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어드는 아이 트리혼 동화는 내 친구 52
플로렌스 패리 하이드 지음, 에드워드 고리 그림, 이주희 옮김 / 논장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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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참 특이한 신체기관이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많은 말을 한다. 입이 하루종일 떠들어도 전하지 못하는 말을 눈은 지긋이 응시하는 동작 하나로 끝내 버린다.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고 쓸데 없는 말들로 넘쳐나는 건 순전히 눈을 보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만 보고 말해도 세상의 소음과 겉치레는 줄어들 것 같다. 눈이 가지고 있는 불가시적 기능이다.

나 또한 눈을 보고 말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습관을 들이지 않았다. 눈을 보고 말하려면 의지를 동원해야 가능하다. 그런데 눈을 보고 말하면 희안한 일이 생긴다. 어린 내 딸의 경우는 표정부터 달라진다. 어린 딸과 내가 눈을 보고 말할 때, 달라진 아이의 얼굴엔 미소가 와있고 목소리는 낮아져 있으며 톤도 변화해 있다. 내 눈이 딸 아이의 눈에 맞닿는 순간 아이는 온전히 내 안으로 들어오며 나긋나긋해진 아이의 얼굴은 사랑으로 넘쳐난다. 과장 섞어 말하면 어떤 천사가 나타나 사랑의 지팡이를 살짝 휘두르는 것 같다.

눈을 보고 말하는 시간은 길지 않아도 된다. 눈을 보고 말하면 다른 건 할 수 없다. 오로지 보기만 하고 입을 열 뿐이다.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에게 모든 것이 되고 전부를 내어주는 그 시간은 아무런 투자도 필요치 않다. 오직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 시간은 마치 마법을 부린 듯 황홀하다. 그런데 정말 슬픈 건 그렇게 하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는데 있다. 뭐 그리 대단하고 엄청난 일을 하는지 사랑하는 자식에게조차도 나는 시간의 일부를 못내주고 있다. 마음이 바쁘면 마음을 나누기 힘들다. 이 바쁜 마음을 내려놓아야 나도 아이도 행복할 수 있겠다.

오랜만의 수작이라 할 만큼 공감이 가는 책을 읽었다. 구입한지 좀 됐는데 딸 아이에게 읽으라고 준 후 정작 엄마인 나는 읽지도 않았다. 표지 그림이 좀 딱딱하게 느껴져 괜히 샀나 하고 잠깐 후회했던 책이었다. 요즘은 동화책들이 잘 나와서 동화책만 읽어도 아이들이 잘 자라겠다 싶지만, 엄마가 함께 하지 않는 동화책은 이야기에 머물 뿐 추억이나 지혜로 전환되지 않는다. 그런 책이 되고 말 뻔 했다. 엄마인 내가 먼저 읽은 후 아이에게 읽게 해야 했다. 그런데 게으른 엄마인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만 고만한 내용일거라고 생각하고 무시했던 거다. 세상에 어떤 것도 무시하거나 무시당할 것은 없는데......교만했던 내 자신에게 노란 카드를 준다.  

'줄어드는 아이 트리혼'은 무관심한 부모에게서 자라나는 아이에게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트리혼의 키가 줄어든다. 늘 손이 닿던 선반에 손이 닿질 않고 옷이 커지기 시작한다. 놀란 아이는 엄마에게 말하지만 엄마는 아이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신만의 고민 에 빠져 딴 소리만 한다. 식탁에서도 엄마 아빠의 화제는 트리혼이 아니다. 아이는 자신의 변화를 진지하게 이야기하지만 부모는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한 번 더 말하자 그때서야 아이를 보고는 달라졌다는 것을 안다. 엄마는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터진다며 짜증스런 반응을 보인다. 부모의 반응에 아이는 괜히 미안해지고 몸이 더 움츠러진다. 부모는 아이가 있는데도 말을 조심하지 않는다. 부모는 아이의 상태에 대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만 염려하고 있다. 아이의 키는 더 작아진다. 다음날도 엄마와 트리혼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눈이 마주치질 않는다. 엄마가 보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자신이 싫어하는 행위를 하는 아이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아이가 귀찮은거다.

