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지음 / 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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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읽고 싶었다. 글의 톤은 가볍지만 전체 배경은 진지하고, 그 위에 산뜻함과 설레임을 고명처럼 곁들인 글. 이런 글을 찾았던 것 같다. 그 글이 은희경의 산문집으로 나타날 줄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지난 여름, 표지가 뿜어내는 찬란한 유혹에 빠져 예약 판매로 사놓고 조금 밖에 읽지 못한 책이다. 이번에 다시 보니 조금 밖에 읽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작가 서문 세 페이지에 걸려, 본문에 진입도 못했던 책이다. 이렇게 상큼한 책을 책장에 넣어두고 있었다니.....아. 깝. 다.

 

이 책은 은희경과 만나는 두 번째 글이다. '마이너리그'로 만난 그녀의 글은 꽤 재미있었고, 그 책으로 은희경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지만 계속된 만남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록 글을 읽지 않았지만 내 관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것은 꿈이었을까',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소년을 위로해 줘'등 제목은 그런대로 꿰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보니 진작 그녀의 책을 읽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든다. 그랬다면 그녀의 문학적 감수성이 내 것이 될 수도 있을 텐데, 하는 뻔뻔한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며 나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걸 깨닫고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든다. 문학에서의 그녀는 빈틈없고 진지하지만 사적 영역에서는 엉성하고 덜렁대고 실수 많고, 뭐 그런 부분이 나와, 아니 내가 닮았다는 거다. 이렇게 똑똑한 사람도 그런 부분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는 나를 본다.....못. 났. 다.

 

이 책의 대부분은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읽었다. 밤이 만들어 내는 정취 속에서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건물들, 비어있는 옆자리가 주는 안도감, 기차 안의 따뜻한 기온이 주는 여유로움등, 모든 것이 맞물린 고즈넉함 가운데 이 책을 읽었다. 작가의 감정과 내 감정이 하나가 되는 느낌 속에서 읽는 맛은 특별했다. 은희경의 말대로 시간은 절대로 균일하지 않다. 

 

이 책은 2010년 1월부터 7개월 동안의 일들을 풀어놓은 글이다. 그러니까 은희경의 내밀한 삶을 엿볼 수 있는 글이란 뜻이다. 산문집이라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긴장과 이완이 있는 삶이 최적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가. 소설이라는 긴장과 산문집이라는 이완 사이의 그녀를 볼 수 있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삶을 보며 이런 삶을 나도 꿈꾸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슬쩍 끼어들었다. 여행을 훌쩍 떠난다거나, 주거지를 필요에 의해 옮긴다거나, 아니면 기간을 두고 외국에 잠시 체류한다거나, 다 이동과 관련된 것인데 그 부분이 제일 부러웠다.

 

은희경의 글은 참 상큼했다. 자신의 감상을 톡톡 튀는 사이다 방울처럼 적고 있었다. 이렇게 예쁘게 쓸 수 있다니, 그 감성을 어떻게 유지해 왔을까. 은희경의 나이대에 이런 감성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사실을 확인하고 놀란다. 그녀의 글은 내가 느끼고 싶었으나 느끼지 못했던 것들, 표현하고 싶었으나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표현해 놓았다. 상쾌하고 가벼운 문장과 그 문장에서 나오는 향기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 글에 대한 명확한 구분과 정의, 풀어짐과 조여맴 사이에서의 조절, 그리고 사물을 향한 남다르고도 각별한 시선을 갖고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그 남다름이 그녀안에 생기기까지 그녀가 겪었을 혼돈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글 옆 여백에 '감성이 발달했다는 것은 일종의 저주가 아니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글을 적어보았다. 덧붙여 '내가 원했던 글, 한국에서 보고 싶었던 글이다.' 라고 적었다. 그녀의 글은 상당히 매혹적이었다. 그래서 손을 놓을 수 없었다. 한 번 읽고 소모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글이라 했지만 그 소설을 쓴 사람의 기운이 어디 갈까. 

 

트위터, 고독, 소설

 

나 아직 안 자. 하나둘 꺼져가는 불빛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혼자 중얼거리지 않아도 되는구나, 여기.

