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 시가 있는 아침 1
이문재 엮음 / 이레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이문재는 언젠가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그날이 언제인지만 남았을 뿐이었다. 이문재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일종의 부채의식이었다. 어느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렇게 느껴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건만 내 마음이 그랬다. 그 마음은 기형도로부터 발원했다. 기형도가 그의 책에서 '문재'라고 불렀던 이문재는 그래서 꼭 만나고픈 사람이었다. 나는 이문재에게 설명할 수 없는 친근함을 느꼈다.  

그날이 올 줄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의 시집인 줄 알고 덜컥 집었더니 시선집이었다. 2006년 봄부터 여름까지, 그에 의해 중앙일보에 실렸던 시인들의 시를 모아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은 거란다. 시와 이문재의 느낌이 함께 하는 것일 테다. 아직은 그의 글을 온전히 읽을 때가 아닌가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그의 글을 접하게 되니 한결 낫다. 시인들은 각기 다른 소리를, 이문재는 그 시와 연관된 자신의 소리를 낼 것이다. 그에게서 나오는 소리는 어떨까. '큰 소리일까, 아니면 나지막할까, 시인이니 담백하려나' 나는 별 상상을 다한다. 오랜 기다림이 주는 옅은 흥분이다.

시는 몇 줄 안되는 글에도 큰 공간을 담을 수 있다. 작은 종이 한 장에 넓은 세상이 들어가 안긴다. 그 속에서 노니는 기쁨은 여타 유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몇 줄의 시에 붙일 수 있는 해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배보다 배꼽이 커도 이상하지 않은 경우가 여기에 있다. 이제 그의 글과 만날 차례다. 마음의 준비를 해본다. 자신의 시 한 편을 포함 총 56편의 시가 이 책에 들어있다. 그 안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시인들이 수두룩하다. 시를 이해하기 한결 쉬울 것 같다. 낯도 익어야 대화가 가능하며 시도 자주 봐야만 무슨 말인지 헤아려 볼 수 있다.

스무 자도 채 안되는 말로 시를 완성한 고은의 '그 꽃'으로 이문재는 시작했다.

내려갈 때

몇 마디의 말로 이렇게 아름다운 시 한편이 탄생됐다. 설명이 필요없으리만큼 선명하다.
'시란 이런 거야' 라고 고은 선생이 설명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글 안에 함의된 뜻은 결코 작지 않다.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문재의 독후감이 잘 나타난 시는 이면우의 '빵집'과 윤제림의 '소쩍새'이다.   

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 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쓰여진 걸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하는 아이가 함께 있는 걸 알았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못 만나 봤지만, 삐뚤빼뚤하지만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아이를 떠올리며

" 빵집을 그저 제과점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저 아이의 호소가 새로운 판촉 전략으로 보일 것이다. 집에서 '집'을 보는 사람은 소비자가 아니다. 시인이다. 시인은 광고를 즉시 시로 번역한다. 소비자가 아니라 이웃들, 혈연 같은 이웃들에게 말을 거는 저 아이 역시 시인이다. 아직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귀가길의 중년이 세상에서 가장 순순한 시를 읽으며 울고 있다."

남이 노래할 땐

잠자코 들어주는 거라.

끝날 때까지.

소쩍......쩍

쩍......소ㅎ쩍.....

ㅎ쩍

......훌쩍.....

누군가 울 땐


가만있는 거라

그칠 때까지.

" 소쩍새는 울 때, 소와 쩍 사이를 길게 늘여놓는다. 소와 쩍 사이, 그 긴 침묵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소와 쩍보다 그 사이가 더 아팠다. 잠이 다 달아났다. 두세 음절로 끊어지는 자연의 소리나 기계음은 자주 의성어로 바뀐다. 뻐꾸기 소리나 초침 째깍거리는 소리는 매번 다르게 들린다. 뻐꾹뻐꾹이 바꿔바꿔로, 째깍째깍이 아퍼아퍼로 들릴 때가 있다. 소쩍이 훌쩍으로 들린다면, 그대는 슬픈 것이다. 그럴 땐 가만히 있어야 한다. 슬픔이 잘 마를 때까지 그 곁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문재의 글에는 그의 나이가 배어 있었다. 그를 생각했을 때 떠올랐던 이미지 대로 글도 비슷했다. 투박한 듯 진솔한 글에는 묵묵히 한 길을 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담겨 있었다. 시로 삶을 쓰고 생을 읽어내는 그에게 시는 인생을 해석하는 독본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가난한 이 시대에 좋은 시를 짓는 것은 튼튼한 아파트를 짓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좀 있으면 찬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기승을 부릴 터다. 더 춥기 전 내 마음에 따뜻한 난로를 놔야겠다. 나는 이 책에 실린 시로 난로의 장작을 삼을 요량이다. 내 가슴엔 시어가 활활 타고 그 시어로 다가올 겨울을 너끈히 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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