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가방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가와카미 히로미의 책을 읽었다.
그녀의 글은 담백했다.
그러나 담백하다는 말만으로는 느낌이 다 전달되지 않는다.
글에서 느껴지는 우아함은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

표현을 달리 해야겠다.
그녀의 글은 담아했다고.
그 느낌은 수사 때문은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을 대하는 그녀의 접근 방식이 달라서였다.

'선생님의 책가방'
이번이 세번째다.
소소한 일상과 자잘한 일들이 다른 나라, 다른 정서의 옷을 입고 내 감성과 맞닿아있다.
그것이 이유였달까......

이처럼 잔잔한 글은 오랜만이다.
참으로 신선하다.

정돈된 감정들이 불러일으키는 산뜻함은 여운이 길다.

'선생님의 가방'은 2001년도 다니자키 준이치로 수상작이다.

30대 후반의 미혼 여성과 30년 정도의 나이 차가 나는 고등학교 때의 국어 선생님이 조그만
주점에서 조우하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선생님은 부인과 사별해 혼자 살고 있고 그녀 또한 조그만 직장을 다니며 집 근처에
따로 방을 얻어 혼자 산다.

둘의 만남은 무척이나 싱겁다.
선생님은 한결같이 정중하며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그에 걸맞는 옷차림을 하고 있다.
둘은 오며가며 만날 뿐 약속을 하고 만나진 않는다.
만나도 별 말은 없다.
때론 옆에서 때론 바로 앞에서 함께 시간을 가질 뿐이다.

이 만남은 세월 속에 서로를 향한 기다림으로 발전하게 되고 마침내 공식적인 데이트를
갖게 된다.
둘은 손을 맞잡은 채 일정한 보폭으로 그들만이 만들수 있는 시간을 멋있게 직조한다.

그들의 특별한 사랑은 선생님이 살아계시는 5년 동안 계속된다.
함께 있을 필요는 없지만 함께 있는 것이 온당한 듯한,
마치 책과 띠지의 관계같은 자연스러운 밀착이 단색톤으로 표현된다.

무척이나 담담한 사랑이다.
어떤 수식이나 정교한 장치도 없이 오로지 여백이 주는 무미한 맛이 이 책의 으뜸이다.

'객관적 거리 두기'나 '한결 같은 낯설음'이 끈끈한 정보다 나을 때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듯 하다.

어디에도 속해 있는 것 같지 않은 시간의 아름다움이 작가의 눈을 통해 섬세하게 복원된다.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 한다는 건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자연스레 수행하기 때문이다.
행함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촌스러움이 이 책에는 없다.
정서를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가 이렇게 다를 수 있나 조금 놀라게 된다.

절제된 감정의 글은 마치 생수 같다.
속 깊이 전달되는 무미의 맛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 하다.
그 맛을 느끼고 싶어 세번이나 읽은 건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은 언제나 차분하다. 감정의 거품은 제거되고 찌꺼기는 가라앉은 듯 그의 글은 일정한 정조를 유지한다. 살육 현장의 피비린내도 느껴지지 않고 타의에 의한 죽음도 일상의 한 부분인듯 표현해 놓았다. 피가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그의 글에선 배제되어있다. 잔혹함을 미끼로 말초적 신경을 건드리는 부박함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그의 글은 함부로 취급할 수 없다. 구성의 복잡함이나 현장의 난립을 설정하지 않고도 긴장감과 박진감을 유지하는 탁월한 능력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갖고 있다. 그의 글이 서사의 느낌을 주는 이유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이다. 갈릴레오 시리즈 3탄인 이 책으로 그는 2006년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나오키상 외에도 '이 미스터리가 최고',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부문에서도 각각 1위를 차지했다. 무엇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이 책은 전 남편에게 시달리는 여자가 자신의 딸과 함께 남편을 죽이는데서 시작한다. 불과 몇 페이지도 넘기지 않았는데 벌써 범인이 드러난다. 대담한 시작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현장을 보여준 후 범인을 찾는 추리 소설의 정석을 과감하게 깨뜨렸다. 그런 긴박함 없이도 끌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명이다.