이제 트리혼의 키는 유치원생처럼 작아진다.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도, 학교 선생님도 아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아이를 보지 않고 아이의 작아진 키만 본 것이다. 아이가 아무리 설명해도 그 설명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선생님은 아이의 작아진 키를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인식한다. 줄어든 키로 모든 것이 불편해졌건만 선생님은 이를 측은하게 여기기는 커녕 특별 취급해 줄 수 없다는 규칙을 내세워 트리혼을 문제아 취급 한 후 교장실로 데려간다. 교장 선생님의 비서는 시간을 절약해야 한다며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은채 종이를 건낸다. 아이는 자신의 상황을 힘을 다해 쓴다. 그런데 교장선생님 또한 다를 바 없다. 교장 선생님은 아이의 줄어든 키를 그간의 경험을 동원해 해결해 주려한다. 아이의 키는 더 작아졌다.

집에 돌아와서도 트리혼은 배려를 받지 못한다. 엄마는 좋은 엄마가 되려고 애썼다며 아이의 상태보다 자신이 욕먹을 일을 염려해 눈물을 흘리고 있고, 아빠는 병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 원한다. 이제 아이는 너무도 작아졌다. 간신히 뛰어내린 침대 밑에는 예전에 경품으로 받은 선물이 있다. 상자안에는 '키가 쑥쑥 크는 키다리 놀이'라는 놀이기구가 들어있다. 혼자서 놀고 있는 트리혼의 키가 쑥쑥 커진다. 이제 아이의 키는 원래대로 됐고 식탁에 가서 아이는 엄마에게 키가 예전대로 됐다고 전한다. 트리혼과 엄마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친다. 저녁이 되었다. 아이는 텔레비전을 보다 자신의 온 몸이 연두색으로 변한 걸 깨닫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모를거라고 생각하며 말하지 않겠다 다짐한다. 마침 텔레비전 소리를 좀 줄이라고 온 엄마는 배를 깔고 누워 있는 아이의 뒤통수를 보며 '좀 있다 손님이 오니 머리 좀 빗으라' 말하고는 부엌으로 돌아간다.

어린아이가 처한 소통 부재의 현실을 작가는 트리혼이라는 아이를 통해 실제 공간 속에서 자세히 보여준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아이는 이해 받지 못한다. 아이의 상황은 문제적 상황으로만 인식되었고, 아이는 키가 줄어들어 힘든 아이가 아니라 문제거리를 가지고 온 문제아로 취급된다. 아이는 진정한 배려를 어디서도 받지 못하며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한다. 도움을 주려는 어른들은 아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상황만 쳐다보았고, 진짜로 중요한 것은 간과한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와 관심이었지 줄어든 키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 상황이 해결됐음에도 아이는 또 다시 문제거리를 만나게 된다.

트레혼의 상황은 건조한 느낌의 그림과 무표정하거나 우울한 시선 처리, 메마른 대화로 잘 드러났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듯한 아이의 집은, 사랑보다는 부모로서의 의무나 책임에 의해 양육되는 듯한 아이의 현실을 더 극명히 그려내는 장치가 되고, 마주치지 않는 시선들은 양육의 책임자들과 함께 있어도 진실한 양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의 상황을 더 극적으로 보여준다. 부모가 아이의 눈을 한번만이라도 제대로 보았다면 아이의 무표정한 얼굴은 달라져 있을 것 같다. 아이는 자신을 닫아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해받지 못했을 때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했던 아이의 표정은 아이가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아 왔던 것을 암시한다.

무표정한 트리혼의 표정에서 내 딸의 모습은 없는지, 나는 지금 조심스레 살펴본다. 엄마의 모습에서 내 모습은 없는지, 점검해본다. 때때로 어른이란 이유로 어린 딸에게 무례할 때가 있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이를 규제할 때도 있었다. 세상에서 천사란 말이 어울리는 유일한 대상이 아이들인데, 그 아이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이제부터는 입으로 사랑을 말하지 않겠다. 하던 일을 내려놓고 눈으로 말하려 노력하겠다. 너를 사랑한다 소리치지 않고 눈으로 조용히 바라보겠다. 그래서 사랑으로 너를 뛰놀게 하겠다. 내 딸의 얼굴에서 트리혼의 흔적이 사라졌을 때 트리혼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도 내 얼굴에서 사라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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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 시가 있는 아침 1
이문재 엮음 / 이레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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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는 언젠가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그날이 언제인지만 남았을 뿐이었다. 이문재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일종의 부채의식이었다. 어느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렇게 느껴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건만 내 마음이 그랬다. 그 마음은 기형도로부터 발원했다. 기형도가 그의 책에서 '문재'라고 불렀던 이문재는 그래서 꼭 만나고픈 사람이었다. 나는 이문재에게 설명할 수 없는 친근함을 느꼈다.  

