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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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느낌은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은 느낌과 비슷했다. 기대에 못 미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굶주린 아이가 젖병을 빠는 것 같은 기세로 책을 읽어내려갔다. 뜨겁지 않았기에 더 뜨거웠던 책이었다. 지금까지 눈사람은 집 앞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가정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그런데 그 눈사람이 세상과의 절연의 표식이 돼버렸다. 스노우맨. 그가 서있는 집엔 재앙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우리 사회는 겉으로 보는 것처럼 일부일처제가 아닙니다.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죠. 최근 스웨덴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 정도가 자신이 아버지라고 믿거나 짐작하는 사람이 친부가 아니라고 합니다. 무려 20퍼센트나요! 다섯 명 중 한 명꼴이죠! 거짓된 삶을 사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생물학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눈사람이 서있는 집의 아내들이 실종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는 단순한 사안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고, 경찰의 눈에 띄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실종되거나 죽은 여자들은 평범한 주부였다. 남편과의 사이도 좋았고, 아이도 있는 단란한 가정의 주부였다. 도대체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좀 전까지 집에 있던 엄마가 없어졌다. 밤은 깊어가고 아무리 찾아도 엄마는 없다. 두려움에 떨던 아이가 옆집에 갔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실종 신고 현장에 해리 반장이 보인다. 미모의 여형사 카트리네 브라트를 대동하고. 뭔가 심상치 않다. 그러나 유부녀 실종 사건이 이번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12년 전에도 있었다.

 

라프토 형사는 오늘도 살인 사건 현장에 와있다. 왕년의 인기 형사이자 아이언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사나이. 한때 그를 향해 환호하던 언론은 이제 그를 질타하기 바쁘고, 경찰 내부에선 제거해야할 1순위가 되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현장에 있는 그의 마음이 분주하다. 눈 속에 놓인 시신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참혹하다. 시신 저 너머 산 위에 눈사람이 서 있다.

 

한때는 해리의 모든 것이었으나 스스로 그 끈을 놓아버린 여자, 라켈. 라켈에게 해리는 잊혀져야할 대상이자, 곤혹스런 삶으로 자신을 끌어넣을 남자에 불과하다. 지금 라켈의 곁엔 자상한 마티아스가 있다. 마티아스는 좋은 의사인데다 잘생기고 친절하기까지 하다. 그녀의 아들인 올레그도 친자식처럼 챙긴다. 그런데 왜 올레그는 해리만 따를까?

 

여자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간다. 스노우맨이 저지른 연쇄살인이라 생각한 해리는 팀을 꾸려 사건을 추적한다. 해리는 요즘 자신의 수척한 얼굴과 삐쩍 마른 몸을 보며, 형사로서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자각한다. 현장에서 스러져간 동료들의 죽음마저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인양 느껴진다. 최근 들어 누군가 자꾸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도 떨쳐버릴 수 없다. 사건은 반드시 해결되야 하는데 난제는 쌓여만 간다.

 

 

해리 반장의 시점과 사건들이 교차 서술되면서 이야기는 점차 후반부를 향해 달린다. 서서히 개별적 사건의 윤곽이 잡히면서 기저에 있는 한 남자가 부각된다. 지성인의 시니컬함과 사회적인 지위에 대중적 인기도까지 두루 갖춘 한 남자. 그의 이름은 아르뵈 스테프다. 그가 좀 수상쩍다. 그를 조이면 스노우맨의 정체가 드러날 듯도 하다.

 

그러나 삶이 그리 단순하지 않듯 스노우맨의 정체도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작가가 깔아놓은 복선은 쉽게 해독될 듯 하면서도 결코 쉽지 않다.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고 해리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러서도 흐릿하기만 하다. 스노우맨인가 하면 아니고, 마치 해리를 조롱하듯 스노우맨은 찾을 길이없다.

