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더 풀 - 개정판 닥터 이라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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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경쾌해지는 작가 오쿠다 히데오만났다. 예전 '스무살 도쿄'로 그와 눈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때 소개해준 주인공은 철딱서니 없는 20대의 대학생이었다. 따라서 이번에도 주인공에 대한 기대는 딱히 없었다. 그냥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살다 살다 주인공이 궁금하지 않은 건 이 책이 처음이다.

하나 이게 웬걸! 가벼움과 모자람만으론 성에 안차는지 오쿠다 히데오 이번엔 변태 의사 선생님을 소개해준다. 이런 사람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니 세상 좋아졌다.

'인더풀'은 5편의 이야기로 짜여져 있다. 당연히 등장 인물도, 상황도 다르다. 근데 한결같이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처음엔 그가 주인공인지도 몰랐다. 계속 읽다보니 이 아저씨만 빠지지 않고 얼굴을 내미는 거였다. 이 사람이 숨겨놓은 주인공이었다니. 히든 카드가 꽤 멋지다.

'인더풀'의 괴짜 주인공을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이라부 이치로. 이라부 종합병원의 후계자이며 현직 신경과 의사다. 희어멀건한 얼굴에 피둥피둥한 몸, 기름기 흐르는 머리와 작달막한 키로 비호감의 모든 조건을 구비했다. 본인은 삼십대라는데 사십도 훌쩍 넘어보이는 인상에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경박함까지 세세하게 갖췄다. 환자 앞에서 의사라면 할 수 없는 얘기만 골라서 하고 가짜일 것 같은 의심스런 얘기만 척척 전한다. 그에게 진료 받으러 온 환자들은 처음에 무척 갈등 한다. 왔으니 어쩔 수 없어 묻는 말에 대답도 하고 얼떨결에 주사도 맞지만 회의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에게 오는 환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에 대해서도 알아야겠다. 첫 등장 인물은 행사 도우미를 하는 야스가와 히로미다. 깍아서 스물살인 그녀는 세상 모든 남자들이 자신만 쳐다본다는 심각한 착각에 빠져있다. 이른바 '과대망상증'에 걸린 거다. 갈수록 증세가 심각해지자 어쩔 수 없이 신경과를 찾는다. 그녀가 찾은 병원은 이라부 종합병원. 깔끔한 1층에 비해 어두컴컴한 지하는 금방 뭐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작심하고 들어가보니 글래머 간호사가 무관심한 얼굴로 자신을 대한다. 그녀 이에 질세라 윗 단추를 슬쩍 푸르고는 허리에 힘을 준채 진료실로 들어간다.

도저히 의사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저렴한 분위기와 툭툭 던지는 말투에 히로미 경악하고 만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의 이라부 당장 작업 들어가고, 그 다음 진료부터 머리에 힘주며 의상은 브랜드로 온 몸을 휘감는다. 근데 희안하게 이 의사, 히로미의 말을 다 받아준다. 말 뿐 아니라 히로미를 따라 다니며 똑 같은 행동을 한다. 어느날 번쩍 정신 들고 보니 그 의사 은근 실력 있었다. 그녀의 병명은 '피해 망상'이다.

두번째 환자는 '지속 발기증'으로 이치로를 찾은 다구치 데츠야다. 부인의 바람으로 3년 전 이혼하고 혼자 사는 돌싱남이다. 당시 이치로 선생도 그와 처지가 비슷했다. 몇 개월 밖에 살지 않았던 전부인은 이혼 소송을 낸 상태였고 이치로의 변태적 행동을 폭로하겠다며 그를 협박 중이었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이치로는 환자 앞에서 온갖 욕을 다하며 전화상으로 싸우는 추태를 보여준다. 데츠야는 이치로에게 오는 모든 환자가 그랬듯이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치고 받는 싸움을 통해 자신의 병이 왜 생겼는지 자각하게 된다. 그는 화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성의 이름으로 감정을 억제했고 그 댓가로 음경강직증에 걸린 것이다. 그가 너무 감정을 억제하니 그의 성기가 대신 감정을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결국 데츠야는 자신의 울분을 사람들 앞에서 토하게 되고 마음이 시원해짐을 느끼게 된다.

세번째 환자는 심신증으로 고생하는 오오리 카즈오. 네번째 환자는 핸드폰 의존증에 빠진 고등학교 2학년생 츠다 유타. 다섯번째 환자는 강박신경증에 걸린 이와무라 요시요다.

참! 두번 째로 중요한 인물이 빠졌다. 육감적 몸매에 환자엔 도통 관심없는 간호사 마유미. 친구가 없다는 사실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되지 않는 그녀는 요즘 세상이 추앙하는 쉬크녀다. 매사가 쿨한 건지 아니면 나른한건지 그녀를 보면 잠이 올 듯하다. 그치만 잠깐씩 등장한다고 그녀를 무시하면 안된다. 그녀는 오쿠다 히데오의 숨겨진 페르소나기 때문이다. 원 페르소나가 우리의 이치로 선생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 사람은 인간에 무한 관심을 표명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귀찮기 한량 없다. 어쩌면 이 둘은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인더풀'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은 하나같이 마음의 병을 갖고 있다. 마음이 힘드니까 일상 생활에서도 어려움이 무척 크다. 그런 그들을 신뢰할 수 없는 언행만 일삼는 이치로가 어떻게 고칠 수 있었을까?

비록 경박함과 비호감으로 똘똘 뭉쳐지긴 했지만 이치로가 환자의 심정을 공감했던 의사였다는 점이다. 누가 들어도 이치에 닿지않는 얘기를 그는 건성으로 듣지 않았고 의례적인 응답도 하지 않았다. 공감의 위력이다. 어쩌면 공감이라기 보다는 너나 나나 다를 것 없다는 생각에서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이치로 역시 '주사 페티시즘'이 있는 사람이니까.

또한 체면치레라고는 모르는 이치로의 행동을 통해 환자들은 대리만족을 했다. 그까짓 체면이 뭔가? 내가 죽게 생겼는데. 체면과 가식에서 벗어나는 건 이제 절체절명의 숙제다. 자기 마음껏 하고 사는 이치로를 통해 그들은 구원받은 느낌이다. 어쩌면 일본 사회의 구조적 체증과 위선에 힘들어하는 보통 사람의 심정을 대변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오쿠다 히데오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그의 얘기는 단순한 에피소드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책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고뇌는 현재적 일본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올 4월 대지진과 같은 국가적 비상 사태속에서도 메뉴얼대로 가는 나라가 일본이다. 자연재해로 인한 숙명적 인생관과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의식이 소시민을 얼마나 옥죄는지는 외부인은 상상도 하기 힘들터다. 그런 답답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오쿠다 히데오는 출구를 열어준다. 그가 열어주는 출구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 가슴이 뻥 뚤리는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칼보다 강하다는 펜의 힘을 그의 소설은 실제로 보여준다. 힘만 있는가? 보너스로 폭탄급 웃음도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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