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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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이고 여린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늘 혼자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식구들은 돈을 벌러 나갔고, 소년을 돌봐줄 사람은 없었다. 적막한 집에 홀로 남은 소년은 외로움이 뼈에 사무치도록 시렸다. 소년은 자라 어른이 되었고 어린 시절의 옷 또한 벗어버렸지만 그 시절의 기억은 지울 수 없었다. 유년의 기억은 소년의 마음을 달군 인두처럼 지져 시인의 표식을 남겼다. 후에 소년은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길지 않았다. 시인이 세상을 뜬 후 사람들은 경악했다. 너무 일찍 맞이한 그의 죽음에, 마지막 실존의 장소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그렇게 펄펄 뛰는 육체와 모든 아픔을 견뎌낸 심장을 가지고도이런 허무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몸을 떨었다. 여기저기 실렸던 그의 시를 모았다. 그를 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아니 그의 시를 이대로 두면 안될 것 같았다. 문예지에 실렸던 시들과 미발표 작품들을 모아 지인들은 부랴부랴 시집을 내었다. '잎 속의 검은 잎'. 그의 첫 시집이다. 그 책은 유고시집이라 불렸고 그 시집의 저자는 기형도라 불린다.

 

 

기형도는 이제 전설이다. 그는 사람들을 자신의 시로 매혹시켜 놓고 놔주지 않았다. 그를 만난 다음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그는 시 안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 놓았다. 귀기에 가까운 언어 감각과 끝을 알 수 없는 부정성, 다시 읽어도 새롭기만한 기형도적 감성과 깊은 슬픔은 그의 시를 접한 사람들을 경탄과 탄식으로 몰아 넣었다. 무릇 시가, 자신을 쉽게 열지 않는 영역이긴 하지만 그래도 같은 사람인데 이런 격차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의 벌어진 입과 다물어진 입은 어떤 말도 뱉을 수 없었다.

 

기형도가 가진 슬픔의 기원은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다. 그의 시 '엄마 걱정'을 읽으면 그의 유년이 어떠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를 기다리며 훌쩍이고 있는 어린 기형도의 모습이 떠오른다. 얼마나 무섭고 서러웠을까. 시를 쓰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을지 모른다. 너무 아픈 기억은 추억이 되기보다는 아픔이 되어 남는 법이다. 그의 유년이 덜 슬펐다면 그의 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본다.

 

오래된 書籍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

.

중략

.

.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기형도의 시는 매우 어둡다. 그는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간 후 한 치의 희망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함께 빨려 간 우리는 심판관이 됐다는 이유로 졸지에 단죄를 당한다. 그러나 그에게서 뿜어나오는 감각적 정서는 질거나 되지 않으며 무척 가볍다. 그의 시적 세련됨은 이미 시대를 넘어서 있다. 그래서 그의 시가 그리는 이미지는 '뻘'이 아니다. 푹푹 빠지는 진창이 되지 않기에 그를 따라 저 곳에 발을 깊숙이 디딜 수 있는 것이다.

 

10월

 

전략

.

.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

.

후략

 

기형도의 친필 시

 

지극히 사적인 감상이 불러일으키는 동질의 감정은 그의 시가 가진 장점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공간을 떠나 지금, 이 곳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문학 평론가 김현은 '잎 속의 검은 잎'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은 시인은 그의 개인적, 내적 상처를 반성,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러나, 자기의 감정적 상처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그것을 억지로 감춤으로써, 끝내, 기형도의 표현을 빌면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를 벗지 못한다. 그것은 보기 흉하다. 그것은 성숙하지 못한 짓이기 때문이다."