그날이 올 줄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의 시집인 줄 알고 덜컥 집었더니 시선집이었다. 2006년 봄부터 여름까지, 그에 의해 중앙일보에 실렸던 시인들의 시를 모아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은 거란다. 시와 이문재의 느낌이 함께 하는 것일 테다. 아직은 그의 글을 온전히 읽을 때가 아닌가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그의 글을 접하게 되니 한결 낫다. 시인들은 각기 다른 소리를, 이문재는 그 시와 연관된 자신의 소리를 낼 것이다. 그에게서 나오는 소리는 어떨까. '큰 소리일까, 아니면 나지막할까, 시인이니 담백하려나' 나는 별 상상을 다한다. 오랜 기다림이 주는 옅은 흥분이다.

시는 몇 줄 안되는 글에도 큰 공간을 담을 수 있다. 작은 종이 한 장에 넓은 세상이 들어가 안긴다. 그 속에서 노니는 기쁨은 여타 유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몇 줄의 시에 붙일 수 있는 해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배보다 배꼽이 커도 이상하지 않은 경우가 여기에 있다. 이제 그의 글과 만날 차례다. 마음의 준비를 해본다. 자신의 시 한 편을 포함 총 56편의 시가 이 책에 들어있다. 그 안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시인들이 수두룩하다. 시를 이해하기 한결 쉬울 것 같다. 낯도 익어야 대화가 가능하며 시도 자주 봐야만 무슨 말인지 헤아려 볼 수 있다.

스무 자도 채 안되는 말로 시를 완성한 고은의 '그 꽃'으로 이문재는 시작했다.

내려갈 때

몇 마디의 말로 이렇게 아름다운 시 한편이 탄생됐다. 설명이 필요없으리만큼 선명하다.
'시란 이런 거야' 라고 고은 선생이 설명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글 안에 함의된 뜻은 결코 작지 않다.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문재의 독후감이 잘 나타난 시는 이면우의 '빵집'과 윤제림의 '소쩍새'이다.   

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 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쓰여진 걸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하는 아이가 함께 있는 걸 알았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못 만나 봤지만, 삐뚤빼뚤하지만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아이를 떠올리며

" 빵집을 그저 제과점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저 아이의 호소가 새로운 판촉 전략으로 보일 것이다. 집에서 '집'을 보는 사람은 소비자가 아니다. 시인이다. 시인은 광고를 즉시 시로 번역한다. 소비자가 아니라 이웃들, 혈연 같은 이웃들에게 말을 거는 저 아이 역시 시인이다. 아직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귀가길의 중년이 세상에서 가장 순순한 시를 읽으며 울고 있다."

남이 노래할 땐

잠자코 들어주는 거라.

끝날 때까지.

소쩍......쩍

쩍......소ㅎ쩍.....

ㅎ쩍

......훌쩍.....

누군가 울 땐


가만있는 거라

그칠 때까지.

