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번 산 고양이 비룡소의 그림동화 83
사노 요코 글 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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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만남이었지만 기억에 남아 내 안 어딘가에 깊숙히 박힌 그런 책이 내게도 있다. 너무 좋아 가슴에 꼭 껴앉고 싶지만 그런 행동이 이 책에 맞지 않을 것 같아,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마치 쳐다보지 않은 듯 하며 소중히 마음 속으로만 간직했던 책 말이다. '100만번 산 고양이'는 내게 그런 책이다.

십여 년 전 적지 않은 나이에 다시 학생이 되어 신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 때 동기의 소개로
목동의 한 사설 단체에서 아이들에게 독서 지도를 하게 되었다. 당시 내 나이와 여러 상황들은 나를 갈등으로 밀어넣었지만,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문학의 아름다움과 내 인생의 새로운 도전이 좋아서 차비와 밥값밖에 안되는 벌이였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고, 또한 내 안의 갈등도 그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였다. 특히 신학적 원리가 문학속에도 맞닿아 있다는 그 사실이 내겐 너무 경이로웠다. 아이들을 만나며 가르치는 게 정말 기뻤다.

내 상황은 측은하기 짝이 없었어도 내 희열은 대단했다. 지금도 그 때가 내게는 가장 좋았던 시절로 남아있다. 그 때 만난 책이 '100만번 산 고양이'다. 사노 요코라는 작가의 글과 그림은 간단하고도 단순했다. 그런데도 그 여운은 퍽이나 길었다.

100만 번이나 살았고 100만 번이나 죽었던 고양이는 매사에 냉소적이며 자신만을 사랑했던 이기적인 고양이었다. 자신의 주인이 지극히 사랑해 주어도 매사가 나른하고 귀찮기만 했다. 이 고양이는 주인 자체를 부정하는 듯 그렇게 무심했고 늘 비극적으로 죽었다. 주인들은 자신이 극진히 사랑한 고양이의 죽음에 목놓아 울었고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좋은 곳에 잘 묻어준다. 늘 이런 생을 반복했던 고양이에게 그깟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드디어 고양이에게도 누구의 고양이가 아닌 자기만의 고양이가 되는 시간이 왔다. 고양이는 도둑 고양이가 되어 마음껏 즐기며 자신의 멋진 얼룩무늬를 자랑한다. 주변은 고양이의 신부가 되려는 암고양이들로 늘 시끄러웠다. 이 고양이는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했고 자신밖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새하얗고 예쁜 암고양이를 만나고 부터는 자신도 모르게 변하게 된다. 자랑도 하지 않은채 오로지 그녀 곁에 있는 즐거움만 느낄 뿐이다. 귀여운 새끼도 낳고 키우며 고양이는 자신보다 그들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식들은 도둑고양이로 성장해 다 제 길로 가고 이제 둘만 남았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할머니가 된 하얀 고양이는 어느날 조용히 눈을 감게 되고 고양이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며칠이나 슬픔에 겨워하던 고양이도 결국 눈을 감게 되고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게 된다.

사노 요코는 사랑이 무엇이며 사랑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100만번이나 산 고양이'를 통해 가까이 다가간다. 백만 번 산 고양이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서 처음 맛보는 감정들을 겪게 된다. 그간 백 만번이나 살고 죽었지만 고양이의 생은 고통스럽고 지리할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스런 죽음조차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죽음은 또다른 생의 시작이었고 그 생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기에 고양이는 설레임이나 기대를 배울 수 없었다. 사랑을 몰랐기에 주인을 이해할 수 없었고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은 고양이를 바꾸어 놓았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곁에 있는 것만으로 기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 일때도 혼자가 아니었고 둘이 있으면 기쁨은 더 커졌다.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생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별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몸으로 겪으며 그 길었던 생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생명체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자신의 최종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고양이는 드디어 생으로부터 놓이게 되었고 사랑하는 하얀 고양이와 함께 마침내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그 시절 문학의 품 속에 있지 않았다면 내 인생에 이처럼 아름다웠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책을 친구 삼아 지내며 어린 친구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내가 가졌던 어떤 시간들보다 소중하게 내 가슴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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