 

김현의 언급 때문이 아니더라도 기형도의 시는 이미 충분히 넓고 깊다. 그래서 '정거장에서의 충고' 에서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와 같은 표현이나 '진눈깨비'에서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고 했던 그의 이야기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기형도가 세상을 떠난지 벌써 22년이 되었다. 그는 젊음을 간직한 채 여전히 싱그러운 웃음을 짓고 있다. 그보다 젊었거나 조금 더 나이 먹은 사람들은 이제 얼굴의 검버섯을 훈장처럼 단채 그를 기억한다. 자신의 바람대로 이 세상에 그가 잠시 머물고 떠났을 때, 남겨진 자들은 그의 시로 떠난 그를 붙잡고 싶어했다. 한때 잠시 머물줄 알았던 그의 시는 이제 짧았던 삶을 대신해 더 큰 울림을 주고 있고, 다른 시간대에 있는 젊음에게는 절망을 노래했던 실존의 시로 다가가 푸르게 피고 있다. 살아 생전 현존하는 부재였던 기형도는 이제 부재하는 현존속에서 우리 곁에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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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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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큼 끊임없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종(種)은 없다. 수 천년의 시간을 두고 역사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정도면 인간에 대한 사료(史料)는 넘쳤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기대는 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종말이 올 때조차도 결코 사그러들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게 처참한 실망을 하고서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기대를 인간에게 갖고 있다. 그만큼 인간은 매혹적인 존재이다. 너무도 빼어난 외모의 인간을 볼 때 우리가 갖게 되는 느낌이나 테레사 수녀와 같이 숭고한 인간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 극과 극처럼 멀어 보여도 결국은 자웅동체이다.

이 해결할 길 없는 문제에 대해 요시다 슈이치는 '누가 악인인가'라는 질문으로 인간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미스테리 형식으로 짜여진 이 소설은 어느 으시시한 고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기점으로 시작한다. 살인자와 죽은 여자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살인자 유이치는 근사한 외모에 어눌한 입을 가지고 있는 일용직 노동자다. 그는 어릴 적 부터 외갓집에 맡겨져 외조부모의 양자로 입적돼 살고 있다. 그의 엄마는 자식을 친정에 맡긴 후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 상처 때문인지 유이치는 누구와도 긴 얘기를 나눌 수 없고 그가 하는 말은 늘 한 두 단어로 그치고 만다.

피살자 요시노는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알게 된 남자들과 문자를 주고 받으며 때론 만나기도 하는 등 낮과 밤이 다른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정상적인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그녀는 남자들을 만나면 돈을 요구하며 창녀와 같은 행동을 스스럼없이 한다. 그러나 그녀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길거리에서 만나 호감을 표시한 대학생 마스오뿐이다. 불행히도 그에게는 일체의 연락도 없고, 요시노는 같이 사는 직장 동료들에게는 마치 마스오와 사귀는 것처럼 거짓말을 한다. 어느 늦은 저녁 그를 만나러 간다며 나한 후 요시노는 피살체로 발견된다.

 

요시노를 죽인 사람은 유이치지만 그녀의 마음은 죽기 전 이미 손상돼 있었다. 어쩌면 상처받은 자존심이 그녀의 죽음을 불러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죽음의 방조자는 마스오다. 유이치를 만나러 간 그 시각 우연히도 마스오는 그 장소에 있었다. 요시노는 마스오만 눈에 보일 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유이치에게는 관심도 없다. 약속이 있다며 돌아가라 차갑게 말하곤 마스노의 차에 훌쩍 타버린다. 그러나 요시노의 경박한 행동들이 추해 보이던 마스오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국도의 외진 곳에 걷어차 버리고 떠난다. 뒤쫓아온 유이치는 그녀가 머리를 심하게 부딪친 것 같아 도와주려하지만 요시노는 유이치에게 화풀이를 하고는 자신을 성폭했다며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한다. 요시노의 폭언은 계속되고 유이치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만다.

미쓰요는 한 쇼핑센터의 남성복 매장에 근무하는 서른 살의 독신녀다. 사귀는 사람도 없이 쌍동이 여동생과 매장 근처의 조그만 주택가에 살고 있다. 평범한 일상은 그녀의 삶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삶이 너무도 쓸쓸하기만 하다. 이 조그만 소읍에서 결혼하기란 쉽지 않다. 쓸만한 사람은 다 유부남이고 만남 자체는 이미 어려워졌다. 아무도 몰래 가입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예전 한 두번 문자를 교환한 유이치를 만나볼 계획이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이 그녀의 일생을 바꿀 줄은 누구도 몰랐다. 유이치와 미쓰요의 만남은 진작에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랬다면 살인은 없었을지 모른다.