살인을 한 후 얼이 빠져버린 하나오카 야스코에게 옆집에 사는 이시가미라는 남자가 구원의 손길을 뻗는다. 이시가미는 현직 고등학교의 수학 선생이다. 그는 야스코가 일하는 벤덴데이에 도시락을 사러 오는 이웃일 뿐인데 그가 살인의 뒷처리를 하겠다 자청한다. 불현듯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벤덴데이의 주인 사요코의 말이 떠오른다.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 안면 몰수하고라도 손을 잡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이 덮어질리 없다. 사건은 구사나기 형사에게 맡겨지고 구사나기는 자신의 친구인 유가와 교수를 찾아간다. 유가와는 알리바이가 너무나 정확한데 놀라고 그 배후에 자신의 대학 동창인 이시가미가 있다는 걸 알고 비감에 젖는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진정 통하는 데가 있었던 친구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용의자로 그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유가와의 가슴은 아프다. 유가와는 깊숙이 개입한 듯 하면서도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구사나기는 뭔가 변한 듯한 유가와의 태도에 의문을 가진다.

인간이란 이렇게 간사한 존재인가. 야스코는 자신을 위해 공범자란 오물을 뒤집어 쓴 이시가미보다 구도가 좋다. 구도는 야스코가 술집에 있을 때 자주 찾아온 단골 손님이다. 구도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접은 뒤 일체 오지 않다 신문 기사를 보고 걱정이 돼 찾아온다. 자신의 부인이 세상을 뜬 지금, 구도는 야스코에게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하고 싶어한다. 야스코는 전남편의 속박과 괴롭힘이 싫어 살인까지 하게 됐는데 대상만 바뀌었다 뿐 이시가미가 일일이 지시하는 상황이 간섭처럼 느껴져 몸서리를 친다.

살인사건에 유가와가 뛰어들었으니 이제 범인이 밝혀지는 건 시간 문제다. 유가와는 고뇌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그의 인간적 아픔은 커지기만 한다. 어느날 이시가미가 자수를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시가미는 야스코와 딸이 살인 사건의 범인이 결코 될 수 없도록 이미 그와 연관된 살인사건을 저질러 자신을 살인자로 만들어 놨다. 자신의 희생으로 야스코가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사건이 종결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시가미는 처음부터 야스코의 살인사건이 그 자체로 해결될 수 있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떠앉아야겠다는 마음도 이미 그 때 먹었다.

그러나 유가와는 이대로 끝나게 할 수 없었다. 친구의 바람을 생각하면 이대로 묻어야겠지만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후 허무하게 잊혀질 그를 생각하니 너무 불쌍해 가슴이 터질 듯 했다. 유가와는 야스코를 찾아가 전후 사정을 알려준다. 야스코는 이시가미의 사랑이 그정도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자신처럼 별 볼일 없는 아줌마가 뭐라고 그런 사랑을 받나. 그에게 받은 사랑을 사랑으로 되돌려 줄 순 없지만 대가는 치뤄야겠다며 용단을 내리고 경찰을 찾아간다. 이시가미는 자신이 살인자가 되는 선택으로도 그녀를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비명을 지르고 만다.

사랑이란 단어가 들어가면 그 어떤 이야기도 건조할 수 없다. 또한 살인이 들어가면 그 어떤 이야기도 행복할 수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둘 사이의 경계를 줄타듯 오가며 조율한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낡은 주제가 그의 손에 윤색되어 처연한 사랑 노래로 탈바꿈한다. 사랑에 목말랐던 한 수학 수재의 슬픈 운명과 엇갈린 사랑은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맺게 되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하고만 한 남자의 순애보가 가슴을 울린다. 살인의 현장에서 인간의 고결함을 보게 되는 순간 이 책은 비가가 돼버린다. 그 전환점이야말로 이 책이 추리소설의 지평을 넓히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절한 정원
미셸 깽 지음, 이인숙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모든 전쟁은 인간의 광기로부터 비롯된다. 같은 종의 싹쓸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악한 방식은 참혹한 역사를 불러왔다. 전쟁의 참상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전쟁의 진정한 슬픔은 인간에 대한 어떤 기대도 불식하는데 있다. 일체의 기대도 안한다는 것은 모든 소망을 내려 놓음과 다름없다. 추악한 역사속의 반인륜적 범죄는 참으로 부끄러운 작태였다. 세월에 의해서도 지워지지 않는 행적은 법의 심판과 용서를 통해서만 씻어낼 수 있었다. 미셸 깽의 '처절한 정원'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친독 정부였던 비시정부하의 한 동네에 두 젊은 레지스탕스가 있다. 작중 화자의 아버지와 사촌 동생인 두 레지스탕스는 동네의 변압기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수행한다. 폭파시 뜻하지 않은 사람이 심하게 다치고 두 청년은 다른 청년 둘과 함께 독일군에 체포된다. 생과 사의 기로에 놓여있는 네 명의 청년은 베르나르라는 한 독일 병사의 도움을 받게된다. 그는 생명을 담보로 조롱하고 모욕하는 독일군의 행동에 휘둘리지 말라며 적군임에도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놀라운 말을 들려준다.

