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 철학적 단상 우리 시대의 고전 12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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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가치는 시 공간을 초월한 보편성과 항구성에 있다. 그 여일함에 사람들은 매혹된다. 게다가 함부로 곁을 내주지 않는 고고함도 고전의 매력이다. 그러나 자리는 높을지언정 대다수의 사람이 읽지 않는 책이 고전이다. 다 알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책. 고전의 초라한 현주소다. 그 이중적 자리가 주는 자조는 우리가 넘어야 할 고지이다. 고지를 넘으면 그토록 바랐던 목표물도 나오니 말이다.

책에도 함량이 있다면 '계몽의 변증법'은 함량 초과로 잴 수 있는 계량기가 없을 듯하다. 그래서 일찌감치 '20세기의 고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버렸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2세대인 하버마스는 이 책을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책중의 하나'라고 논평했다. 정확한 평가지만 그래서 더욱 절망적인 책이다. 아무런 출구도 알려주지 않고 어두운 전망만이 가득하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계몽의 변증법'은 질주하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절망적 선고를 통해 계몽의 자기 파괴를 선언하는 책이다. 진보 앞에서조차 비판적 사유를 촉구하는 강한 도전이야말로 이 책이 갖고 있는 엄청난 힘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거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공저로 1947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되었다. 책에 대한 두 학자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20년이 지나 나온 개정판 서문에서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수정에 인색했다며 인쇄상의 오류나 교정 정도로 만족했다 밝힌다.

그들의 도도한 책임감은 '이 책이 일차적 자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거나 '자신들이 하나하나의 문자에 대해 어느 정도로 공동 책임을 지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조그만치의 겸손도 없이 에두르지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학문과 지식에 대한 자세는 이 책이 '20세기의 고전'이라 불리는 직접적 근거이기도 하다.

'계몽의 변증법'은 왜 인류가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지 못하고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로 빠지게 됐는지에 대한 총제적이며 역사적 해석을 시도한 책이다. 나치 파시즘의 광기와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벌어진 이해 불가한 일들이 결국은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참담한 견해가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접근 금지의 불온한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상구도 없이 닫힌 문 속에서 생존해야할 사람들에겐 필독서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확실함과 무한 경쟁의 공포속에 사는 우리의 모습이 병치되지 않는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계몽의 변증법'을 일반인인 우리가 읽기에는 독해상의 어려움이 있다. 이는 난해한 문체와 저자의 깊은 사유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이 책을 끝까지 읽기란 무척 힘겨울 것으로 사료된다. 이 책이 얼마나 난해한지는 이 책에 대한 안내서가 나왔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서구 문명에 있어 계몽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계몽은 근대의 핵심원리이며 본질적 특성으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구 휴머니즘이 보는 중세는 야만성의 시대였고 벗어나야 할 신화의 시대였다. 계몽은 신화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탈신화화의 도구였고, 이성과 합리성을 내세움으로 인해 반봉건주의라는 혁명적 성격을 지닌 이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계몽이 20세기에 이르러 현대적 야만이 되어버렸다. 그 당혹감에 대한 의문 제기가 이 책의 시발이라 할 수 있다.

'계몽의 변증법'은 독일 근대사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야만의 징후에 대한 유대계 지식인이었던 두 학자의 직접적 피해로부터 출현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나치즘의 정점에서 현대적 야만의 직접적 희생자였고 결국 그들은 미국으로 망명하는 디아스포라가 된다. 따라서 이 책은 그들이 학자적 명예를 걸고 작업한 야만의 시대에 대한 고뇌의 물음이여 처절한 절규다. 이 책이 왜 그렇게 암울하다는 평을 받는지 그 역사적 배경이 느껴지는가.

우리가 발을 딛는 이 세상은 역사성과 현재성이 반복되고 때로는 일치되는 곳이다. 나치즘의 광기를 우리는 떠올리기도 주저하며 홀로코스트를 악몽이라 기억한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오히려 우리가 사는 실증주의적 시대를 더 두려워 한 듯 하다. 그들이 말하는 총체적 세계는 오늘날 우리 현실에 더 해당되는 듯 하니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은 당시보다 지금에 더 필요한 교과서 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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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7일 전쟁 카르페디엠 27
소다 오사무 지음,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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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싸울 동지들이 다시 해방 강당에서 시계탑 방송을 재개하는 날까지 일시적으로 이 방송을 중지합니다."