 

나의 첫 책에 쓰기를, '그 외로움이 소설을 쓰게 했을까. 세상이 내게 훨씬 단순하고 너그러웠으면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인생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만약 그 때 트위터가 있었으면 나는 고독을 견뎌내고 또 소설가가 안 되었을까 아닐지도 모른다. 이곳에서의 고독은 해소되는 게 아니다. 서로의 고독끼리 다정해져 고독한 채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해준다. 너도 나처럼 고독한 존재라는 걸 깨닫는 것이 고독의 본질이고, 나는 그것을 소설로 써보고 싶어했을 것 같다. 지금처럼. 

 

그래도......죽는 건 무서웠으니까, 죽음보다 한 단계는 위일 테니 나은 거 아니냐고 위안하며 고독을 견디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치열한 잡념들이 나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했다고 생각해왔다. 트위터를 하며 문득, 이런 세계가 있었으면 덜 고독했으려나.

 

이런 식으로 고독이 소비되면 예술의 탄생에 지장이 있겠구나. 그 다음 생각은......어? 요즘 좀 나아졌다고 고독을 만만하게 보네......

 

작년 은희경이 '소년을 위로해 줘'를 일일 연재 하며 트위트에 올렸던 글의 전문이다. 그녀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것 같아 글 전편을 올려보았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사소한 일상과 변덕스러운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솔직함을 넘어 감상적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감상적이라지만 그녀가 염려한 감정의 과잉은 찾기 힘들었으며 설사 있다 해도 충분히 사랑스러워서 눈감아 줄 만했다. 

 

마음을 쏘옥 빼앗는 문장과 순간순간 빛나는 문학적 감수성이야말로 이 글에서 맛볼 수 있는 은희경 글의 특징이다. 만약 그녀가 이 산문집을 내지 않았다면 그녀의 가벼움과 유연성, 엉뚱함과 독특함 어디서 알 수 있겠는가. 이 산문집은 그간 문학의 성에 갇힌 외로운 공주를 세상으로 밀어넣는 첫 작업이 되었다. 베일로 가려진 신비함의 옷을 한거풀 벗은 모습이 오히려 정겹다. 이 경험을 통해 그녀의 다음 소설은 좀 더 편안한 모습을 하고 나올지 모르겠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그 기대만으로도 나는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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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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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는 자신도 모르게 묻어나는 성별 특징이 있다. 학습이나 관습 때문이 아닌 성의 차이 때문에 드러나는 특성들은 숨길래야 숨겨지지 않고 감출래야 감춰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구별을 모호하게 하는 작가가 있다. 바로 김려령이다. 만약 그녀의 약력을 접하지 않고 '완득이'를 읽었다면 필연 남자 작가의 글로 알았으리라. 어디서 그런 작법을 익혔는지 그녀의 글은 능청스럽다. 미끼를 툭하고 던지며 모른 체 하는 그녀의 눙치는 솜씨 또한 만만찮다. 숨겨놓은 보따리를 풀 듯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녀의 글 재간은 여간해선 흉내내기 힘들다. 그녀도 자신의 그런 재능을 알고 있는지 책 여기저기에 슬쩍슬쩍 맛보기를 깔아둔다. 우리는 그녀가 안내해 주는 길로만 따라가면 된다. 궁시렁대며 따라가든지 아니면 얌전히 따라가든지 그건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완득이'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쓰여진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이 흔히 갖는 다분히 회고적인 색채와 간간이 보여지는 비장미,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지난 추억등이 이 책엔 없다. 통속적 스토리의 전개를 기대했다면 초장에 깨는 것이 좋다. 이 책은 우리 사회가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로 얼개가 짜여져있다. 도시 빈민과 장애인, 국제 결혼과 이주 여성, 홀부모 가정등 문제적 상황으로 보여지는 이야기들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그녀는 이런 위험한 선택을 했을까.

'완득이'에는 하나같이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엄마가 누군지도 모른채 8할을 시간의 이름으로만 키워진 천부적 쌈꾼 도완득. 생색내기를 밥 먹듯 하며 학생들보다 더 욕을 잘하는 조폭 담임 똥주 이동주 선생. 후반부나 돼서야 이름이 등장하는 완득이의 난쟁이 아버지 도정득. 외모만 충실한 말더듬이 가짜 삼촌 남민구. 입이 걸기론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동네 욕쟁이 아저씨 박두식.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데 완득이의 매니저를 자처하며 완득이를 따라다니는 여자 친구 정윤하. 완득이를 커서야 만나게 되는 이름 모를 베트남 엄마등.