 

수사망은 좁혀지고 둘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만다. 똑같은 육체적 욕망이 한 사람에게는 살인을, 다른 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불러왔다. 여기서 요시다 슈이치는 질문을 던진다. 마스오에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런 존재였던 요시노가 다른 누군가에는 생의 끈을 잡게 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40대의 학원 강사 하야시에게 요시노의 미소는 너무도 따스했다. 그 뿐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요시노를 손가락질 해도 요시노의 부모에게 그녀는 단 하나 뿐인 사랑스런 딸이었다.

 

질문은 연이어진다.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해 인간이 보여야 할 반응에 대해서이다. 살인사건으로 마스오는 용의자로 지목돼 한동안 힘든 시간을 겪는다. 도망 아닌 도망을 가야했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게 두려운지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다행히도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제 자신은 떳떳하다는 생각에 마스오는 요시노와의 관계를 친구들에게 떠벌리며 조롱한다. 그 부모는 세상의 온갖 비웃음과 딸의 허망한 죽음으로 생을 포기하다시피 하는데도 그는 면죄부의 해방감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마스오의 행동은 친구들의 마음에도 구역질을 불러일으킨다.

요시노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보다 딸을 고속도로의 한 구석에 내팽겨치고 가버린 마스오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마스오를 만나면 죽일 작정으로 그의 행방을 쫓는다. 그러나 젊은 혈기는 당할 수 없었고 오히려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마스오 친구의 도움으로 마스오가 자주 가는 장소를 알게 된 그는 자신을 우스꽝스런 노인네로 묘사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들고다니던 스패너를 마스오의 발 아래 던지고 나온다. 소중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에게 부재의 슬픔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살인'에서 보여지는 요시다 슈이치의 탐색은 구체적이며 실증적이다. 그가 보여주는 한 인간에 대한 그림은 존재에 대한 평가가 결코 단선적일 수 없음을 비춘다. 일회용 만남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도회적 타락의 등식으로 성립되는 것만도 아님을 전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각자의 외로움을 탔던 것이다. 20대의 육체적 욕구가 도화선이 됐을지언정 욕망의 확인을 위해 육체만 던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결말에서 들려주는 유이치의 이야기는 요시다 슈이치가 실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닐지 모르겠다.


그날 밤, 이시바시 요시노씨가 "경찰에 신고할 거야!"라고 소리쳤을 때, 내가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주장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이 세상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게 두려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그런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일을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순순히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도망치려 비겁한 행동을 하고 만 거죠.........

그렇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젠 말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인범이라고. 요시노씨를 죽이고 마고메씨를 데리고 도망친 살인범이라고.....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사람이 다른 인간에게는 지순한 사랑을 부어준 동일인임에 비극적 현실은 역설적으로 대비된다. 또한 외면하고픈 행실로 죽음을 당한 한 인간도 다른 이에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는 생의 부조화는 이 책을 비감으로 가득차게 했다. 과연 악인은 누구인가? 두 축이 만나는 교차점에 불만 붙으면 누구도 악인이 될 수 있고, 그 상황만 아니라면 누구도 사랑스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이 책은 각인시키듯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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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풀 - 개정판 닥터 이라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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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경쾌해지는 작가 오쿠다 히데오만났다. 예전 '스무살 도쿄'로 그와 눈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때 소개해준 주인공은 철딱서니 없는 20대의 대학생이었다. 따라서 이번에도 주인공에 대한 기대는 딱히 없었다. 그냥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살다 살다 주인공이 궁금하지 않은 건 이 책이 처음이다.

하나 이게 웬걸! 가벼움과 모자람만으론 성에 안차는지 오쿠다 히데오 이번엔 변태 의사 선생님을 소개해준다. 이런 사람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니 세상 좋아졌다.

'인더풀'은 5편의 이야기로 짜여져 있다. 당연히 등장 인물도, 상황도 다르다. 근데 한결같이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처음엔 그가 주인공인지도 몰랐다. 계속 읽다보니 이 아저씨만 빠지지 않고 얼굴을 내미는 거였다. 이 사람이 숨겨놓은 주인공이었다니. 히든 카드가 꽤 멋지다.

