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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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큼 끊임없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종(種)은 없다. 수 천년의 시간을 두고 역사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정도면 인간에 대한 사료(史料)는 넘쳤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기대는 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종말이 올 때조차도 결코 사그러들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게 처참한 실망을 하고서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기대를 인간에게 갖고 있다. 그만큼 인간은 매혹적인 존재이다. 너무도 빼어난 외모의 인간을 볼 때 우리가 갖게 되는 느낌이나 테레사 수녀와 같이 숭고한 인간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 극과 극처럼 멀어 보여도 결국은 자웅동체이다.

이 해결할 길 없는 문제에 대해 요시다 슈이치는 '누가 악인인가'라는 질문으로 인간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미스테리 형식으로 짜여진 이 소설은 어느 으시시한 고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기점으로 시작한다. 살인자와 죽은 여자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살인자 유이치는 근사한 외모에 어눌한 입을 가지고 있는 일용직 노동자다. 그는 어릴 적 부터 외갓집에 맡겨져 외조부모의 양자로 입적돼 살고 있다. 그의 엄마는 자식을 친정에 맡긴 후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 상처 때문인지 유이치는 누구와도 긴 얘기를 나눌 수 없고 그가 하는 말은 늘 한 두 단어로 그치고 만다.

피살자 요시노는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알게 된 남자들과 문자를 주고 받으며 때론 만나기도 하는 등 낮과 밤이 다른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정상적인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그녀는 남자들을 만나면 돈을 요구하며 창녀와 같은 행동을 스스럼없이 한다. 그러나 그녀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길거리에서 만나 호감을 표시한 대학생 마스오뿐이다. 불행히도 그에게는 일체의 연락도 없고, 요시노는 같이 사는 직장 동료들에게는 마치 마스오와 사귀는 것처럼 거짓말을 한다. 어느 늦은 저녁 그를 만나러 간다며 나한 후 요시노는 피살체로 발견된다.

 

요시노를 죽인 사람은 유이치지만 그녀의 마음은 죽기 전 이미 손상돼 있었다. 어쩌면 상처받은 자존심이 그녀의 죽음을 불러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죽음의 방조자는 마스오다. 유이치를 만나러 간 그 시각 우연히도 마스오는 그 장소에 있었다. 요시노는 마스오만 눈에 보일 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유이치에게는 관심도 없다. 약속이 있다며 돌아가라 차갑게 말하곤 마스노의 차에 훌쩍 타버린다. 그러나 요시노의 경박한 행동들이 추해 보이던 마스오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국도의 외진 곳에 걷어차 버리고 떠난다. 뒤쫓아온 유이치는 그녀가 머리를 심하게 부딪친 것 같아 도와주려하지만 요시노는 유이치에게 화풀이를 하고는 자신을 성폭했다며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한다. 요시노의 폭언은 계속되고 유이치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만다.

미쓰요는 한 쇼핑센터의 남성복 매장에 근무하는 서른 살의 독신녀다. 사귀는 사람도 없이 쌍동이 여동생과 매장 근처의 조그만 주택가에 살고 있다. 평범한 일상은 그녀의 삶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삶이 너무도 쓸쓸하기만 하다. 이 조그만 소읍에서 결혼하기란 쉽지 않다. 쓸만한 사람은 다 유부남이고 만남 자체는 이미 어려워졌다. 아무도 몰래 가입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예전 한 두번 문자를 교환한 유이치를 만나볼 계획이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이 그녀의 일생을 바꿀 줄은 누구도 몰랐다. 유이치와 미쓰요의 만남은 진작에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랬다면 살인은 없었을지 모른다.

 

수사망은 좁혀지고 둘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만다. 똑같은 육체적 욕망이 한 사람에게는 살인을, 다른 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불러왔다. 여기서 요시다 슈이치는 질문을 던진다. 마스오에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런 존재였던 요시노가 다른 누군가에는 생의 끈을 잡게 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40대의 학원 강사 하야시에게 요시노의 미소는 너무도 따스했다. 그 뿐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요시노를 손가락질 해도 요시노의 부모에게 그녀는 단 하나 뿐인 사랑스런 딸이었다.

 

질문은 연이어진다.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해 인간이 보여야 할 반응에 대해서이다. 살인사건으로 마스오는 용의자로 지목돼 한동안 힘든 시간을 겪는다. 도망 아닌 도망을 가야했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게 두려운지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다행히도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제 자신은 떳떳하다는 생각에 마스오는 요시노와의 관계를 친구들에게 떠벌리며 조롱한다. 그 부모는 세상의 온갖 비웃음과 딸의 허망한 죽음으로 생을 포기하다시피 하는데도 그는 면죄부의 해방감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마스오의 행동은 친구들의 마음에도 구역질을 불러일으킨다.

요시노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보다 딸을 고속도로의 한 구석에 내팽겨치고 가버린 마스오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마스오를 만나면 죽일 작정으로 그의 행방을 쫓는다. 그러나 젊은 혈기는 당할 수 없었고 오히려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마스오 친구의 도움으로 마스오가 자주 가는 장소를 알게 된 그는 자신을 우스꽝스런 노인네로 묘사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들고다니던 스패너를 마스오의 발 아래 던지고 나온다. 소중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에게 부재의 슬픔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살인'에서 보여지는 요시다 슈이치의 탐색은 구체적이며 실증적이다. 그가 보여주는 한 인간에 대한 그림은 존재에 대한 평가가 결코 단선적일 수 없음을 비춘다. 일회용 만남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도회적 타락의 등식으로 성립되는 것만도 아님을 전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각자의 외로움을 탔던 것이다. 20대의 육체적 욕구가 도화선이 됐을지언정 욕망의 확인을 위해 육체만 던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결말에서 들려주는 유이치의 이야기는 요시다 슈이치가 실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닐지 모르겠다.


그날 밤, 이시바시 요시노씨가 "경찰에 신고할 거야!"라고 소리쳤을 때, 내가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주장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이 세상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게 두려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그런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일을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순순히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도망치려 비겁한 행동을 하고 만 거죠.........

그렇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젠 말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인범이라고. 요시노씨를 죽이고 마고메씨를 데리고 도망친 살인범이라고.....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사람이 다른 인간에게는 지순한 사랑을 부어준 동일인임에 비극적 현실은 역설적으로 대비된다. 또한 외면하고픈 행실로 죽음을 당한 한 인간도 다른 이에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는 생의 부조화는 이 책을 비감으로 가득차게 했다. 과연 악인은 누구인가? 두 축이 만나는 교차점에 불만 붙으면 누구도 악인이 될 수 있고, 그 상황만 아니라면 누구도 사랑스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이 책은 각인시키듯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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