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도회지는 사람을 쓸쓸하게 한다. 그 쓸쓸함은 외로움 보다는 씁쓸함에 가깝다. 어두운 밤, 거리에 서 있는 가로등은 거리를 오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비춘다. 겉발림에 익숙한 사람들의 뒷모습은 숨기지 못한 처량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도시의 매끄러움은 삭막함의 이면이며 도시의 화려함은 메마름의 이명이다. 도회지 정서를 바탕으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글을 썼다. 인간 내면의 추악함과 삶의 허무함이 그의 손에 붙들려 있다. 그는 어떻게 표현할 계획인가.

그의 초기작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7편의 단편으로 이뤄져 있다.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인간의 어리석음이 전편 구석구석에 스며있다.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내 행복을 지키겠다는 인간의 기막힌 우둔함은 달리 표현한 길이 없다.

삶의 부조리함은 이 책의 기조가 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생의 불공평함에 희생되는 인간의 슬픈 운명은 비애를 느끼게 한다.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채 죽는 사람과 순간의 오판으로 하루 아침에 살인자로 전락해 버린 사람의 비운에 가슴이 시린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범인 없는 살인 사건'이라는 특이 소재를 바탕으로 이 책의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작은 고의에 관한 이야기'는 남자 친구가 지겨워진 여고생이 남자 친구의 추락사를 방조하는 이야기다. 어이없는 죽음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정은 허탈함이다. '어둠 속의 두 사람'은 새엄마의 유혹에 지고만 고등학생이 살인을 하게되는 사연을 다룬다. 자신의 일탈에 대한 입막음으로 남편의 아들을 유혹하는 새엄마가 결국은 자신이 낳은 아들의 죽음을 보게되는 이야기다. 죽은 아이는 자신의 형이자 아버지인 고등학생에게 목숨을 잃는다. 농염함을 무기로 여러 사람을 손아귀에 넣었던 한 여자의 몰락과 함께 졸지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덜 여문 감처럼 떫은 맛을 느끼게 한다.

'춤추는 아이'는 인간의 선의가 꼭 좋은 결과를 남기는 것만은 아니라는 무서운 사실을 들려준다. 선의가 부르는 악한 결과라는 반전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끝없는 밤'은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가 살인을 부르게 되는 이야기다. 대를 이어 발생하는 악순환의 고리는 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작가는 '왜 이렇게 좋은 사람이 남편을 죽인 건지...'라는 표현으로 암시한다. 좋은 사람도 악한 행위를 할 수 있고 아픔은 가슴에 묻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
하게 해준다.

'하얀 흉기'는 죽은 남편의 아이를 유산하게 된 여인이 살인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남편과의 유일한 끈이었던 태아의 죽음은 여인에게 경도된 감정을 낳게 했고 여인은 사무실내의 흡연자들 때문에 유산됐다 생각하며 흡연자들을 차례로 죽인다. 관련자 중 한 명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여인은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못하는 착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다. '굿바이 코치'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 여자 양궁 선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양궁에외는 어떤 것도 해 본적이 없는 여인이 자신에게 허락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불륜관계에 있던 담당 코치마저 자신과 거리를 두려한다. 부인에게 폭로하겠다는 이야기에 다급해진 코치는 자살을 위조한 타살을 감행한다. 양궁 선수는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녹화하는 테입에 범인이 누구인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사랑도 어쩌면 이기심의 발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각기 다른 화자가 나타나 사건의 전말을 들려주는 특이한 형식의
이야기다. 몇 개의 반전은 기다렸다는 듯 툭툭 튀어나오며 종잡을 수 없을 만큼 혼동을 일으킨다. 자신의 머리로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짧고 미련한 것인지를 수재의 입을 통해 듣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인간 심리를 포착해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서럽게 풀어놓는데 성공한다. 그의 이야기들은 텅 빈 도시의 적막함 속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처럼 하나같이 애잔하다. 살인자들의 회한은 깊은 탄식의 물기를 머금고 있고 죽은 사람들의 얘기는 비감스럽기만 하다. 깊은 통찰이 묻어나는 글 속에 작가의 응축된 힘이 느껴진다. 그의 이름만 보고도 그의 책을 택할 수 있는 이유이다. 절제된 감정을 기저로 슬프고도 아픈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나가는 그의 소설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리하여 한 권의 책이 주는 위로 속에 가을을 맞이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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