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글쓰기 -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들려주는 글쓰기의 지혜
애니 딜러드 지음, 이미선 옮김 / 공존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저자인 애니 딜러드에게 원한 것은 단지 물고기 몇 마리였다. 물고기를 잡는 법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지금 내게 시급한 것은 오늘의 양식이었지 며칠 뒤의 소망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물고기는 커녕 물고기 잡는 법에도 일체의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글쓰는 이의 삶에 대해서만 언급할 뿐이었다. 젠장, 나는 일개 리뷰어란 말이다. 리뷰어에게 동류의식을 요구하는 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런데 그녀의 글쟁이 의식이 이상하게도 내게 위로가 되었다. 게다가 단지 리뷰어일 뿐인 내 삶과 작가인 그녀의 삶이 무척 비슷했다. 도대체 창살없는 감옥의 희열을 누가 가르쳐주었던가! 누구의 위협이나 강요도 없었건만 제발로 이 자리에 걸어들어와, 이런 삶을 행복이라 여기며 살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희안하기만 하다.

지금은 가고 없지만 장영희는 예전 자신의 글에 관해 '쥐어짜는 스타일'이라는 고백을 했었다. 그녀의 말이 얼마나 큰 위로를 주었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녀는 '올해의 문장상'을 받을 만큼 바르고 정확한 글을 썼고 여리고 섬세한 감성에 따스함까지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선지 지성의 요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였다. 그런 그녀도 글을 쓸 때 쥐어짠다는데 하물며 쥐어짜도 나올게 없는 나는 뭘 짜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몇 가닥 남아있지 않은 기억과 알량한 지식들을 붙잡고 글을 쓰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의 글이라니 오죽 잘 썼겠으며 얼마나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까! 내 기대는 컸고, 반면에 도움도 안되는 뜬구름 잡는 얘기라면 가차없이 책을 덮을 작정이었다.

내 곤두선 촉각에도 아랑곳없이 넉살 좋게도 애니 딜러드는 글쓰는 이의 일상만 늘어놓고 있다. 그 일상은 내가 걱정했던 바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글을 쓰다 몇 개의 문단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그건 기적이고, 글이 계속적으로 써지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그녀는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글 쓰는 이가 계획했던 것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책 한 권을 쓰려면 짧게는 일 이년에서 길게는 수 십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도 그녀는 스스럼없이 했다. 게다가 글이 안써질 때 머리를 찧거나 쥐어뜯지도 말고 또한 느린 속도로 글을 쓰는 자신을 탓하지도 말라고 느긋하게 조언까지 한다.

그렇게 염장을 질러놓고는 그녀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다. 이제 위로가 필요하다고 느꼈나 보다. 그녀는 글 쓰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며 무엇을 썼느냐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글을 쓰는 행위는 위대한 시작을 말하는 것이며 쓴다는 자체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님을 거듭거듭 강조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이미 써놓은 글은 큰 힘을 발휘하며 그 몇 줄의 글이 쓰는 이에게 얼마나 큰 희망과 자긍심이 되는지도 전해준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이 순간을 아름답게 회상할 날이 올 것이며 결국은 끝나는 날도 온다고 그녀는 격려도 잊지 않는다.

애니 딜러드의 글을 읽다보니 마치 리뷰어를 위해 쓰여진 글 같다는 착각이 든다. 그녀의 글 속에 비춰진 작가와 부끄럽지만 내 삶이 너무도 비슷하다. 계속 읽다보니 리뷰도 한 편의 창작물처럼 느껴진다. 그녀와 나의,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일상이 작가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나는 지금 감격하고 있다. 글을 쓰며 자책하고, 이미 읽었던 문장을 지겹도록 반복해서 읽으며, 고치고 고치기를 거듭하는 시간들이 자신의 삶이었음을 그녀는 말해준다. 과장도 겸양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담담하고도 솔직하게 표현한 문장이 글쓰기의 비법서보다 더 큰 도전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작은 방에서 스스로를 조이고 풀며, 세상과 동떨어진 가운데 글과 씨름해야하는 삶이 어떤 마음가짐을 요구하는지도 언급한다.

그녀는 내게 혹 글쓰는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을 찾고 있느냐고 조용히 묻는다. 그렇다고 나는 얼른 답하고 싶다. 그런데 눈치를 보니 가르쳐줄 마음이 없어 보인다. 나는 쭈뼛거리고 있고 그녀는 진지하고 장엄한 표정으로 내 눈을 응시한다. 그리곤 입을 연다. 앞으로 너의 스승은 지면과 지면 사이에 있는 끝없는 공백이 될 것이라고. 그 스승을 벗삼아 너 자신이 글이 되고 글이 네가 되는 것, 그리하여 글쓰기 안으로 더 들어가는 것이 진짜 너의 글쓰기가 될 것이라 그녀는 들려준다.

그렇다. 글쓰기는 나와의 평생에 걸친 싸움이 될 것이다. 한없이 올랐다가 바닥이 어딘지도 모를 구덩이에 빠지는 좌절을 끝없이 반복하는 삶이, 내 글쓰기가 될 것이다. 절망의 나락과 환희의 순간을 나도 모르게 맞고 보내야 하는 치열한 전쟁의 삶, 그 삶에 내가 초대되었다. 한없이 부족하여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지극히 성찰적인 그 자리에 내 생이 포함된 것이 무척이나 기쁘다. 앞으로도 내 갈등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 환희 또한 클 것이다. 이제 그 글쓰기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내 삶에서 시작되었다. 시간은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내 기대는 마냥 부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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