'인더풀'의 괴짜 주인공을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이라부 이치로. 이라부 종합병원의 후계자이며 현직 신경과 의사다. 희어멀건한 얼굴에 피둥피둥한 몸, 기름기 흐르는 머리와 작달막한 키로 비호감의 모든 조건을 구비했다. 본인은 삼십대라는데 사십도 훌쩍 넘어보이는 인상에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경박함까지 세세하게 갖췄다. 환자 앞에서 의사라면 할 수 없는 얘기만 골라서 하고 가짜일 것 같은 의심스런 얘기만 척척 전한다. 그에게 진료 받으러 온 환자들은 처음에 무척 갈등 한다. 왔으니 어쩔 수 없어 묻는 말에 대답도 하고 얼떨결에 주사도 맞지만 회의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에게 오는 환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에 대해서도 알아야겠다. 첫 등장 인물은 행사 도우미를 하는 야스가와 히로미다. 깍아서 스물살인 그녀는 세상 모든 남자들이 자신만 쳐다본다는 심각한 착각에 빠져있다. 이른바 '과대망상증'에 걸린 거다. 갈수록 증세가 심각해지자 어쩔 수 없이 신경과를 찾는다. 그녀가 찾은 병원은 이라부 종합병원. 깔끔한 1층에 비해 어두컴컴한 지하는 금방 뭐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작심하고 들어가보니 글래머 간호사가 무관심한 얼굴로 자신을 대한다. 그녀 이에 질세라 윗 단추를 슬쩍 푸르고는 허리에 힘을 준채 진료실로 들어간다.

도저히 의사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저렴한 분위기와 툭툭 던지는 말투에 히로미 경악하고 만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의 이라부 당장 작업 들어가고, 그 다음 진료부터 머리에 힘주며 의상은 브랜드로 온 몸을 휘감는다. 근데 희안하게 이 의사, 히로미의 말을 다 받아준다. 말 뿐 아니라 히로미를 따라 다니며 똑 같은 행동을 한다. 어느날 번쩍 정신 들고 보니 그 의사 은근 실력 있었다. 그녀의 병명은 '피해 망상'이다.

두번째 환자는 '지속 발기증'으로 이치로를 찾은 다구치 데츠야다. 부인의 바람으로 3년 전 이혼하고 혼자 사는 돌싱남이다. 당시 이치로 선생도 그와 처지가 비슷했다. 몇 개월 밖에 살지 않았던 전부인은 이혼 소송을 낸 상태였고 이치로의 변태적 행동을 폭로하겠다며 그를 협박 중이었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이치로는 환자 앞에서 온갖 욕을 다하며 전화상으로 싸우는 추태를 보여준다. 데츠야는 이치로에게 오는 모든 환자가 그랬듯이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치고 받는 싸움을 통해 자신의 병이 왜 생겼는지 자각하게 된다. 그는 화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성의 이름으로 감정을 억제했고 그 댓가로 음경강직증에 걸린 것이다. 그가 너무 감정을 억제하니 그의 성기가 대신 감정을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결국 데츠야는 자신의 울분을 사람들 앞에서 토하게 되고 마음이 시원해짐을 느끼게 된다.

세번째 환자는 심신증으로 고생하는 오오리 카즈오. 네번째 환자는 핸드폰 의존증에 빠진 고등학교 2학년생 츠다 유타. 다섯번째 환자는 강박신경증에 걸린 이와무라 요시요다.

참! 두번 째로 중요한 인물이 빠졌다. 육감적 몸매에 환자엔 도통 관심없는 간호사 마유미. 친구가 없다는 사실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되지 않는 그녀는 요즘 세상이 추앙하는 쉬크녀다. 매사가 쿨한 건지 아니면 나른한건지 그녀를 보면 잠이 올 듯하다. 그치만 잠깐씩 등장한다고 그녀를 무시하면 안된다. 그녀는 오쿠다 히데오의 숨겨진 페르소나기 때문이다. 원 페르소나가 우리의 이치로 선생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 사람은 인간에 무한 관심을 표명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귀찮기 한량 없다. 어쩌면 이 둘은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인더풀'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은 하나같이 마음의 병을 갖고 있다. 마음이 힘드니까 일상 생활에서도 어려움이 무척 크다. 그런 그들을 신뢰할 수 없는 언행만 일삼는 이치로가 어떻게 고칠 수 있었을까?

