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상실 중 최고조는 죽음이다.
좀 전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호흡이 멈춘 채 낯선 상태로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다.
그만큼 죽음은 압도적 힘을 갖고 있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느끼는 세상은 다를 수 밖에 없다.
하물며 어린 소녀가 엄마의 죽음을 홀로 감당했을 순간이 어떠했을지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그렇게 시작한다.


엄마가 죽었을 때, 내게서 평범한 세계는 사라졌다.
그 대신 지금까지 커튼 너머에 있던 어떤 굉장한 것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란 정말 죽는 거네, 아주 평범했던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달라질 수도 있는 거네.
그 지지부진하고 따분했던 감정들이 모두 착각이었어.


만약 이런 문장으로만 도입부가 이뤄졌다면 그녀의 글이 주는 독특함은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녀는 두 줄의 글을 이어 썼다.


깊은 슬픔 속에서도 매일, 신선한 발견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열여덟 살 때 일이다.

그리곤 문단이 바뀐다.

아빠는 그 엄청난 과정의 중요한 순간에 보란 듯이 도망쳤다.


이 담담하고도 극적인 전환은 죽음의 무거움을 단번에 벗겨버린다.
어린 딸에게 엄마의 임종을 맡긴 채 도망쳐 버린 아빠의 태도는 상상외다.
아빠는 현실을 직면할 수 없어 뺑소니를 치고만다.


나는 그 일로 아빠를 잠시나마 원망했지만, 지금은 다 용서했다.
외동딸인 내가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뭐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내 눈동자에 늘 깃든 어떤 빛으로 표현할 수 있다.
거울을 보면 내 눈에 전에는 없던,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커다란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죽음을 관망하는 듯한 소녀의 표현은 요시모토 바바나가 주는 위로다.
죽음의 중대함을 절하하는 것이 아닌 그녀만의 애도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빠의 너무 일찍 온 새로운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드디어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등장한다.
그녀가 아르헨티나에서 살다 온 일본인인지, 아니면 아르헨티나에서 온 사람인지는 명확치 않다.
단지 그녀는 실제보다 나이 들어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으며, 낡아빠진 3층짜리 자신의 빌딩을
가지고
있고, 오랜 기간을 홀로 살고 있는 할머니라 불리는 중년의 여성이라는 점이다.
그 할머니네서 아빠가 살다시피 한다는 소식은 고등학생인 소녀에게는 폭소와 더불어
불안감을 가져온다.

사람들과의 사귐도 없이 소문의 중심에 섰던 아르헨티나 할머니네를 다녀오지 않을 수 없다.
소문대로 집은 엉망이다.
풀풀 날리는 먼지와 오랜 부패의 냄새에 사색이 되지만 불과 한 두시간만에 적응하는 자신을 본다.
소녀는 아빠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게된다.

아빠는 또 다른 방식의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은 엄마와 만들었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소녀의 마음은 평안하다.
아빠도 아르헨티나 할머니 유리씨도 행복해하기 때문이다.
비록 함께 살진 않지만 지켜보는 자신도 그 가족의 일원이므로.

유리씨는 나중 아기를 낳는다.
그러나 산후 후유증으로 몸이 급격히 약해지고 6년 후 세상을 뜨게 된다.
아빠는 아르헨티나 빌딩에서 남동생을 키우고 소녀는 자신의 이모와 함께 간간히 청소 하러 간다.
아이는 고맙게도 이모가 맡아 주었다.

이제 소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녀는 유학을 갔다 온 후 아빠의 일터였던 작업장에 카페를 열려 한다.
다시 돌아와서도 아르헨티나 빌딩에 가서 살 생각은 없다.
그 곳은 아빠와 어린 남동생만의 추억의 장소니까.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분량은 상당히 적다.
90쪽도 안되는데다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이 14편이나 들어 있다.
그림은 한 면을 차지하며 뒷 장은 빈 면이다.
실제 분량으로만 하자면 70쪽도 안 될 것 같다.
10 포인트로 글을 치면 A4 용지 서너장이면 끝날 것 같다.

그런데도 요시모토 바나나는 죽음에 초근접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죽음만 훑은 것이 아니다. 그 이후의 치유까지도 함께 했다.
지금껏 모든 인류가 도망치려 했으며 때론 항거한 죽음에 그녀는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채
다가갔다.

티도 내지 않은 채 마치 일상의 소소한 일을 대하듯 그렇게 접근했다.

그런데 죽음을 대하는 그녀의 글에 물기가 없다.
건조했고 담담했으며 안정적이고 평온했다.
이런 글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분명 초입의 글은 경험자만이 표현해 낼 수 있는 글이었는데.

요시모토 바나나가 왜 세계 곳곳에 자신의 독자를 둘 수 있었는지 유추케 된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 책도 손에 들 것 같다.
그녀의 독자라서기 보다는 그녀의 또다른 세계가 궁금해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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