"죽고 사는 일을 타인의 손에 맡기거나,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대가로 자신이 살아난다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악이 선을 이기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악의 편에 있는 독일 군복을 입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야."

그들에게 이 이야기는 엄청난 선언이었다. 목숨을 지키는 것만이 최우선이었던 상황 속에 적군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인간다움의 선포는 전율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폭파범이 자수했고 그가 사살됐다는 것이다. 4명은 재수좋게 풀려나고 아버지와 삼촌은 시간이 지난 후 폭파범의 집으로 가게 된다. 아귀가 맞지 않는 폭파범의 자수는 부인의 고발에 의한 것이었다. 변압기 폭발 당시 폭파범은 전기공으로 현장에 있었고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남편의 회생이 불가한 것을 직감한 신혼의 부인은 다른 4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용단을 내린다.
그 부인이 지금 가스똥 삼촌의 부인인 니꼴 숙모다.

그 사건과 연계된 청년들의 삶은 그들의 전생애를 뒤흔들었다. 다른 두 청년 중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고 나머지 한 명은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버린다. 그리고 나머지 두 청년인 아버지와 삼촌의 삶은 극중 화자인 어린 아들의 입을 통해 들려진다. 후에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아버지는 수업외의 모든 시간을 어릿광대로 지낸다. 그는 한 푼의 대가도 받지 않은채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슬프고도 우스운 어릿광대로 최선을 다해 무대에 선다. 아버지의 그런 행동은 신경질적 발작의 원인이 될 정도로 어린 아들을 수치스럽게 한다.

시간과 자신의 명예마저 반납한 채 보잘것 없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아버지의 행동은 마치 소명 받은 자의 의무감 같았다. 아들은 인류가 저지른 죄를 용서받기 위해 아버지가 어릿광대라는 가장 초라한 모습을 취했음을 초등학교 졸업 무렵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아버지가 어릿광대로 살아야만 했던 이유는 후에 가스똥 삼촌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그 날은 예전 독일군 베르나르가 만든 영화의 포스터가 주점의 벽면에 붙여진 날이었다.

미셸 깽은 비시 정부하의 하수인이었던 모리스 파퐁의 재판과 맞물리며 지난 역사의 현재적 진행을 극적으로 대비해 준다. 인간을 죽이는데 자발적인 동의도 인간이 하고, 적군임에도 같은 인간을 지원하는 것도 인간이 한다는 양면적 사실은 우리에게 아픔과 기쁨을 동시에 준다.
이는 인간성의 파괴와 복원 또한 인간에게서 발현된다는 무서운 사실의 직시를 함의한다. 이 책이 던지는 감동이 긴 여운으로 남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제 선택은 우리에게 자유의지의 이름으로 와 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독일 병사 베르나르가 오랜 숙고 뒤 거침없이 던진 이야기는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조적 글쓰기 -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들려주는 글쓰기의 지혜
애니 딜러드 지음, 이미선 옮김 / 공존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저자인 애니 딜러드에게 원한 것은 단지 물고기 몇 마리였다. 물고기를 잡는 법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지금 내게 시급한 것은 오늘의 양식이었지 며칠 뒤의 소망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물고기는 커녕 물고기 잡는 법에도 일체의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글쓰는 이의 삶에 대해서만 언급할 뿐이었다. 젠장, 나는 일개 리뷰어란 말이다. 리뷰어에게 동류의식을 요구하는 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런데 그녀의 글쟁이 의식이 이상하게도 내게 위로가 되었다. 게다가 단지 리뷰어일 뿐인 내 삶과 작가인 그녀의 삶이 무척 비슷했다. 도대체 창살없는 감옥의 희열을 누가 가르쳐주었던가! 누구의 위협이나 강요도 없었건만 제발로 이 자리에 걸어들어와, 이런 삶을 행복이라 여기며 살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희안하기만 하다.

지금은 가고 없지만 장영희는 예전 자신의 글에 관해 '쥐어짜는 스타일'이라는 고백을 했었다. 그녀의 말이 얼마나 큰 위로를 주었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녀는 '올해의 문장상'을 받을 만큼 바르고 정확한 글을 썼고 여리고 섬세한 감성에 따스함까지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선지 지성의 요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였다. 그런 그녀도 글을 쓸 때 쥐어짠다는데 하물며 쥐어짜도 나올게 없는 나는 뭘 짜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몇 가닥 남아있지 않은 기억과 알량한 지식들을 붙잡고 글을 쓰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의 글이라니 오죽 잘 썼겠으며 얼마나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까! 내 기대는 컸고, 반면에 도움도 안되는 뜬구름 잡는 얘기라면 가차없이 책을 덮을 작정이었다.