비록 경박함과 비호감으로 똘똘 뭉쳐지긴 했지만 이치로가 환자의 심정을 공감했던 의사였다는 점이다. 누가 들어도 이치에 닿지않는 얘기를 그는 건성으로 듣지 않았고 의례적인 응답도 하지 않았다. 공감의 위력이다. 어쩌면 공감이라기 보다는 너나 나나 다를 것 없다는 생각에서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이치로 역시 '주사 페티시즘'이 있는 사람이니까.

또한 체면치레라고는 모르는 이치로의 행동을 통해 환자들은 대리만족을 했다. 그까짓 체면이 뭔가? 내가 죽게 생겼는데. 체면과 가식에서 벗어나는 건 이제 절체절명의 숙제다. 자기 마음껏 하고 사는 이치로를 통해 그들은 구원받은 느낌이다. 어쩌면 일본 사회의 구조적 체증과 위선에 힘들어하는 보통 사람의 심정을 대변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오쿠다 히데오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그의 얘기는 단순한 에피소드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책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고뇌는 현재적 일본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올 4월 대지진과 같은 국가적 비상 사태속에서도 메뉴얼대로 가는 나라가 일본이다. 자연재해로 인한 숙명적 인생관과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의식이 소시민을 얼마나 옥죄는지는 외부인은 상상도 하기 힘들터다. 그런 답답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오쿠다 히데오는 출구를 열어준다. 그가 열어주는 출구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 가슴이 뻥 뚤리는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칼보다 강하다는 펜의 힘을 그의 소설은 실제로 보여준다. 힘만 있는가? 보너스로 폭탄급 웃음도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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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6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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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환상은 억압된 현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환상의 세계는 잠깐의 유영만으로도 간단치 않은 현실을 벗어나는 출구가 된다. 문제적 상황은 냉철한 판단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만 때로는 환타지로부터 예기치 않은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아이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은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그 세계는 아이들에게 두고두고 되뇌어도 물리지 않는 보물 창고가 되었다. 아이들이 발을 디딘 현실은 아이기 때문에 힘든게 많았다. 그 현실을 버틸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건 하잘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좋은 이야기꾼은 소중한 기억이라는 선물을 나누어 주는 자들이다.

2009년 구병모가 `위저드 베이커리`를 들고 등장했다. 그녀의 등장은 좋은 이야기꾼의 탄생을 알리는 서곡이 되었다. 그녀는 현실 속에서만 이야기를 풀어내던 우리 소설의 한계를 벗어나 판타지의 세계로까지 지평을 넓혔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그녀의 유려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녀의 글은 단순히 지평만 넓힌 것이 아니었다. 마치 곤혹스런 소재들만 의도적으로 취합한 듯 한결 같이 무거운 소재들을 곳곳에 숨겨 두었다. 피해가고픈 이야기들을 굳이 끄집어 내 속속들이 보여주는 이유가 궁금하다. 잘 다루지 않으면 죽도 밥도 되지 않을 확률도 높아보인다. 자녀 유기와 자살, 성폭행과 거짓말, 부모의 재혼과 새엄마의 학대등 하나같이 민감하고 무거운 사안들이다. `위저드 베이커리`에는 하나만 다뤄도 핵폭탄급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이 책엔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나로만 표현되는 그 아이는 현재 고등학생이다. 5살 즈음 친엄마가 자신을 유기하고 그 후 엄마는 집에서 자살하고 만다. 엄마가 자살하게 된 경위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유추할 수는 있다. 아빠의 외도로 인해 심한 충격을 받은 엄마는 꽤 오래전부터 이미 자식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던 상태였던 듯 하다. 이는 아빠도 마찬가지로 아이가 지하철 역에 버려져 일 주일이나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아빠는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부모가 있지만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아이는 자라게 된다.

