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만났던 위인들 ]
어릴 때 위인전을 자주 읽었다. 위인전을 읽다보면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그런데 위인들 중에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계셨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그분들을 살리고 싶었다. 그분들에게 자신을 모함한 사람을 알려드린 후 나라를 위해 오랜 시간 자신을 드릴 수 있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상상을 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친 후 허연 머리와 수염을 하고 마루에 앉아서 어린 아이들과 웃고 있는 모습을 머릿 속에 그려드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억울한 죽음을 위로해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있어도, 과거에 있었던 일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때 부터 내 상상력은 빠르게 사라졌다. 위인전의 의미 또한 어릴 때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의 하나로 퇴색돼 버렸ㄷ. 그 이후 위인들의 삶은 현재의 내 삶에 밟혀 흔적도 찾기 힘들게 되었다. 그렇게 내 기억 속 지층에서도 저 밑에 자리하게 되었을 때 '서찰을 전하는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만나게 한 아이]
동학혁명에 대한 말하지만 녹두장군 전봉준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실패한 혁명의 이야기는 태생상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돼 있지 않다. 게다가 뻔히 아는 이야기 속에 특별한 무엇이 있을거라는 기대감도 일지 않았다. 그런데 노란 색으로 산과 마을을 표현한 책의 표지가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하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가 동학혁명과 무슨 관련이 있는건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나도 이 아이와 함께 내 어릴 적 그 마음으로 돌아가 그 시대의 냄새를 맡아야 겠다고.
아이의 이름을 작가는 알려주지 않았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시대에 어린 아이의 이름이 뭐 그리 대수일까. 아이 또한 지금 천지간 의지할 데라곤 없는 처지가 돼버렸는데 말이다. 3년 전 세상을 뜬 어미도 마음에서 다 지우지 못했는데 홀로 남은 보부상 아비도 도방에서 죽고 말았다. 아이에게 남아 있는 건 돈 몇 냥과 아비가 노스님의 심부름으로 누군가에게 전하려던 서찰이 하나 있을 뿐이다. 글은 한자로 되어있고 모두 열 글자다. 아이는 그 서찰이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구한다는 것을 아비를 통해 들었기에 서찰의 내용을 알아야만 했다.
[13살의 아이, 역사의 현장으로 발을 깊숙이 디디다]
아버지에게는 그외에 어떤 말도 들은 바 없고 단지 전라도 땅을 향해 가고 있었다는 사실만 알 따름이다. 아이는 한자를 몇 자로 나눠 머리에 각인 시킨후 노정에서 돈을 주고 글자의 의미를 알아간다. 처음엔 글 두자에 두냥, 다음번엔 세자에 두냥, 그 후엔 세 자에 한 냥, 마지막 두자는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의미를 알아낸다. 세상에 거저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작가 한윤섭은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에 홀로 떨어진 아이에게 과하다 싶을 만큼 작가는 돈을 지불하게 한다. 돈을 지불하고 사람을 상대하면서 아이는 세상을 헤쳐나갈 지혜도 더불어 배운다. 그리하여 아이는 마침내 글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 의미는 '녹두리에서 경천이라 사람이 녹두장군을 팔아서 슬프다'라는 것이었다.
이제 아이는 아비의 뜻이자 자신의 바람이 된 서찰을 전할 수 있게 됐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아비의 말만을 떠올리며 떠났던 길의 목적지가 환하게 보이게 됐다. 아이는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도 마다하지 않으며 홀로 길을 간다. 그러던 중 위험을 피해 잠시 머물던 사찰에서 그렇게도 만나고 싶었던 녹두장군을 만나게 돼 스님 편에 서찰을 전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녹두장군이 관군에 잡혔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분명히 전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 아이는 압송되는 녹두장군을 길가에서 만나 울음 섞인 소리로 외친다. '왜 피노리에 왔냐고' 아이의 물음에 녹두장군은 '동지를 믿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며 아이를 위로한다. 아이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약이었던 자신의 소리를 녹두장군을 향해 들려준다. 녹두장군의 허리는 서서히 펴진다.
아이는 이제 서찰을 준 스님을 만나기 위해 북한산에 와 있다. 아이는 암자 위쪽에 있는 웅덩이에서 자신의 비춰진 얼굴을 보고 있다. 아버지와 같이 왔을 때는 봇짐장수의 얼굴이더니 이제 자신의 얼굴은 멋지게 변해 있다. 그 이후 아이의 소리에 있던 힘은 사라지고 아이는 녹두장군의 기상과 그 때 옆에서 사람들이 불러주었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가슴에 오래도록 세기게 된다.
[어린 아이를 통해 지난 역사를 위로하다]
어릴 때 녹두장군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던 사진을 교과서에서 보았다. 상투를 틀었지만 망건이 씌어져 있지 않은 머리는 어린 내게도 그가 양반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압송되어가는 사람의 기상이 대단했다. 그 사진이 찍힌지 며칠 지나지 않아 그가 효수되었다는 글을 연이어 읽었다. 전봉준 뿐 아니라 수 많은 사람이 당시 죽었다. 백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밥만 챙기려는 양반들과 그들의 하수인, 그리고 청군과 일본군의 손에 무참히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서러운 죽음을 작가 한윤섭은 보잘 것 없는 한 어린 아이의 마음을 통해 위로해 주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죽음이 허망하지 않았음을 기억하길 원했다.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 할지라도, 설사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정신은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피는 이 땅에 뿌려져 후에 다른 모습으로 열매 맺게 될 터였음을 사람들이 알게 되길 원했다. 그 서찰을 전하고서도 전봉준을 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지키고자 했던 동학의 정신은 읽혀졌다. 비록 졌지만 동학의 정신은 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동료도 믿지 못한채 동학의 의미를 살릴 수 없었다는 전봉준의 고백은 죽음이 꼭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이제는 나도 죽음의 의미를 달리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세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버리고 대의를 위해 살았다면 그것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말이다. 어린이를 위한 역사 동화 속에서 나는 어떤 백과사전보다도 더 큰 가치를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