내 곤두선 촉각에도 아랑곳없이 넉살 좋게도 애니 딜러드는 글쓰는 이의 일상만 늘어놓고 있다. 그 일상은 내가 걱정했던 바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글을 쓰다 몇 개의 문단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그건 기적이고, 글이 계속적으로 써지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그녀는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글 쓰는 이가 계획했던 것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책 한 권을 쓰려면 짧게는 일 이년에서 길게는 수 십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도 그녀는 스스럼없이 했다. 게다가 글이 안써질 때 머리를 찧거나 쥐어뜯지도 말고 또한 느린 속도로 글을 쓰는 자신을 탓하지도 말라고 느긋하게 조언까지 한다.

그렇게 염장을 질러놓고는 그녀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다. 이제 위로가 필요하다고 느꼈나 보다. 그녀는 글 쓰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며 무엇을 썼느냐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글을 쓰는 행위는 위대한 시작을 말하는 것이며 쓴다는 자체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님을 거듭거듭 강조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이미 써놓은 글은 큰 힘을 발휘하며 그 몇 줄의 글이 쓰는 이에게 얼마나 큰 희망과 자긍심이 되는지도 전해준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이 순간을 아름답게 회상할 날이 올 것이며 결국은 끝나는 날도 온다고 그녀는 격려도 잊지 않는다.

애니 딜러드의 글을 읽다보니 마치 리뷰어를 위해 쓰여진 글 같다는 착각이 든다. 그녀의 글 속에 비춰진 작가와 부끄럽지만 내 삶이 너무도 비슷하다. 계속 읽다보니 리뷰도 한 편의 창작물처럼 느껴진다. 그녀와 나의,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일상이 작가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나는 지금 감격하고 있다. 글을 쓰며 자책하고, 이미 읽었던 문장을 지겹도록 반복해서 읽으며, 고치고 고치기를 거듭하는 시간들이 자신의 삶이었음을 그녀는 말해준다. 과장도 겸양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담담하고도 솔직하게 표현한 문장이 글쓰기의 비법서보다 더 큰 도전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작은 방에서 스스로를 조이고 풀며, 세상과 동떨어진 가운데 글과 씨름해야하는 삶이 어떤 마음가짐을 요구하는지도 언급한다.

그녀는 내게 혹 글쓰는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을 찾고 있느냐고 조용히 묻는다. 그렇다고 나는 얼른 답하고 싶다. 그런데 눈치를 보니 가르쳐줄 마음이 없어 보인다. 나는 쭈뼛거리고 있고 그녀는 진지하고 장엄한 표정으로 내 눈을 응시한다. 그리곤 입을 연다. 앞으로 너의 스승은 지면과 지면 사이에 있는 끝없는 공백이 될 것이라고. 그 스승을 벗삼아 너 자신이 글이 되고 글이 네가 되는 것, 그리하여 글쓰기 안으로 더 들어가는 것이 진짜 너의 글쓰기가 될 것이라 그녀는 들려준다.

그렇다. 글쓰기는 나와의 평생에 걸친 싸움이 될 것이다. 한없이 올랐다가 바닥이 어딘지도 모를 구덩이에 빠지는 좌절을 끝없이 반복하는 삶이, 내 글쓰기가 될 것이다. 절망의 나락과 환희의 순간을 나도 모르게 맞고 보내야 하는 치열한 전쟁의 삶, 그 삶에 내가 초대되었다. 한없이 부족하여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지극히 성찰적인 그 자리에 내 생이 포함된 것이 무척이나 기쁘다. 앞으로도 내 갈등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 환희 또한 클 것이다. 이제 그 글쓰기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내 삶에서 시작되었다. 시간은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내 기대는 마냥 부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참 쉬운 마음 글쓰기 - 일기, 독서록으로 아이와 씨름하는 엄마들의 필독서
이임숙 지음 / 부키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학기 부터 서울시 교육청의 재능 기부자가 되어 딸 아이의 학교에서 1, 2 학년 학생들의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어린 친구들이라 각기 차이도 있는데다 학년이 벌어져 내심 쉽지 않겠다 생각했다. 첫 수업 준비를 그간의 경험으로 미뤄보아 결코 적지 않게 했는데도 어린 친구들은 금새 해치운다. '각자 낱말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보고 싶어 그러니 조용히 써 보라' 권유했다. 물론 예를 들기 위해 몇 개를 같이 했는데 재미있었는지 어린 친구들은 신나서 소리 높여 말한다. 그 말을 생각 못한 다른 친구들은 '옳다구나' 싶은지 들은대로 열심히 쓰고 있다.

