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지음 / 달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런 글을 읽고 싶었다. 글의 톤은 가볍지만 전체 배경은 진지하고, 그 위에 산뜻함과 설레임을 고명처럼 곁들인 글. 이런 글을 찾았던 것 같다. 그 글이 은희경의 산문집으로 나타날 줄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지난 여름, 표지가 뿜어내는 찬란한 유혹에 빠져 예약 판매로 사놓고 조금 밖에 읽지 못한 책이다. 이번에 다시 보니 조금 밖에 읽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작가 서문 세 페이지에 걸려, 본문에 진입도 못했던 책이다. 이렇게 상큼한 책을 책장에 넣어두고 있었다니.....아. 깝. 다.

 

이 책은 은희경과 만나는 두 번째 글이다. '마이너리그'로 만난 그녀의 글은 꽤 재미있었고, 그 책으로 은희경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지만 계속된 만남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록 글을 읽지 않았지만 내 관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것은 꿈이었을까',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소년을 위로해 줘'등 제목은 그런대로 꿰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보니 진작 그녀의 책을 읽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든다. 그랬다면 그녀의 문학적 감수성이 내 것이 될 수도 있을 텐데, 하는 뻔뻔한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며 나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걸 깨닫고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든다. 문학에서의 그녀는 빈틈없고 진지하지만 사적 영역에서는 엉성하고 덜렁대고 실수 많고, 뭐 그런 부분이 나와, 아니 내가 닮았다는 거다. 이렇게 똑똑한 사람도 그런 부분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는 나를 본다.....못. 났. 다.

 

이 책의 대부분은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읽었다. 밤이 만들어 내는 정취 속에서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건물들, 비어있는 옆자리가 주는 안도감, 기차 안의 따뜻한 기온이 주는 여유로움등, 모든 것이 맞물린 고즈넉함 가운데 이 책을 읽었다. 작가의 감정과 내 감정이 하나가 되는 느낌 속에서 읽는 맛은 특별했다. 은희경의 말대로 시간은 절대로 균일하지 않다. 

 

이 책은 2010년 1월부터 7개월 동안의 일들을 풀어놓은 글이다. 그러니까 은희경의 내밀한 삶을 엿볼 수 있는 글이란 뜻이다. 산문집이라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긴장과 이완이 있는 삶이 최적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가. 소설이라는 긴장과 산문집이라는 이완 사이의 그녀를 볼 수 있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삶을 보며 이런 삶을 나도 꿈꾸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슬쩍 끼어들었다. 여행을 훌쩍 떠난다거나, 주거지를 필요에 의해 옮긴다거나, 아니면 기간을 두고 외국에 잠시 체류한다거나, 다 이동과 관련된 것인데 그 부분이 제일 부러웠다.

 

은희경의 글은 참 상큼했다. 자신의 감상을 톡톡 튀는 사이다 방울처럼 적고 있었다. 이렇게 예쁘게 쓸 수 있다니, 그 감성을 어떻게 유지해 왔을까. 은희경의 나이대에 이런 감성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사실을 확인하고 놀란다. 그녀의 글은 내가 느끼고 싶었으나 느끼지 못했던 것들, 표현하고 싶었으나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표현해 놓았다. 상쾌하고 가벼운 문장과 그 문장에서 나오는 향기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 글에 대한 명확한 구분과 정의, 풀어짐과 조여맴 사이에서의 조절, 그리고 사물을 향한 남다르고도 각별한 시선을 갖고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그 남다름이 그녀안에 생기기까지 그녀가 겪었을 혼돈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글 옆 여백에 '감성이 발달했다는 것은 일종의 저주가 아니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글을 적어보았다. 덧붙여 '내가 원했던 글, 한국에서 보고 싶었던 글이다.' 라고 적었다. 그녀의 글은 상당히 매혹적이었다. 그래서 손을 놓을 수 없었다. 한 번 읽고 소모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글이라 했지만 그 소설을 쓴 사람의 기운이 어디 갈까. 

 

트위터, 고독, 소설

 

나 아직 안 자. 하나둘 꺼져가는 불빛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혼자 중얼거리지 않아도 되는구나, 여기.

 

나의 첫 책에 쓰기를, '그 외로움이 소설을 쓰게 했을까. 세상이 내게 훨씬 단순하고 너그러웠으면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인생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만약 그 때 트위터가 있었으면 나는 고독을 견뎌내고 또 소설가가 안 되었을까 아닐지도 모른다. 이곳에서의 고독은 해소되는 게 아니다. 서로의 고독끼리 다정해져 고독한 채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해준다. 너도 나처럼 고독한 존재라는 걸 깨닫는 것이 고독의 본질이고, 나는 그것을 소설로 써보고 싶어했을 것 같다. 지금처럼. 

 

그래도......죽는 건 무서웠으니까, 죽음보다 한 단계는 위일 테니 나은 거 아니냐고 위안하며 고독을 견디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치열한 잡념들이 나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했다고 생각해왔다. 트위터를 하며 문득, 이런 세계가 있었으면 덜 고독했으려나.

 

이런 식으로 고독이 소비되면 예술의 탄생에 지장이 있겠구나. 그 다음 생각은......어? 요즘 좀 나아졌다고 고독을 만만하게 보네......

 

작년 은희경이 '소년을 위로해 줘'를 일일 연재 하며 트위트에 올렸던 글의 전문이다. 그녀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것 같아 글 전편을 올려보았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사소한 일상과 변덕스러운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솔직함을 넘어 감상적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감상적이라지만 그녀가 염려한 감정의 과잉은 찾기 힘들었으며 설사 있다 해도 충분히 사랑스러워서 눈감아 줄 만했다. 

 

마음을 쏘옥 빼앗는 문장과 순간순간 빛나는 문학적 감수성이야말로 이 글에서 맛볼 수 있는 은희경 글의 특징이다. 만약 그녀가 이 산문집을 내지 않았다면 그녀의 가벼움과 유연성, 엉뚱함과 독특함 어디서 알 수 있겠는가. 이 산문집은 그간 문학의 성에 갇힌 외로운 공주를 세상으로 밀어넣는 첫 작업이 되었다. 베일로 가려진 신비함의 옷을 한거풀 벗은 모습이 오히려 정겹다. 이 경험을 통해 그녀의 다음 소설은 좀 더 편안한 모습을 하고 나올지 모르겠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그 기대만으로도 나는 기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