" 소쩍새는 울 때, 소와 쩍 사이를 길게 늘여놓는다. 소와 쩍 사이, 그 긴 침묵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소와 쩍보다 그 사이가 더 아팠다. 잠이 다 달아났다. 두세 음절로 끊어지는 자연의 소리나 기계음은 자주 의성어로 바뀐다. 뻐꾸기 소리나 초침 째깍거리는 소리는 매번 다르게 들린다. 뻐꾹뻐꾹이 바꿔바꿔로, 째깍째깍이 아퍼아퍼로 들릴 때가 있다. 소쩍이 훌쩍으로 들린다면, 그대는 슬픈 것이다. 그럴 땐 가만히 있어야 한다. 슬픔이 잘 마를 때까지 그 곁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문재의 글에는 그의 나이가 배어 있었다. 그를 생각했을 때 떠올랐던 이미지 대로 글도 비슷했다. 투박한 듯 진솔한 글에는 묵묵히 한 길을 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담겨 있었다. 시로 삶을 쓰고 생을 읽어내는 그에게 시는 인생을 해석하는 독본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가난한 이 시대에 좋은 시를 짓는 것은 튼튼한 아파트를 짓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좀 있으면 찬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기승을 부릴 터다. 더 춥기 전 내 마음에 따뜻한 난로를 놔야겠다. 나는 이 책에 실린 시로 난로의 장작을 삼을 요량이다. 내 가슴엔 시어가 활활 타고 그 시어로 다가올 겨울을 너끈히 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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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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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십 대는 시의 시대였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시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이해도 못하는 시를 읽었다. 한 시인의 시집이 마음에 들면 그 시인의 다른 시집을 샀다. 시를 읽으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싶어 열심히 읽었다. 시를 읽으면 없던 감성도 생길 것 같았고, 내 무지도 가려질 것 같았다. 당시 나는 글로 밥벌이를 하고 있었고 주위에는 쟁쟁한 글쟁이들이 많았다. 글로 밥을 먹는데 글이 안따라주니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 글이 금새 달라지지도 않았다. 금방 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고. 나는 여전히 지지리도 글을 못 썼고 누구에게도 내 글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누가 내 글이라도 볼라치면 팔꿈치로 글을 가렸다. 부끄러워서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잘 쓰건 못 쓰건 밤을 새워 쓴 글이기에 쓰고 나면 한 편은 꼭 기념으로 간직했다.

군 생활을 혹독하게 한 남자들이 제대 후 그 쪽으로는 오줌도 안누겠다는 말을 한다고 들었다. 내 심정도 그랬다. 예전 일터 쪽으로는 가고 싶지도 않았다. 설사 간다해도 멀리 둘러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배울 점은 많았지만 그 곳은 내가 버틸 수 있는 데가 아니었다. 엄마가 그만두라는 말만 했으면 나는 예전에 관두었을 것이다. 요만큼도 미련이 없었다. 천성적으로 느긋하지 못하고 안달복달에 노심초사형인 나는 그 곳에서의 스트레스로 알레르기에 걸려 꽤 오랜 시간 고생을 했다. 나는 사실 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쪽으로 관심도 가져 본 적 없었고 그 쪽 일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졸업 후 그런 쪽으로만 길이 열렸다. 그래서 꿈도 꿔 본 적이 없는 글을 쓰게 됐다. 얼마나 죽을 맛이었는지는 말로 다 못한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보니 글 외에 딱히 잘하는 게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게 글 밖에 없었고 내놓을 만한 경력도 그 때의 경험 밖에 없었다. 참 아이러니하다.

그 직장을 관두고는 시와도 안녕을 고했다. 굳이 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아무래도 시는 편하지를않았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말을 읽는다는게 쉽지 않거니와 은유의 난무와도 친해지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어쩌다 한 두편씩 시를 접하면 반가운 마음이 들긴 했다. 그래서 전처럼은 아니지만 이후 조금씩 시를 읽었다. 한 때 불었던 시선집의 열풍 덕에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를 필두로 김용택과 안도현의 시선집을 읽으며 시의 맛을 알게 됐다. 시인들의 삶과 이면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시에 대해 관심이 가게 됐다. 특히 서정권의 시를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또한 식민지 하의 아픔을 그린 이용악의 시는 가슴을 저릿하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그러다 문태준의 가재미를 만나게 되었다. 문태준은 2005년 가재미로 각종 상을 휩쓸다시피한 시인이었다는데 나는 올해서야 알게 됐다. 남들 다 아는 걸 나만 모르는 느낌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시집을 샀다. 유명하다니 가재미를 제일 먼저 펴기는 했지만 나머지 시까지 읽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다 기차 안에서 시집을 읽게 됐다. 참 좋았다. 일반인이 시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건 대개 좋다 싫다 정도인데 이 시집은 싫다고 말 할만한 시가 어디에도 없었다. 한편 한편이 좋았다. 향토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문태준의 시는 감각적으로도 탁월했고 감성도 깊었다. 언어를 중계하고 생각을 분절하는 문태준의 시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다. 언어들의 쫄깃쫄깃한 느낌과 넓은 감정의 스펙트럼, 게다가 그의 생각 또한 전방위적이었다. 와, 이런 사람도 있었다.

