년들에게 유별나고, 극적이고, 고통스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어디에도 비극의 그림자가 스미지 못하는 그런 평화롭고 사소한 시간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 소년들이 이 글 속에 머물러 아기자기한 삶의 한 자락을 잠시나마 누리다 갈 수 있게 말입니다. "

그래서 이 책은 일찍 사라져간 어린 소년들을 위한 진혹곡이 된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무겁지 않으며 오히려 경쾌하다 싶을 만큼 산뜻하다. 그런 느낌이 나는 것은 비록 이 땅에 없을지라도 한때 생명력으로 충만했던 어린 소년들에게 안락을 선물해주고 싶은 작가의 숨은 배려일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재준이가 살아 생전 따뜻하고 살가웠던 것처럼 이 책 또한 그렇다. 재준이는 중학교에 다니는 남학생으로 또래보다 작은 키에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착한 친구다. 그런 재준이에게 처음으로 생긴 여자 친구가 유미다. 외톨이였던 둘은 금새 친해졌고 말 그대로 진짜 친구였기에 서로가 가장 편했다. 그런 재준이와 유미에게 짝사랑 상대가 생긴다. 둘은 서로 잘해보라며 격려도 하고 지원사격도 해보지만 둘다 보기 좋게 차이고 만다. 유미는 유미대로, 재준이는 재준이대로 이루지 못한 짝사랑에 가슴 아파하며 상처를 지우기 위해 춘천으로 놀러간다. 아픔을 씻기 위해 찾은 그 곳에서 유미는 재준이에게 일기장을 선물한다. 그 일기장에 재준이는 그 다음해 초부터 세상과 이별하기 삼일 전까지 일기를 쓴다. 일기장은 재준이가 사고로 세상을 뜬지 두 달이 지나서야 유미에게 전해진다. 재준이에 대한 추억은 이 책의 화자인 유미를 통해 그려지고 유미는 재준이의 일기를 보면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재준이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일기 속에는 더없이 평범하고 자잘한 일상과 어린 소년이 겪게되는 사춘기의 성장통이 고스란히 묘사돼 있다.

재준이는 자신이 짝사랑한 소희에 대한 감정을 일기 속에 솔직하게 드러냈다. 유미는 자신보다 소희가 차지한 자리가 크다는 사실에 약간의 배신감과 더불어 질투의 감정을 느낀다. 재준이는 소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오토바이를 배웠고 결국 오토바이를 타다가 변을 당했다. 유미는 일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소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변해 있음을 느낀다. 재준이가 사랑하던 사람이기에 자신도 미워할 수 없으며, 소희가 있었기에 짧은 생에도 불구하고 재준이가 사랑을 경험해 볼 수 있었음을 깨닫고는 오히려 고맙게 생각한다. 소희가 없었다면 재준이는 사랑도 못해보고 세상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일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제 유미는 재준이와 작별 인사를 한다.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삶에 무거운 사랑을 남기고 간 너를 잊지 못할 것이라며 고마웠다' 말하고는 잠을 청한다. 

 이 책에는 생과 사의 두 모습이 등을 맛댄 사람처럼 긴밀히 연결돼 그려져있다. 삶은 어리다고 봐주지 않았고 죽음 또한 어리다고 순서를 늦춰 주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직시했음에도 이경혜는 해맑았던 한 소년의 끊어져버린 삶을 결코 비극으로 채색하지 않았다. 더하여 상실을 슬픔안에 가두지 않음으로 그 의미를 성숙으로 가는 단계로까지 승화시켰고, 어린 친구들에게 삶과 죽음이 동일선상에 있음을 솔직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자신이 크게 의지했던 친구에게 자신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진 타인이 있음을 뒤늦게 알았음에도, 죽은 친구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유미의 모습은 왠만한 어른에게서도 찾기 힘든 모습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걱정하고 불안해하기만 했지 아이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지 않고 헤아리지 않았던 어른들에게 이경혜는 유미를 보여줌으로서 직접화법보다도 더 내재적이고 강한 공명을 불러 일으킨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어린 친구들의 눈높이에 맞춰 생동감있게 그려낸 이 책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학생들에게 그간 적잖은 위로를 주어왔다. 또한 언제든 일탈할 수 있고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정서적 불안정 속의 어린 친구들에게 죽음이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짝사랑하는 여자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목숨을 건 시도를 했고 결국 목숨까지 잃었지만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도전한 재준이를 아름다웠다고 기억하는 유미의 모습은 소년의 죽음이 결코 허망하지 않았음을 나직하게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재준이의 일기장 맨 앞에 쓰여진 말로 이 글의 마무리를 짓고자 한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