- 1969. 1. 19. 동경대 야스다 강당, 전국학생 투쟁회의-



이념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사람들의 의식도 달라졌다. 전공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청년들은 이제는 각자의 삶을 살고 있으며, 그들은 체제에 편입돼 나른한 일상을 구가한다. 한때 그들의 피를 뜨겁게 했던 이념은 잠시 잠깐 타올랐던 마지막 불꽃의 찬란함이 되었고, 그들의 열정은 젊은 날의 홍역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 치열하고 아름다웠던 시간이 이대로 잊혀져도 되는가?' 이 책은 그 물음에 대한 답변서이다.

'우리들의 7일 전쟁'은 중학교 1학년 남학생들의 실종으로 문을 연다. 종업식이 거행되던 날 1학년 2반 남학생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만다. 돌아올 시간이 됐는데도 아이들이 오지 않자 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난다. 어른들만 몰랐을 뿐 아이들은 더 이상 말 잘 듣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세상의 부조리와 어른들의 위선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그런 생각의 양태가 가출을 통해 한꺼번에 표출되었을 뿐이다.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보기로 한 아이들의 시간에 부모와 학교 당국이 보여주는 모습은, 아이들이 왜 해방구를 마련해 어른과의 전쟁을 선포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 곳은 아이들의 해방구다. 아이들은 이미 한달 전부터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기로 마음 먹었다. 그 작은 학생 운동의 중심엔 도루와 에이지가 있다. 도루와 에이지는 이 거사를 암암리에 진행하며 학생들을 모았다. 24명의 급우 중 체육 교사에게 벌을 받다 다친 친구와 종업식날 납치 된 친구를 제외하고 반의 모든 남학생이 참여했다. 여학생들을 배제한 이유는 이 거사가 불온한 이성간의 모임으로 비춰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은 폐업한 공장의 한 켠에서 그들만의 생활을 시작한다. 도루의 지휘하에 긴 시간을 함께 하며 아이들은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평소에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과 마음 속의 상처들이 깊은 밤의 대화를 통해 이뤄지고 서로간의 벽은 허물어진다. 너무도 친구들을 몰랐다는 자각은 특히 에이지에게 큰 내면의 변화를 겪게 한다. 에이지는 모든 친구에게 각자만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타인을 인정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한편 아이들의 부모들은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왜 집을 놔두고 공장에서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지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다는 사실을 잊은 부모의 모습은 초라하기만 하다. 자신들의 뜻을 강요하고, 자신들의 바람을 아이들의 꿈에 투사한 부모의 행위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역으로 생각하게 한다. 위선과 겉발림, 자랑과 비굴이 혼재된 부모의 현주소는 어른들의 세계를 아이들이 부정하고 싶은 이유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실망하고 등돌리는 것은 부모의 이그러진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는 그들 나름의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그룹은 제도권 학교의 선생님들이다. 아이들을 인격체로 대하기 때문에 다루기 힘들어진다 생각하는 교장 선생의 교육관은 치졸하기까지 하다. 교장 선생의 비호하에 아이들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체육 선생, 그리고 이 사태의 근원이 아이들을 잘못 가르친 부모에게 있다는 생활지도 주임의 모습은 아이들이 왜 해방구를 만들어야만 했는지를 알게 한다. 그러나 양호 선생의 헌신과 섬세한 배려는 아이들이 7일간의 전쟁을 지혜롭게 치르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는 아직도 교육의 핵심적 권한과 영향력이 여전히 교사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7일간의 여정 속에 납치된 친구를 구해 주고, 노숙자 할아버지와도 교류하며 스스로를 키워간다. 아이들은 편견이 서로간의 거리를 얼마나 내는지 알게 됐으며, 같은 공간과 시간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서로를 풍성하게 채워주는지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시간은 결코 길수 없으며 어른들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도 냉정하게 인지하고는 7일간의 전쟁을 마무리한다.

책을 덮었다. 아이들은 일상으로 돌아갔을 테고 아이들의 우려대로 한동안은 학교나 집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은 7일간의 전쟁을 통해 주체적으로 사는 법을 익혔고, 친구를 수용하는 법을 배웠다. 또한 자신들의 미니 방송국과 해방구를 통해 어른들에게는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있는 기회도 제공해 주었다. 니혼 대학의 전공투에 참여한 후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도루의 부모는 아들을 통해 그 시간이 유효함을 느끼며, 자신들의 헌신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그간의 모든 아픔을 씻어낸다.

