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은 언제나 차분하다. 감정의 거품은 제거되고 찌꺼기는 가라앉은 듯 그의 글은 일정한 정조를 유지한다. 살육 현장의 피비린내도 느껴지지 않고 타의에 의한 죽음도 일상의 한 부분인듯 표현해 놓았다. 피가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그의 글에선 배제되어있다. 잔혹함을 미끼로 말초적 신경을 건드리는 부박함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그의 글은 함부로 취급할 수 없다. 구성의 복잡함이나 현장의 난립을 설정하지 않고도 긴장감과 박진감을 유지하는 탁월한 능력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갖고 있다. 그의 글이 서사의 느낌을 주는 이유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이다. 갈릴레오 시리즈 3탄인 이 책으로 그는 2006년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나오키상 외에도 '이 미스터리가 최고',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부문에서도 각각 1위를 차지했다. 무엇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이 책은 전 남편에게 시달리는 여자가 자신의 딸과 함께 남편을 죽이는데서 시작한다. 불과 몇 페이지도 넘기지 않았는데 벌써 범인이 드러난다. 대담한 시작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현장을 보여준 후 범인을 찾는 추리 소설의 정석을 과감하게 깨뜨렸다. 그런 긴박함 없이도 끌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명이다.

살인을 한 후 얼이 빠져버린 하나오카 야스코에게 옆집에 사는 이시가미라는 남자가 구원의 손길을 뻗는다. 이시가미는 현직 고등학교의 수학 선생이다. 그는 야스코가 일하는 벤덴데이에 도시락을 사러 오는 이웃일 뿐인데 그가 살인의 뒷처리를 하겠다 자청한다. 불현듯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벤덴데이의 주인 사요코의 말이 떠오른다.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 안면 몰수하고라도 손을 잡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이 덮어질리 없다. 사건은 구사나기 형사에게 맡겨지고 구사나기는 자신의 친구인 유가와 교수를 찾아간다. 유가와는 알리바이가 너무나 정확한데 놀라고 그 배후에 자신의 대학 동창인 이시가미가 있다는 걸 알고 비감에 젖는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진정 통하는 데가 있었던 친구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용의자로 그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유가와의 가슴은 아프다. 유가와는 깊숙이 개입한 듯 하면서도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구사나기는 뭔가 변한 듯한 유가와의 태도에 의문을 가진다.

인간이란 이렇게 간사한 존재인가. 야스코는 자신을 위해 공범자란 오물을 뒤집어 쓴 이시가미보다 구도가 좋다. 구도는 야스코가 술집에 있을 때 자주 찾아온 단골 손님이다. 구도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접은 뒤 일체 오지 않다 신문 기사를 보고 걱정이 돼 찾아온다. 자신의 부인이 세상을 뜬 지금, 구도는 야스코에게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하고 싶어한다. 야스코는 전남편의 속박과 괴롭힘이 싫어 살인까지 하게 됐는데 대상만 바뀌었다 뿐 이시가미가 일일이 지시하는 상황이 간섭처럼 느껴져 몸서리를 친다.

살인사건에 유가와가 뛰어들었으니 이제 범인이 밝혀지는 건 시간 문제다. 유가와는 고뇌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그의 인간적 아픔은 커지기만 한다. 어느날 이시가미가 자수를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시가미는 야스코와 딸이 살인 사건의 범인이 결코 될 수 없도록 이미 그와 연관된 살인사건을 저질러 자신을 살인자로 만들어 놨다. 자신의 희생으로 야스코가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사건이 종결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시가미는 처음부터 야스코의 살인사건이 그 자체로 해결될 수 있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떠앉아야겠다는 마음도 이미 그 때 먹었다.

그러나 유가와는 이대로 끝나게 할 수 없었다. 친구의 바람을 생각하면 이대로 묻어야겠지만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후 허무하게 잊혀질 그를 생각하니 너무 불쌍해 가슴이 터질 듯 했다. 유가와는 야스코를 찾아가 전후 사정을 알려준다. 야스코는 이시가미의 사랑이 그정도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자신처럼 별 볼일 없는 아줌마가 뭐라고 그런 사랑을 받나. 그에게 받은 사랑을 사랑으로 되돌려 줄 순 없지만 대가는 치뤄야겠다며 용단을 내리고 경찰을 찾아간다. 이시가미는 자신이 살인자가 되는 선택으로도 그녀를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비명을 지르고 만다.

사랑이란 단어가 들어가면 그 어떤 이야기도 건조할 수 없다. 또한 살인이 들어가면 그 어떤 이야기도 행복할 수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둘 사이의 경계를 줄타듯 오가며 조율한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낡은 주제가 그의 손에 윤색되어 처연한 사랑 노래로 탈바꿈한다. 사랑에 목말랐던 한 수학 수재의 슬픈 운명과 엇갈린 사랑은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맺게 되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하고만 한 남자의 순애보가 가슴을 울린다. 살인의 현장에서 인간의 고결함을 보게 되는 순간 이 책은 비가가 돼버린다. 그 전환점이야말로 이 책이 추리소설의 지평을 넓히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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