똥주 선생과 정윤하를 제외하곤 하나같이 삶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유쾌할 수 없다. 무거운 주제의식을 산뜻하리만치 가볍게 터치하는 김려령의 글 솜씨가 놀랍다. 김려령이 주인공으로 설정한 완득이는 난쟁이 아버지와 베트남계 엄마를 부모로 둔 아이다.
완득이네 집은 다문화가정에 속하지만 엄마는 완득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아빠 곁을 떠나버려 완득이는 엄마 얼굴도 본 적 없고 엄마에 대한 얘기도 들은 적 없으니 오히려 다문화가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편부 가정에 가깝다. 키 작은 어른인 완득이 아버지는 어린 아들과 살기 위해 카바레의 바람잡이를 하며 생계를 꾸려간다. 카바레가 콜라텍으로 전업하며 일자리를 잃게 된 아버지와 이웃 삼촌 남민구는 시골 장을 떠돌게 되고 홀로 남겨진 고등학생 완득이는 옆집 옥탑방에 사는 똥주 선생의 반갑지 않은 간섭하에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이런 완득이에게 어느날 사랑이 찾아온다.
눈치 하나로 세상을 살아온 전력과는 달리 완득이는 사랑에는 젬병이다. 정윤하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첫 날, 똥주 선생이 있는 구치소로 윤하를 데려가 함께 면회한 후 아르바이트 때문에 가야한다며 팽겨쳐 두고 가버린 완득이다. 사랑에 둔감한 완득이. 알아서 매를 번다. 이 일로 윤하는 완득이와 말을 안하고 완득이는 신경이 쓰여 견딜 수 없다. 글을 읽을 때 마다 김유정의 '동백꽃'에 나오는 그 순박하달지 어리버리하달지 한 남자주인공이 떠오른다. 남자들은 원래 그렇게 늦된가.

그 후 완득이는 똥주 선생이 임시 전도사로 있는 교회에서 윤하와 화해를 하게되고 윤하는 킥복싱대회를 앞둔 완득이의 매니저를 자청한다. 귀찮은 척 하지만 완득이의 기분은 매우 좋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행복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이 같은 상황을 알게 된 윤하의 엄마는 가만 있을 수 없게 되고, 완득이를 찾아와 만나지 말아달라 간청한다. 자기는 뚱뚱한 애는 싫어한다며 완득이 알았다 한다. 비록 지기위해 나가는 대회였다지만 그 후부터 영 운동에 몰입이 안된다.

한편, 똥주 선생의 배려로 모자 상봉을 하게 된 완득이와 엄마는 간간이 만남을 이어간다. 틈 날 때 마다 싸오는 도시락이 알고 보니 아빠를 향한 엄마의 마음이었음을 완득이는 뒤늦게 알게 된다. 그 많던 눈치 이럴 땐 어디로 갔을까. 생계를 위해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하던 아빠와 난닝구 삼촌은 더이상 함께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이별을 고한다. 삼촌의 자리가 의외로 컸던지 아빠는 힘들어하고, 부자 아버지 덕에 경제적 여유가 있는 똥주선생의 배려로 아빠는 똥주선생이 매입한 교회의 한 곳에 댄스 교습소를 연다.

이제 엄마도 집 근처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고, 윤하는 엄마의 감시를 피해 시간 되는대로 완득이를 만나며 종군기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입시를 준비한다. 완득이에게 유일한 스승 같았던 킥복싱 관장은, 완득이의 정식 데뷔날 TKO패로 누워있는 완득이의 모습을 지켜본 후 원래 계획대로 강원도행을 택한다.

소설 '완득이'는 희망의 부재속에 사는 사람들이 좋은 만남을 가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런 만남으로 최종 목적지가 어떻게 달라질수 있는지를 그려주는 책이다. 김려령은 이 모습을 통해 결국 인간 안에서만 희망을 찾을 수 있음을 넌지시 비추고 있다. 같은 공간, 다른 현실의 자리에 있었던 윤하와, 진정한 만남을 위해 자신을 낮춰버린 똥주 선생과의 조우는 더 이상 완득이를 외로움에 파묻히지 않게 했고, 스스로 변화를 선택하며 양지를 향해 나가는 자리로 이끌게 되었다. 이제 완득이는 하루도 흘려보내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거창하거나 대단하지 않지만 평범한 하루가 모여 큰 하루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은 것이다.