소다 오사무는 아이들의 도전을 어른과의 대결이라는 재미있는 구도로 가볍고 신나게 그려냈다. 숨겨져 있다 드러난 어른들의 추악함은 상상 이상이었지만 어린 친구들은 그에 함몰되지 않고 이겨내는 지혜를 보인다.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로 들려주는 해방구의 이야기는 이제 메아리가 된다. 이는 그 이야기가 전설이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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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시모키타자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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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런데도 묘한 힘을 갖고 있다. 특히 죽음을 향해 다가갈 때 그녀의 글은 용맹스럽기까지 하며, 마치 검투사와의 칼처럼 벼려져 있다. 존재의 부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 후 마침내 딛고 일어서, 죽음을 남겨진 자의 소중한 추억으로 전환하는 힘이 그녀 안에는 있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서정적이지만 역동적인 힘을 가진다.

'안녕 시모키타자와'에는 내밀한 상처를 지닌 모녀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밴드의 리더였던 아빠의 갑작스런 죽음과 그 죽음에 내연의 여자가 함께 했다는 사실은 남겨진 가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다. 아빠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요시에와 엄마는 상심보다 더한 절망을 경험한다. '왜 아빠는 이런 죽음을 택해야 했을까' 요시에는 아빠의 죽음에 물음표를 던지며 그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아빠의 내연녀는 아빠의 고모가 낳아 다른 곳으로 입양했던 여자로 늘 죽음을 배후에 둔 여자였다. 아빠의 죽음을 타의에 의한 자살로 이해한 요시에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모키타자와로 이사를 간다.

시모키타자와는 가식의 옷을 입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곳이다. 그곳의 생기는 요시에를 숨쉬게 했고, 그곳의 따스함은 그녀를 소중한 일상에 진입하도록 힘을 주었다. 그 곳에서 그녀는 더이상 불행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남들의 위로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요시에의 일터인 비스트로 '라 레앙'은 그녀를 자기 자신이 되어 살게 했다.

하지만 남겨진 엄마는 아빠의 부재를 느끼게 하는 옛 집에 홀로 있을수 없었다. 엄마는 거처를 요시에의 집으로 옮기고 그 곳에서 더 이상 엄마와 아내가 아닌 자신으로 살아간다.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에 치명적 손상을 입은 엄마의 삶도 이 곳에서는 많은 삶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제 두 모녀는 버림받은 가족으로 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아빠의 죽음은 요시에에게 여전히 감당키 어려운 현실이었으며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 죽음은 어떤 식으로든 규명되어야만 했다. 아빠는 내연의 여자를 위해 자신이 평생 모은 돈을 다 썼고 종국엔 그녀로부터 헤어나지 못해 원치 않은 죽음까지 맞아야만 했다. 내연녀는 아빠외에 다른 사람과도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아빠의 밴드 부원으로부터 자신이 몰랐던 아빠의 비밀을 알게 된 요시에는 이제 그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느낀다. 비록 아빠의 죽음은 자랑스럽지도 못하고 허망하기까지한 죽음이었지만 그래도 생전 아빠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사람들로 벅적대는 작은 동네 시모키타자와를 사랑스러운 필치로 세세하게 소개해 준다.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그녀의 글은 그 곳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세심하게 묘사된 문장은 그곳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그곳의 정경은 외로움에 지친 영혼에게 생을 열망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그곳에서도 아빠의 빈 자리는 메울수 없었지만 수용하게 된다는 결말은 죽음에 대한 굴복이나 부정이 아닌 생의 연속성과 장엄함을 보여준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죽음을 일상처럼 담담하게 그려내며 시모키타자와를 통해 우리 생의 지향점이 어느 곳이어야 하는지를 비추어준다. 커다란 상처 속에서도 힘을 내야하고 사랑 안에서 남겨진 삶을 소중히 살아야 한다는 그녀의 속내는 조용하지만 결코 작을 수 없는 공명을 불러온다. 일상의 기쁨이 가득한 그곳에 나도 가보고 싶다. 그래서 그 곳의 따스함을 내 안에 가득 담아 조그마한 징검다리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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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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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겪을 수 있는 상실 중 최고조는 죽음이다.
좀 전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호흡이 멈춘 채 낯선 상태로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다.
그만큼 죽음은 압도적 힘을 갖고 있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느끼는 세상은 다를 수 밖에 없다.
하물며 어린 소녀가 엄마의 죽음을 홀로 감당했을 순간이 어떠했을지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그렇게 시작한다.