'에고, 이 시도는 실패구나' 싶었다. 준비한 유인물은 2장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모자라야 정상인데 오히려 남았다. 5학년 언니 오빠들도 시간이 모자라 쩔쩔 맸는데 어린 친구들이 어찌 그리 빨리 끝마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시간이 3분 정도 남았고 그 시간은 생각외로 길었다. 수업을 마치고, 가면서 먹으라고 나눠준 요플레를 어린 친구들은 '좋네, 싫네' 하면서 받고, '역시 글쓰기는 싫다'며 가면서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정신이 없었다. 분명히 재미있게 했는데 뭔지 모르게 낙심이 됐다. 원래 계획은 학생들의 수준을 파악한 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보게 할 작정이었다. 비록 힘들긴 하지만 단 몇 줄이라도 독후감을 쓰는 것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울했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쓴 글을 읽지 않고 구석에 밀어두었다. 괜히 신청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런데 다음 차 수업을 위해 아이들의 글을 보며 나는 놀라고 말았다. 아이들의 글이 너무 귀엽고 예뻤다. 함께 했기 때문에 같은 말들이 반복되긴 했지만 각자 자신의 생각을 열심히 적어놓고는 옆에 그림도 그려 넣었다. 12명의 글을 읽으며 속상했던 마음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글을 읽으며 나는 크게 깨달았다. 사람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다가 아니며, 겉으로 드러나는 느낌만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말이다.

글은 진실로 말과 달랐다. 까불대며 단 몇분도 가만히 있지 않던 아이의 마음을 글로 읽으며, 만약 내가 아이의 글을 읽지 않았다면 어떤 판단을 내렸을지를 생각하게 됐다. 그랬다면 나는 수업 태도나 인상만으로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글이 아니었다면 결코 몰랐을 아이의 마음을 알게 됐다. 아이들의 글에 내 느낌을 덧붙이며 나는 신이 났다. 쓰면서 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깊게 느끼고 있었다.

글이란 그런 것이다. 말로는 다 못할 마음을 전하는 것, 그리하여 읽는 이의 마음까지 온기를 가져다 주는 것이 글이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다. 얼마나 쉽지 않은지 아이들은 글쓰기를 싫어하고 내심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쓰기 힘들어서 싫어하는 것이지 결코 글쓰기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진지하고도 절박한 내 물음에 대한 답이 이임숙 선생의 '참 쉬운 마음 글쓰기'에 있었다.

그녀의 책엔 아이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연륜이 묻어났다. 또한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표현이 있었다. 신뢰가 갔다. 글쓰기에 관련된 책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자칫하면 많은 책 중의 하나로 전락할 위험도 있는 것이 글쓰기 관련 책이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책을 냈을 때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문을 다시 읽기로 했다. 서문에는 종이만 보면 괴로워하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자신이 글쓰기를 어려워했기에 아이들의 고민은 곧 어린 그녀의 고민이었으며, 그 고민을 안고 아이들을 가르쳤기에 그녀의 책은 단순한 지침서가 아닌 아이들을 살리는 글쓰기에 관한 고백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현실로 돌아가면 또 다른 막막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글쓰기란 선한 의도와 좋은 목적만으로 합당한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갖게 되는 어려움 말이다. 구체적인 방법과 세밀한 스킬이 있어야만 적합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데, 이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선한 의도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글로 쓰게 하라'는 그녀의 조언은 심도있게 다가온다. 현장에서 아이들과 부딪히며 피드백을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직접적으로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기에 그녀의 사례담은 힘있는 것이다.

그녀의 글을 통해 나 자신이 지금껏 지극히 피상적이고 당연한 질문을 해왔던 것은 아닌가 자문해 본다. 더 고민하기 싫어 단편적인 질문에 머물렀던 것은 아닌지, 아이 자신의 감정만으로도 많은 질문을 할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었는데 더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해 본다. 그러나 자책보다 기쁨이 앞서는 것은 그녀의 교수법과 그 결과를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누려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쓰는 아이들의 얼굴이 찡그림이 아닌 해맑은 웃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덧붙여 글쓰기를 통해 아이들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라서이기도 하다.

공부나 학습을 위해서가 아닌 아이들 자신을 위한 글쓰기 지침서를 만나게 돼 기쁘다. 아이들이 글이란 멋진 친구를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 또한 기대 가득하다. 글쓰기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알 수 있도록 지도해보고 싶다. 지금 내 마음은 아이들 곁으로 달려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