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 철학적 단상 우리 시대의 고전 12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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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가치는 시 공간을 초월한 보편성과 항구성에 있다. 그 여일함에 사람들은 매혹된다. 게다가 함부로 곁을 내주지 않는 고고함도 고전의 매력이다. 그러나 자리는 높을지언정 대다수의 사람이 읽지 않는 책이 고전이다. 다 알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책. 고전의 초라한 현주소다. 그 이중적 자리가 주는 자조는 우리가 넘어야 할 고지이다. 고지를 넘으면 그토록 바랐던 목표물도 나오니 말이다.

책에도 함량이 있다면 '계몽의 변증법'은 함량 초과로 잴 수 있는 계량기가 없을 듯하다. 그래서 일찌감치 '20세기의 고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버렸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2세대인 하버마스는 이 책을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책중의 하나'라고 논평했다. 정확한 평가지만 그래서 더욱 절망적인 책이다. 아무런 출구도 알려주지 않고 어두운 전망만이 가득하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계몽의 변증법'은 질주하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절망적 선고를 통해 계몽의 자기 파괴를 선언하는 책이다. 진보 앞에서조차 비판적 사유를 촉구하는 강한 도전이야말로 이 책이 갖고 있는 엄청난 힘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거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공저로 1947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되었다. 책에 대한 두 학자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20년이 지나 나온 개정판 서문에서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수정에 인색했다며 인쇄상의 오류나 교정 정도로 만족했다 밝힌다.

그들의 도도한 책임감은 '이 책이 일차적 자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거나 '자신들이 하나하나의 문자에 대해 어느 정도로 공동 책임을 지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조그만치의 겸손도 없이 에두르지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학문과 지식에 대한 자세는 이 책이 '20세기의 고전'이라 불리는 직접적 근거이기도 하다.

'계몽의 변증법'은 왜 인류가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지 못하고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로 빠지게 됐는지에 대한 총제적이며 역사적 해석을 시도한 책이다. 나치 파시즘의 광기와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벌어진 이해 불가한 일들이 결국은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참담한 견해가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접근 금지의 불온한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상구도 없이 닫힌 문 속에서 생존해야할 사람들에겐 필독서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확실함과 무한 경쟁의 공포속에 사는 우리의 모습이 병치되지 않는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계몽의 변증법'을 일반인인 우리가 읽기에는 독해상의 어려움이 있다. 이는 난해한 문체와 저자의 깊은 사유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이 책을 끝까지 읽기란 무척 힘겨울 것으로 사료된다. 이 책이 얼마나 난해한지는 이 책에 대한 안내서가 나왔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서구 문명에 있어 계몽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계몽은 근대의 핵심원리이며 본질적 특성으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구 휴머니즘이 보는 중세는 야만성의 시대였고 벗어나야 할 신화의 시대였다. 계몽은 신화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탈신화화의 도구였고, 이성과 합리성을 내세움으로 인해 반봉건주의라는 혁명적 성격을 지닌 이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계몽이 20세기에 이르러 현대적 야만이 되어버렸다. 그 당혹감에 대한 의문 제기가 이 책의 시발이라 할 수 있다.

'계몽의 변증법'은 독일 근대사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야만의 징후에 대한 유대계 지식인이었던 두 학자의 직접적 피해로부터 출현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나치즘의 정점에서 현대적 야만의 직접적 희생자였고 결국 그들은 미국으로 망명하는 디아스포라가 된다. 따라서 이 책은 그들이 학자적 명예를 걸고 작업한 야만의 시대에 대한 고뇌의 물음이여 처절한 절규다. 이 책이 왜 그렇게 암울하다는 평을 받는지 그 역사적 배경이 느껴지는가.

우리가 발을 딛는 이 세상은 역사성과 현재성이 반복되고 때로는 일치되는 곳이다. 나치즘의 광기를 우리는 떠올리기도 주저하며 홀로코스트를 악몽이라 기억한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오히려 우리가 사는 실증주의적 시대를 더 두려워 한 듯 하다. 그들이 말하는 총체적 세계는 오늘날 우리 현실에 더 해당되는 듯 하니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은 당시보다 지금에 더 필요한 교과서 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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