엄마가 죽었을 때, 내게서 평범한 세계는 사라졌다.
그 대신 지금까지 커튼 너머에 있던 어떤 굉장한 것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란 정말 죽는 거네, 아주 평범했던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달라질 수도 있는 거네.
그 지지부진하고 따분했던 감정들이 모두 착각이었어.


만약 이런 문장으로만 도입부가 이뤄졌다면 그녀의 글이 주는 독특함은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녀는 두 줄의 글을 이어 썼다.


깊은 슬픔 속에서도 매일, 신선한 발견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열여덟 살 때 일이다.

그리곤 문단이 바뀐다.

아빠는 그 엄청난 과정의 중요한 순간에 보란 듯이 도망쳤다.


이 담담하고도 극적인 전환은 죽음의 무거움을 단번에 벗겨버린다.
어린 딸에게 엄마의 임종을 맡긴 채 도망쳐 버린 아빠의 태도는 상상외다.
아빠는 현실을 직면할 수 없어 뺑소니를 치고만다.


나는 그 일로 아빠를 잠시나마 원망했지만, 지금은 다 용서했다.
외동딸인 내가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뭐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내 눈동자에 늘 깃든 어떤 빛으로 표현할 수 있다.
거울을 보면 내 눈에 전에는 없던,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커다란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죽음을 관망하는 듯한 소녀의 표현은 요시모토 바바나가 주는 위로다.
죽음의 중대함을 절하하는 것이 아닌 그녀만의 애도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빠의 너무 일찍 온 새로운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드디어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등장한다.
그녀가 아르헨티나에서 살다 온 일본인인지, 아니면 아르헨티나에서 온 사람인지는 명확치 않다.
단지 그녀는 실제보다 나이 들어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으며, 낡아빠진 3층짜리 자신의 빌딩을
가지고
있고, 오랜 기간을 홀로 살고 있는 할머니라 불리는 중년의 여성이라는 점이다.
그 할머니네서 아빠가 살다시피 한다는 소식은 고등학생인 소녀에게는 폭소와 더불어
불안감을 가져온다.

사람들과의 사귐도 없이 소문의 중심에 섰던 아르헨티나 할머니네를 다녀오지 않을 수 없다.
소문대로 집은 엉망이다.
풀풀 날리는 먼지와 오랜 부패의 냄새에 사색이 되지만 불과 한 두시간만에 적응하는 자신을 본다.
소녀는 아빠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게된다.

아빠는 또 다른 방식의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은 엄마와 만들었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소녀의 마음은 평안하다.
아빠도 아르헨티나 할머니 유리씨도 행복해하기 때문이다.
비록 함께 살진 않지만 지켜보는 자신도 그 가족의 일원이므로.

유리씨는 나중 아기를 낳는다.
그러나 산후 후유증으로 몸이 급격히 약해지고 6년 후 세상을 뜨게 된다.
아빠는 아르헨티나 빌딩에서 남동생을 키우고 소녀는 자신의 이모와 함께 간간히 청소 하러 간다.
아이는 고맙게도 이모가 맡아 주었다.

이제 소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녀는 유학을 갔다 온 후 아빠의 일터였던 작업장에 카페를 열려 한다.
다시 돌아와서도 아르헨티나 빌딩에 가서 살 생각은 없다.
그 곳은 아빠와 어린 남동생만의 추억의 장소니까.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분량은 상당히 적다.
90쪽도 안되는데다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이 14편이나 들어 있다.
그림은 한 면을 차지하며 뒷 장은 빈 면이다.
실제 분량으로만 하자면 70쪽도 안 될 것 같다.
10 포인트로 글을 치면 A4 용지 서너장이면 끝날 것 같다.

그런데도 요시모토 바나나는 죽음에 초근접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죽음만 훑은 것이 아니다. 그 이후의 치유까지도 함께 했다.
지금껏 모든 인류가 도망치려 했으며 때론 항거한 죽음에 그녀는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채
다가갔다.

티도 내지 않은 채 마치 일상의 소소한 일을 대하듯 그렇게 접근했다.

그런데 죽음을 대하는 그녀의 글에 물기가 없다.
건조했고 담담했으며 안정적이고 평온했다.
이런 글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분명 초입의 글은 경험자만이 표현해 낼 수 있는 글이었는데.