나는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사물과 대상을 주의 깊게 본 후 조심스레 해체하여 다시 구성하는 그의 시에는 여성 못지 않은 감수성과 섬세함이 들어있었다. 시를 읽는 동안 내 머리는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위 아래로 움직여졌다. '그래, 그렇게 표현했구나. 멋지다.' 이 말 밖에 달리 나올 말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시어는 신선하고 청량했으며 묵직하기도 했다. 그의 시를 읽노라면 그림이 그려졌다. 분산됨 없이 나른하고 적막한 상황 속에서 그가 그려내는 것은 고요함이었다. 수직적이고 복합적인 세상에서 수평적이고 평면적인 글로 시적인 힘을 모으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 지난한 작업을 문태준은 명쾌하게 수행했다.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 '수련'

내가 눈 속으로 아주 다 들어갈 때까지 '나는 돌아가 惡童처럼'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 갈 곳이 멀리 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            '바깥'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극빈'

나도 오늘은 아주 식물적으로 독방이 그립다            '극빈2'

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다             '자루'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묽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하였다.              '그맘때에는' 

'가재미'에 실린 67편의 시는 그의 시 세계가 지향하는 바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맛깔스런 시어들로 보는 내내 입에 침이 고였다. 이 말들을 반죽하고 치는 동안 그는 더 말랑말랑해지고 더 강해졌으며 자신으로 들어갔고 타인 속을 유영했다. 홀로된 자의 아픔은 문태준의 아픔이 되어 오롯이 피어났고, 자루의 슬픈 무게는 그가 함께 지는 생의 무게로 전환돼 숨을 나누었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자유를 줌으로 그 또한 거칠 것이 없는 자유인이 됐고, 가슴 속에 슬픈 샘 하나를 간직하면서 그의 시는 우물이 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 있지만 언젠가 한곳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쓸쓸한 운명을 현재 살고 있으며, 자신 안에도 때로는 새 것을 묵은 것으로 만드는 부패가 이미 진행되고 있음도 보여 주고 있다. 더 이상 그가 보여줄 것이 있을까?   

문태준에 대한 기대는 시를 통해 조그만 도움이라도 얻고자 했던 내 이십대와 맞물려 있다. 나는 그처럼 생각할 수도 없고, 그와 같은 언어의 직조는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에 있다. 그러므로 내 바람을 다 담아 그의 어깨에 올려 놓을 작정이다. 그런 후 주의깊게 그를 응시할 예정이다. 내 눈에는 그를 향한 기대와 나 자신을 향한 기대가 분명히 묻어 있을 터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내적 자아를 확대하여 도저하게 낮아지며 더 깊고 충만한 곳으로 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의 오솔길을 저 멀리서 지켜 볼 보잘 것 없는 친구를 위해서도, 그리고 그 자신을 위해서도. 나아가 그의 시를 기다리는 많은 독자들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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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 이태석 신부 이야기
우광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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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사랑은 참으로 감각적이고 세련됐다. 예전 같으면 부모에게도 낯 간지러워 못했던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요즘은 생전 처음 본 사람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 사랑이란 말은 이제 흔한 말이다. 사랑의 남발이란 생각이 들만큼 세상은 사랑 얘기로 넘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시대의 사랑이 가장 작고 초라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도처에서 사랑을 외치지만 사랑의 원형을 보기는 더 어려워졌고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멀리와 버렸음을 느끼고 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타적인데 우리는 태생적으로 이기적이며, 이 시대의 정신이 희생을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렇게 멀리 있다.