아빠는 어린 딸이 딸린 초등학교 선생님과 재혼한다. 새엄마인 배선생은 아이를 정신적으로 학대하고 아이의 설자리는 갈수록 줄어든다. 아이는 이제 문장으로 쓰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는 말더듬이가 되었다. 어느날 새엄마의 8살난 딸이 학원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온다. 새엄마는 천만원으로 사건을 무마하자는 원장의 제안을 거절하고 고소를 한다. 검사는 아이에게 같은 질문을 되풀이 하고 지쳐버린 아이는 진술을 달리한다. 그러자 성폭행 강사는 맞고소를 하고 유야무야 돼버린 상황으로 새엄마는 이성을 잃고 자신의 딸을 마구 때린다. 매를 견디지 못한 새엄마의 딸은 아이를 지목하고 새엄마는 아이를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아빠가 어정쩡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낀다. 경찰서에 신고하는 새엄마를 본 아이는 평소 단골이었던 위저드 베이커리로 피신을 하게 된다.

아이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위로를 받는다. 마법사인 점장과 저녁이면 새가 되는 소녀를 통해 자신을 끝없이 변호해야 되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아이는 극도의 긴장으로부터도 이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아이의 오랜 아픔은 마법사인 점장의 품안에서 녹아내리고, 남은 도와줄 수 있으되 자신은 도울 수 없는 마법사는 소년의 위로를 통해 지구의 모든 짐을 홀로 진듯한 고독의 무게에서 벗어나게 된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초반부는 온갖 큰 사건으로 도배돼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속에서도 구병모의 글은 한결같은 냉정함을 유지한다. 만약 조그만치의 호들갑이라도 떨었다면 이 책은 사건들로만 첨절된 책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구병모는 마치 일상에서 늘 일어난 일을 말하듯 그렇게 서술한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는 듯 말이다. 생의 수레바퀴는 어떤 상황에서도 굴러가야 하며 삶의 고결함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상황을 딛고 일어섰을 때 진정으로 이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웅변하듯 이야기한다.

구병모는 또한 역설적인 상황을 통해 새로운 관계의 전형을 제시한다. 그녀는 타인을 통해 받은 상처를 가족간의 사랑으로 치유하는 일반적 현상을 뒤집어 가족에게 받은 참담한 상처가 타인에 의한 봉합되는 과정을 새로운 그림으로 보여준다. 가족의 범위는 이제 그녀에 의해 확장되었다. 소통 부재의 가정에서 말을 잃어버린 아이는 말없이도 대화가 되는 관계를 통해 자신의 언어를 회복한다. 대화란 꼭 말이라는 행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위저드 베이커리`의 특미는 환상과 현실의 자연스러운 결합에 있다. 내가 나비였는지 나비가 나였는지 모르겠다는 장자의 꿈처럼 이 소설도 그렇게 경계를 허물었다. 환상을 통해 아이는 그간의 억압과 족쇄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환상이 자리할 공간이 우리 속에 있을 때 삶은 삭막해지지 않는다. 공허와 삭막함이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도 일부분은 환상에게 아낌없이 넘겨주어야 한다. 우리에겐 단지 일회성의 삶만 허락되었고 빡빡하게 살기엔 우리 삶이 참으로 소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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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정치학
아브람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S. 허먼 & 데이비드 페터슨 지음, 박종일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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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권리란 대등한 힘을 가진 상대들 사이에서만 들먹일 수 있을 뿐이다. 강한 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약한 자는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투키디데스-