요시모토 바나나가 왜 세계 곳곳에 자신의 독자를 둘 수 있었는지 유추케 된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 책도 손에 들 것 같다.
그녀의 독자라서기 보다는 그녀의 또다른 세계가 궁금해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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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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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도회지는 사람을 쓸쓸하게 한다. 그 쓸쓸함은 외로움 보다는 씁쓸함에 가깝다. 어두운 밤, 거리에 서 있는 가로등은 거리를 오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비춘다. 겉발림에 익숙한 사람들의 뒷모습은 숨기지 못한 처량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도시의 매끄러움은 삭막함의 이면이며 도시의 화려함은 메마름의 이명이다. 도회지 정서를 바탕으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글을 썼다. 인간 내면의 추악함과 삶의 허무함이 그의 손에 붙들려 있다. 그는 어떻게 표현할 계획인가.

그의 초기작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7편의 단편으로 이뤄져 있다.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인간의 어리석음이 전편 구석구석에 스며있다.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내 행복을 지키겠다는 인간의 기막힌 우둔함은 달리 표현한 길이 없다.

삶의 부조리함은 이 책의 기조가 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생의 불공평함에 희생되는 인간의 슬픈 운명은 비애를 느끼게 한다.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채 죽는 사람과 순간의 오판으로 하루 아침에 살인자로 전락해 버린 사람의 비운에 가슴이 시린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범인 없는 살인 사건'이라는 특이 소재를 바탕으로 이 책의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작은 고의에 관한 이야기'는 남자 친구가 지겨워진 여고생이 남자 친구의 추락사를 방조하는 이야기다. 어이없는 죽음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정은 허탈함이다. '어둠 속의 두 사람'은 새엄마의 유혹에 지고만 고등학생이 살인을 하게되는 사연을 다룬다. 자신의 일탈에 대한 입막음으로 남편의 아들을 유혹하는 새엄마가 결국은 자신이 낳은 아들의 죽음을 보게되는 이야기다. 죽은 아이는 자신의 형이자 아버지인 고등학생에게 목숨을 잃는다. 농염함을 무기로 여러 사람을 손아귀에 넣었던 한 여자의 몰락과 함께 졸지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덜 여문 감처럼 떫은 맛을 느끼게 한다.

'춤추는 아이'는 인간의 선의가 꼭 좋은 결과를 남기는 것만은 아니라는 무서운 사실을 들려준다. 선의가 부르는 악한 결과라는 반전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끝없는 밤'은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가 살인을 부르게 되는 이야기다. 대를 이어 발생하는 악순환의 고리는 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작가는 '왜 이렇게 좋은 사람이 남편을 죽인 건지...'라는 표현으로 암시한다. 좋은 사람도 악한 행위를 할 수 있고 아픔은 가슴에 묻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
하게 해준다.

'하얀 흉기'는 죽은 남편의 아이를 유산하게 된 여인이 살인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남편과의 유일한 끈이었던 태아의 죽음은 여인에게 경도된 감정을 낳게 했고 여인은 사무실내의 흡연자들 때문에 유산됐다 생각하며 흡연자들을 차례로 죽인다. 관련자 중 한 명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여인은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못하는 착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다. '굿바이 코치'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 여자 양궁 선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양궁에외는 어떤 것도 해 본적이 없는 여인이 자신에게 허락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불륜관계에 있던 담당 코치마저 자신과 거리를 두려한다. 부인에게 폭로하겠다는 이야기에 다급해진 코치는 자살을 위조한 타살을 감행한다. 양궁 선수는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녹화하는 테입에 범인이 누구인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사랑도 어쩌면 이기심의 발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각기 다른 화자가 나타나 사건의 전말을 들려주는 특이한 형식의
이야기다. 몇 개의 반전은 기다렸다는 듯 툭툭 튀어나오며 종잡을 수 없을 만큼 혼동을 일으킨다. 자신의 머리로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짧고 미련한 것인지를 수재의 입을 통해 듣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인간 심리를 포착해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서럽게 풀어놓는데 성공한다. 그의 이야기들은 텅 빈 도시의 적막함 속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처럼 하나같이 애잔하다. 살인자들의 회한은 깊은 탄식의 물기를 머금고 있고 죽은 사람들의 얘기는 비감스럽기만 하다. 깊은 통찰이 묻어나는 글 속에 작가의 응축된 힘이 느껴진다. 그의 이름만 보고도 그의 책을 택할 수 있는 이유이다. 절제된 감정을 기저로 슬프고도 아픈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나가는 그의 소설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리하여 한 권의 책이 주는 위로 속에 가을을 맞이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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