이런 교훈적 주제가 도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건 생생하고 감칠맛 나게 전달하는 김려령의 글 조리법 때문이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묵직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김려령은 아무렇지 않은듯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 무게에 눌릴만도 하련만 그런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드물게 만나 보는 대형 여성 작가다. 물론 이 책에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갑자기 등장하는 베트남 엄마와, 엄마가 아빠를 떠나게 된 직접적 이유는 개연성도 떨어질 뿐 아니라 신파의 냄새도 물씬 풍긴다. 하지만 그 정도는 눈 감아 주어야 할 것 같다. 앞으로도 그녀가 풀게 될 이야기 보따리를 보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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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번 산 고양이 비룡소의 그림동화 83
사노 요코 글 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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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만남이었지만 기억에 남아 내 안 어딘가에 깊숙히 박힌 그런 책이 내게도 있다. 너무 좋아 가슴에 꼭 껴앉고 싶지만 그런 행동이 이 책에 맞지 않을 것 같아,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마치 쳐다보지 않은 듯 하며 소중히 마음 속으로만 간직했던 책 말이다. '100만번 산 고양이'는 내게 그런 책이다.

십여 년 전 적지 않은 나이에 다시 학생이 되어 신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 때 동기의 소개로
목동의 한 사설 단체에서 아이들에게 독서 지도를 하게 되었다. 당시 내 나이와 여러 상황들은 나를 갈등으로 밀어넣었지만,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문학의 아름다움과 내 인생의 새로운 도전이 좋아서 차비와 밥값밖에 안되는 벌이였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고, 또한 내 안의 갈등도 그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였다. 특히 신학적 원리가 문학속에도 맞닿아 있다는 그 사실이 내겐 너무 경이로웠다. 아이들을 만나며 가르치는 게 정말 기뻤다.

내 상황은 측은하기 짝이 없었어도 내 희열은 대단했다. 지금도 그 때가 내게는 가장 좋았던 시절로 남아있다. 그 때 만난 책이 '100만번 산 고양이'다. 사노 요코라는 작가의 글과 그림은 간단하고도 단순했다. 그런데도 그 여운은 퍽이나 길었다.

100만 번이나 살았고 100만 번이나 죽었던 고양이는 매사에 냉소적이며 자신만을 사랑했던 이기적인 고양이었다. 자신의 주인이 지극히 사랑해 주어도 매사가 나른하고 귀찮기만 했다. 이 고양이는 주인 자체를 부정하는 듯 그렇게 무심했고 늘 비극적으로 죽었다. 주인들은 자신이 극진히 사랑한 고양이의 죽음에 목놓아 울었고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좋은 곳에 잘 묻어준다. 늘 이런 생을 반복했던 고양이에게 그깟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드디어 고양이에게도 누구의 고양이가 아닌 자기만의 고양이가 되는 시간이 왔다. 고양이는 도둑 고양이가 되어 마음껏 즐기며 자신의 멋진 얼룩무늬를 자랑한다. 주변은 고양이의 신부가 되려는 암고양이들로 늘 시끄러웠다. 이 고양이는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했고 자신밖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새하얗고 예쁜 암고양이를 만나고 부터는 자신도 모르게 변하게 된다. 자랑도 하지 않은채 오로지 그녀 곁에 있는 즐거움만 느낄 뿐이다. 귀여운 새끼도 낳고 키우며 고양이는 자신보다 그들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식들은 도둑고양이로 성장해 다 제 길로 가고 이제 둘만 남았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할머니가 된 하얀 고양이는 어느날 조용히 눈을 감게 되고 고양이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며칠이나 슬픔에 겨워하던 고양이도 결국 눈을 감게 되고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게 된다.

사노 요코는 사랑이 무엇이며 사랑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100만번이나 산 고양이'를 통해 가까이 다가간다. 백만 번 산 고양이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서 처음 맛보는 감정들을 겪게 된다. 그간 백 만번이나 살고 죽었지만 고양이의 생은 고통스럽고 지리할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스런 죽음조차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죽음은 또다른 생의 시작이었고 그 생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기에 고양이는 설레임이나 기대를 배울 수 없었다. 사랑을 몰랐기에 주인을 이해할 수 없었고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은 고양이를 바꾸어 놓았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곁에 있는 것만으로 기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 일때도 혼자가 아니었고 둘이 있으면 기쁨은 더 커졌다.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생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별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몸으로 겪으며 그 길었던 생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생명체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자신의 최종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고양이는 드디어 생으로부터 놓이게 되었고 사랑하는 하얀 고양이와 함께 마침내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그 시절 문학의 품 속에 있지 않았다면 내 인생에 이처럼 아름다웠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책을 친구 삼아 지내며 어린 친구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내가 가졌던 어떤 시간들보다 소중하게 내 가슴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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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서광의 생산적 책읽기 50 - 미래를 위한 자기발전 독서법
안상헌 지음 / 북포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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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의 책은 한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한 인생과의 조우를 의미한다.