그런 이 시대에 자신을 기꺼이 던져 많은 사람에게 깊은 사랑을 남긴 후 홀연히 떠난 사람이 있다. '울지마, 톤즈'로 유명한 故 이태석 신부가 바로 그이다. 이 신부는 작년 1월 마흔 여덟의 나이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 한 암환자 시설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작년에 TV 화면에서 보았다. 당시 그가 부른 노래는 '열애'라는 곡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신께 드린 후 그 삶을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열정적으로 감당한 신부였다. 그런데 그 결과가 말기 암으로 나타났다. 남을 돌본 것처럼 자신을 돌봤다면 그런 병에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노래는 절절하지 않았음에도 가슴 저 밑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것은 신이었을까? 아니면 아프리카에 두고 온 자식같은 아이들이었을까? 아니 아마 둘 다 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삶을 보고 들으며 통곡과 같은 울음을 울었다.

그런 그에 대한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는 소설가 최인호의 주도하에 카톨릭 언론사에 몸 담고 있는 우광호에 의해 쓰여졌다. 알려진 이야기도 있고 이 책에서 처음 밝혀지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한결 같이 전하는 것은, 인간 이태석이다. 이 책의 미덕은 한 인간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지 않는데 있다. 미화가 주는 거부감이 이 책 속엔 없다. 우리를 전기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런 기름기를 우광호는 걷워냈다. 그래서 이 책은 한 인간의 생을 다루고 있지만 묵상집이나 에세이집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책에 실린 사진 작가 양현모의 사진은 인간과 자연이 따로 이면서 하나임을 보여주고 있다. 글도, 사진도 지금은 세상에 없는 이 신부의 삶을 그려내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름답다'이다.

'울지마 톤즈'의 제작진은 서두에서 그 프로그램의 목적이 한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함에 있다고 밝혔다.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니. 한 인간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세상은 그에게 바쳤다. 종교인이 욕을 먹는 이 시대에 그가 뿌리고 간 사랑의 씨앗은 세상이 종교에 받은 상처를 조금씩 씻어내고 있었다. 세상이 바랐던 것을 알면서도 못한 우리의, 그리고 나의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진다.

누군들 자신이 귀하지 않으며 누군들 자신의 생이 소중하지 않겠는가. 그 생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버리고 버린 후 신의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채운 이 신부의 삶은 고통의 한 가운데서 신음하던 아프리카의 영혼들에게 커다란 쉼을 주었다. 이 신부는 특히 누구보다 힘든 자리에 있던 한센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위로했다. 인간으로 먹지 못한 슬픔도 크지만, 버림받고 멸시당한 아픔이 그보다 못하다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랑도 표피적이고 찰나적으로 변해 버린 이 시대에 그가 남기고 간 선물은 아직도 변함없이 유효한 사랑의 위대한 가치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가 사랑으로 댄 청진기에 수단인들의 마음이 녹았을 것이며, 그가 만져준 손 한 번에 한센인의 뻥 뚫린 마음이 메워졌을 것이다. 그처럼 우리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한 사랑을 지키는 작은 노력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마음을 기억하고 그의 뜻을 잊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사랑을 펼칠 기회는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작아져 버린 우리의 사랑이 그로 인해 조금이라도 커질 수 있다면 좋은 사람을 일찍 데려가신 신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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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비평을 업으로 하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일반인이 저자보다 나은 리뷰를 올리긴 힘들다. 그렇긴 해도 읽은 책에 대해 어떤 말을 덧붙이는 것이 사족이라는 느낌을 주는 책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이 책은 저자의 의도를 완벽에 가까울 만큼 독자에게 전달한다. 책을 읽으면 경악이 아닌 비탄이 절로 나온다. 인간이 과연 존엄한 존재이긴 한건지 의문이 생긴다. 그 의문에 대해 저자는 '대형 슈퍼마켓에 진열된 수많은 애완용 식품과 먹지 못해 기진해 있는 앙상한 어린아이'의 대비를 통해 도리어 독자에게 반문한다.

이 책은 장 지글러가 의식있는 독자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다. 외양은 어린 아들의 물음에 전문가인 아버지가 답변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이런 부담없는 형식은 사안의 심각성을 경감해준다. 너무 무거우면 독자들은 뒷걸음질 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읽혀져야 하기에 끝까지 가볍게 가야한다. 작가의 서술적 지혜가 돋보인다.