대규모의 학살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유사 이래 인간이 자행해 왔던 학살은 부지기수였고, 인간의 역사는 살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성의 입구를 봉쇄해 성 안 사람들을 굶어죽게 하거나 불을 질러 아비규환을 만들거나 한 마을 전체를 도륙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 살륙의 광분이 휩쓸었던 때는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라도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떤 아픔도, 부끄러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통절감이라도 느껴야 하건만 그런 기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학살을 하고서도 이리 당당한 것은 위장된 명분의 정당성 때문이며 단순한 광기에 의해서라기보단 보이지 않는 손의 전략적 지원이 다각도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살륙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배제되거나 증폭되며 대량 살상은 목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진행된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영혼의 불감증도 인식하지 못하는 무감각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학살의 정치학'은 학살의 현재적 상황과 이를 중심으로 정교하게 짜여진 그물망이 구조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실감나게 전해준다. 전세계의 경찰 국가를 자임하며 팍스 아메리카나의 기치를 높이기 위해 미국이 전방위적으로 어떤 행보를 보이는지 노암 촘스키와 에드워드 S.허먼, 데이비드 페터슨은 상세하게 일러준다. 특히 이 책에서 3명의 공저자가 보여주려는 것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벌이는 행태에 언론이 직간접적으로 어떻게 관여되어 있으며 어떤 형태의 편향적 기사로 도움을 주었는지에 대해서이다. 즉, 이 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한 고발임과 동시에 그들의 행위를 교묘하게 덧칠하여 다른 이미지로 변조하고 방조한 언론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질타이다 .

현지 정세를 알 수 없는 일반인들이 가치 판단를 내릴 수 있는 실제적인 근거는 언론의 보도 자료이다. 그 보도 자료를 믿고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 자료에 대한 암묵적 신뢰를 나타내며 이는 언론의 근본적 기능에 대한 신뢰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론이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편파 왜곡까지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직무 유기이며 직권 남용이다.

그런 행태가 벌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언론사의 대주주가 기득권 부류에 속한 자들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기업의 이윤에 맞추어 기사는 일정한 방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으며 세계 정세의 판도에 따라 정치적 편향성을 가질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미국의 이익에 맞춰 실리는 기사들은 사람들의 판단을 오도한다. 현재 미국내 미디어는 학살에 관한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사보다는 자국의 정책에 따라 취합하여 선택된 기사를 싣고 있다. 이 책의 공저자들은 이처럼 추악한 미디어의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라 일러준다.

'학살의 정치학'은 건설적인 학살과 사악한 학살, 몇 가지 자비로운 학살과 가공의 학살, 이렇게 4 부류의 학살로 나뉘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학살을 나누는 기준은 전적으로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느냐 아니냐이다. 따라서 살해된 사람의 수의 많고 적음은 별개의 문제로 치부되고, 중요한 것은 단 몇 천명이라도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면 기사거리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 기사는 과장과 왜곡을 거쳐 신문지면에 올려지게 되며 일거에 주목을 받는다. 학살 현장도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면 실리지만 살륙의 회오리 바람이 휩쓸고 간 현장도 도움이 되지 않으면 기사에 실리지 않을 확률이 높다. 설사 실린다 해도 몇 줄로 요약돼 실리며 기사로서의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미디어는 이제 미국의 신실한 대변인이 되어버렸다.

아울러 이 책에서는 국제 역학관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도 조명해 준다. 국제 질서의 수호라는 명분하에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유엔의 최대 지원국이란 힘을 동원해 유엔의 실질적 주인으로서 전세계를 어떻게 조종하고 있는지도 알려준다. 그리하여 이제 미국이 관여하지 않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유엔이 유엔다운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건 그나마 미국이 동의를 했을 때 뿐이다.

가치중립적이지 못한 기사는 기사로서의 의미를 상실한다. 언론의 힘은 사실적인 보도와 진실의 추구에서 나오는 것이지 화려하게 치장된 거짓글로부터 기인할 수는 없다. 그런 사실을 언론인들이 모를리 없다. 그럼에도 언론은 변질되었고 그들의 눈에는 많은 사람 중의 하나인 죽은 사람들은 자신들과는 별개의 종이 되어버렸다.

타국의 한낱으로 치부되는 이름없는 죽은 자를 향한 관심이 사라질 때 언론은 이미 중환자와 다름없게 된다. 만약 언론이 더 나아가 그들을 마치 없었던 사람인양 치부할 때 언론이 회생할 수 있는 길은 미로가 될지 모른다. 펜의 힘이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이 얼마나 무섭고도 무거운 말인지 이 책은 내게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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