책을 통해 한 사람의 생각을 만나고, 그의 생각과 교류하는 가운데 어느덧 소통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과정은 우리의 내면을 확대하며 사유를 확장한다.

책은 미래를 향해 던지는 어망이 되기도 한다.
그 안에는 바다에 되돌려보내야 할 작은 물고기도 있고, 살아 펄떡펄떡 튀는 물고기도 있다.
적당한 크기의 싱싱한 물고기는 바다 바람 가득한 배 안에서 회를 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야한다.
입안에 퍼지는 그 생명력 넘치는 쫀득거림은 살아있음의 희열도 가져다 준다.
즉석에서 먹는 이 싱싱한 회처럼 어떤 책은 시의적절하게 필요를 채워준다.

그러나 아무리 아쉬워도 당장 먹을 수 없는 것도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삭히어 눈물을 흘리며 먹어야 하는 홍어회처럼 시간이 걸려야 내 것이 되는
책도 있다.
책 속의 생각이 내 안으로 옮겨오기까지, 그래서 내 것이 되기까지 걸려야 하는 시간이
만만치 않게 긴 책 말이다.
하지만 체화되고 체득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수록 책의 가치는 높아진다.
놀라운 역설이다.

이런 책들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소화하며, 잘 선택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안내서가 있다.
안상헌의 '생산적 책 읽기 50'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 속도의 시대에 아날로그적 행위의 전형인 책 읽기의 의미를
설명하며 친절히 이곳저곳을 소개해준다.

안상헌은 책 속에 우리의 미래가 있고, 책 읽기는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알찬 투자라 말한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책 읽기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니......
그는 피터 드러커의 예를 들며 이제는 기업만이 아니라 개인도 브랜드를 가져야 한다고 뀌뜸한다.
이미 도래한 개인 브랜딩의 시대에, 이곳에서 각자의 닉네임을 가지고 자신만의 세계를
펼치고 있는 우리들이야말로 개인 브랜딩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근거만으로도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야 할 자격은 충분하겠다.


특히 글쓰기와 관련된 그의 표현은 제법 재미있고 공감이 간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글을 쓰는 순간만은 머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이
손이 혼자서 글을 쓰고 있다고 느껴진다고 한다.
펜을 움직이거나 자판을 두드리는 우리의 손동작이 두뇌를 자극하고 생각을 독려하기 때문이다. ..........
머릿속의 내용들이 정리되어야 글을 쓰는것이 아니라 글을 써야 머릿속의 내용들이 정리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와 반대로 생각해왔다."

우리 안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연이어 글까지 쓰는 것이 여러 모로 유익하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한다.
쓰기야말로 우리 인생의 자취며 생각의 흔적이자 노력이 담긴 보물이라는 안상헌의 말은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글이 가진 생래적 특성을 잘 표현해 냈기에 가슴에 와닿는다.
쓰기에 이런 의미가 담기지 않았다면 왜 우리가 긴 시간을 들여 글을 쓰고 고민하겠는가.

그의 언급 중에 신선했던 것은 우리가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글이다.
교양도 좋지만 그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읽어보라 권유했다.
한 가지에 정통하면 다른 것들의 본질도 이해하기 쉽다며 제대로 된 한 분야의 구축을
그는 거듭 강조했다.

또한 스스로 어떤 정의를 내려볼 것을 권유했다.
많은 작가들이 은유법을 통해 사물을 정의했으며 그 정의에 따라 실제로 그렇다 믿고
살아왔다며, 사람은 정의를 통해 가치관을 만들고 삶을 살아간다 했다.
마음에 담아둘만한 얘기였다.

책 한 권 읽었다고 우리가 금새 달라지지는 않는다.
과거에 살아왔던 방식대로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높다.
그러나 설사 그럴지라도 꾸준히 책을 읽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 없을 것이다.
이는 변화를 위해 우리가 성실하게 노력할 것이라는 말을 함의한다.