우석훈은 해제에서 이 책에 대한 감탄을 쏟아낸다. 첫째는 행동하는 지성의 전형을 보여준 장 지글러의 활동가로서의 면모이며, 둘째는 전문가로서 문제를 분류해내고 해석함과 동시에 전체적 흐름을 다시 정리한 점에 관해서다. 기아 문제에 대한 고급 정보와 전문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가치를 지니지만,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적 약자인 아이들의 죽음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장 지글러의 사회적 책임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장 지글러가 최소한의 기본권도 누리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의 무덤에 바치는 조사이자 세상을 향해 전하는 탄원서이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단순한 집계만으로도 어떤 스토리의 영화보다 더한 충격을 준다. 2005년 기준으로 10살 미만의 아동이 5초에 한명 씩 굶어 죽고 있으며, 비타민 A 부족으로 실명하는 사람은 3분에 한명 꼴이고,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 실조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람이 굶어 죽는 참상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력으로는 해결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생사가 별 관심도 없는 타인의 결정에 달렸다는 점은 비통함을 느끼게 한다. 그것도 세상살이에 지쳐 팍팍한 마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말이다.

장 지글러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우리의 통념을 뛰어넘는다. 굶는 사람들이 게을러서도 
아니며 토지가 비옥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곡물이 없어서도 아니란다. 아프리카가 아닌, 세계 최대의 곡물 수출국 브라질에서조차 영양실조가 만연하고 이로 인해 해마다 많은 사람이 희생된다는 말을 믿을 수 있는가? 더 놀라운 건 현재보다 두 배나 많은 인구도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지구상에는 식량이 넉넉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기아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으며 굶주림의 방식이 더 비극적인 작금의 현상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장 지글러는 서구 사회에 널리 퍼진 자연도태설이 얼마나 황당한 신화인가를 먼저 밝혀준다. 부자와 권력자들을 지탱하는 논리가 된 자연도태설은 기아 문제의 외면과 무관심에 일조한 이론이란다. 그는 자연도태설이 사이비 이론임을 분명하게 알리며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 이론을 사용하는 우를 범치 말아달라 부탁한다.  

 특히 그가 마음 아파 하는 부분은 생명을 선별해야 되는 상황이다. 난민 캠프에 있는 간호사의 선택에 따라 생존 여부가 결정되는 상황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무자비한 작업이긴하다. 그러나  선택받지 못한 자식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전신을 떨며 울었던 순간을 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결코 잊을 수 없을 기억이라 꼽았다. 하지만 이런 기막힌 처지임에도 제 3세계의 많은 정부들이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외부에 알리지 않거나, 부족간의 알력과 욕심으로 긴급구호를 거절해 수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드는 사태가 비일비재하단다. 참으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

특히 소는 배를 채우고 인간은 굶어죽어야 하는 상황은 설명도 못할 비극이다. 식량이 남아돌아도 생산자들의 최저가격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로 폐기처분할지언정 굶어죽는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 경제 논리는 각국의 경제관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기아를 무기 삼는 행태다. 국가적 폭력이 자행되던 나라에서, 배고픔을 무기 삼아 통제하던 수단인 기아가 이제는 국가 테러의 도구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범지구적 환경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으며 사막화와 삼림파괴로 인한 환경 난민들도 급속히 늘어나는 실정이다. 게다가 농촌 사회의 종언과 지구 규모의 도시화로 인해 도시 빈민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세계화와 더불어 신자유주의는 어느새 우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모든 것을 자본의 논리로 재단하는 시대적 정황속에 기아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 못내 비감스럽다. 지금보다 더 심각하게 진행될지도 모르며 어쩌면 영속화될 확률마저 높을 것 같다. 과연 해결책이 있을까?

장 지글러는 자연도태설이 사이비 이론이라 자신있게 말했던 것처럼 배고픔의 숙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언한다. 전문가의 판단이니 신뢰할만 하겠다. 그러나 전제 조건이 붙는다. 연대감과 아울러 국제 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진짜 의지가 있어야 한단다. 이 아이러니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국제 공동체의 지원은 결국 신자유주의를 주창하는 나라의 국고에서 나오고, 그들은 기아 문제의 해결을 제일 원하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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