그렇다.
책 읽기는 단순한 독서 행위가 아니며 그에 머물수도 없다.
이는 본질적으로 자아의 변화와 확대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에게 책 읽기는 남은 인생의 좋은 벗이 될 것이며
더 크게는 구도적 여정으로 치환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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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동양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9
일연 지음, 최호 옮김 / 홍신문화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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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역사는 그 땅에 살고 있는 한 민족의 이야기다. 어떤 민족을 알려면 그들의 역사를 보면 된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 민족의 영욕과 성쇄가 담긴 그 이야기는 그들을 하나 되게 하는 강력한 끈이자 구심점이다. 역사는 민족의 지난날을 알려줌과 동시에 내일의 밑자리가 된다. 따라서 역사를 모르고는 그 민족의 내일을 말할 수 없으며 민족의 자존 또한 세울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의 역사를 알려주는 역사서는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하며 친근하게 대해야 한다. 역사는 결국 우리의 뿌리이자 근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대사를 알려주는 역사서에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가 있다. 두 책은 우리 고대사의 양대 산맥이 되는 역사서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정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면 일연의 삼국유사는 야사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다. 우리 고대사에 대한 기록은 이 두 사서를 제외하고는 현존하는 사료가 없다시피해 우리 역사를 알 수 있는 길이 그리 많지않다.

물론 우리 역사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역사서인 유기는 100권이나 되었고, 백제는 박사 고흥이 서기를 편찬하였으며, 신라는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그 밖의 역사서들도 있어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편찬했을 때 인용했다는 표현이 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참 안타깝다. 그래서 우리의 고대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일본서기 등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를 일연이 저술한 동기는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거나 누락된 사항과 미비점을 보완하는데 있었다. 낱말 그대로 유사는 이전의 책들에서 빠지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연은 김부식이 가지고 있는 사대주의적 편견을 바로 잡음과 동시에 삼국사기에 의도적으로 배제된 우리의 역사를 집어넣어 풍성하고 역동감있게 그려 놓았다.

일연은 우리 역사를 고조선까지 끌어올려 역사의 유규함과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읽는 이들이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고려는 몽고에 의해 휘둘리고 있었고 백성들의 피폐함은 이루 말 할수 없었다. 일연은 자신의 저술을 통해 사람들의 아픈 마음이 위로 받으며 역사의 긴 서사를 통해 그들이 미래의 소망을 갖기 원했다. 또한 역사를 통한 치유와, 이 모든 것들이 지난 역사처럼 지나가리란 걸 알기 바랐던 노승의 소망은 당대 뿐 아니라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유효하다. 그 또한 지나갔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5권 9편으로 되어있다. 글의 구성은 시대적 흐름을 따라 이어지고 있으며 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거나 눈물이 날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그 글엔 민초를 향한 노승의 따스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있다.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깊은 밤의 시간을 역사와 함께 보낼 수 있도록 격려한다.

책을 읽다보면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들의 원천이 바로 여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많이 들었고 또 보았던 동화와 역사의 이야기가 일연의 손끝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에 놀랍기만 하다. 그러니까 나는 삼국유사를 읽지 않았지만 어설프게나마 다른 책을 통해 조금씩 맛보고는 있었던 것이다.

책은 일연의 글을 최호가 번역한 것으로 원문과 비교해 보면 읽는 맛이 제법 괜찮다. 최호는 운을 살리기 위해 원문에 추임새와 같은 말을 넣었다. 끊어 읽기 한결 쉽고 내용을 다 알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어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무수히 들었지만 현실감이 없었던 삼국유사에 대한 실체감이 확연하게 다가온다. 천 여년전 한 노승의 나지막한 음성이 조부모의 음성처럼 정겹다.

제 3권 흥법편부터 삼국유사는 거의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아무래도 신라나 고려가 불교를 국교로 하였고 민초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가장 큰 소망도 종교에 있음을 믿었던 승려라 그렇지 않았나 싶다. 우리 역사에 불교가 남긴 흔적들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경로를 따라 문화 유산으로 남게 되었는지 일연은 찬찬히 되짚어준다.

역사는 시간을 품고 있기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시간 속에 숨겨진 놀라운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역사가 남긴 흔적들을 주의해 보고 이름없이 살다간 사람들의 신음을 읽어낼 때 우리는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야말로 일연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가 아닐런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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