 

사방이 막혔을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던가.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해리. 모든 것을 비운채 마음의 눈으로 풀어가고 지워간다. 드디어 두 점이 만났다. 그의 눈이 커지고 손이 땀으로 젖는다. 바로 그였다, 스노우맨은. 경악이란 말로도 그의 두려움은 표현할 길이 없다. 해리가 달려간다. 그에게 기적이란 이름을 신이 허용할 것인지.....

 

이미지 출처: http://blog.naver.com/herarkd/12015077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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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아이들 - 로봇과 인공지능의 미래 김영사 모던&클래식
한스 모라벡 지음, 이인식 해제, 박우석 옮김 / 김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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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미래를 그려보는 것은 환희에 가까운 기쁨이었다. 달라진 세상의 편리함은 생각만 해도 좋았고, 온갖 현대적 시설이 구비된 곳을 마음 껏 뛰노는 내 모습은 상상만이라도 행복했다. 그런데 그토록 바라던 어른이 되고보니, 다가올 미래가 결코 반갑지만은 않았다. 미래를 환상적으로 그리기엔 내가 산 세월이 있었고, 인간의 본성 또한 그럭저럭 알게 됐기에 유토피아는 그릴래야 그릴 수 없는 먼 그대가 되어버렸다. 크게 거슬러 갈 것도 없이 20세기 유럽의 역사만 봐도 미래는 환상적으로 그릴 수 없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19세기 유럽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20세기가 어떤 식으로 다가왔는지 우리는 이미 세계사를 통해 배웠다. 유럽의 역사야말로 미래는 행복이 아닌 절망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말했다. 그러니 미래를 어찌 알고 싶겠으며 왜 꿈꾸겠는가. 지혜의 임금 솔로몬도 아는 것이 많아지면 고민도 많다고 했다. 나는 미래가 딱히 알고 싶지 않았고 이 정도의 세상에 충분히 만족했다. 

 

그러나 때때로 미래가 궁금하긴 했는데, 바로 그 미래가 내 미래와 연결돼 있고 내 딸의 미래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미하게나마 미래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여러 통로 중, 영화의 힘을 빌려보았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미래는 대개의 경우 현실로 구현됐다. 영화 뿐 아니다. 영화의 모체가 되SF 소설의 경우 미래를 꽤 구체적으로 예언했다. 십 여년전 톰 크루즈 주연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영화를 보았다. 톰 크루즈가 투명한 플라스틱 판 같은 화면에 각종 자료들을 손으로 터치해 끌어오는 장면은 무척 신기하고도 놀라운 시각적 경험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가벼운 터치 하나로 자료가 화면에서 이리저리 움직여지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했다. 그런데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영화 상에서나 보던 일이 실제로 내 삶에서 이뤄졌다. 터치폰의 등장이야말로 미래가 내 삶으로 내려온 날이었다.  

 

'마음의 아이들'은 앞으로 로봇이 우리의 후손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이종교배나 인간복제도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닌데, 하물며 로봇이 우리의 후손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은 결코 편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미래가 어찌 될런지 조금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방향을 조금만 부정적으로 틀면 인간이 로봇에게 종속되어 사는 모습도 예측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에 의해 창조된 로봇에게 노예처럼 봉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한스 모라벡은 생각이 다른가보다. 그가 제시하는 것은 단순한 로봇이 아닌 로보 사피엔스를 말한다. 그는 사람처럼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계를 넘어서 인간의 능력을 추월하는 로봇이 2050년 경에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 때가 되면 호모 사피엔스의 자리는 로보 사피엔스에게 넘어가게 될 거라는 거다. 즉 지구의 주인이 인류가 아닌 로봇이 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다. 덧붙여 한스 모라벡은 이 로봇이 인류의 정신적 자신이 담긴 소프트웨어를 송두리째 물려 받았기 때문에 자식이라 불릴 수 있다며 '마음의 아이'라 명명했다.

 

'조만간 기계가 아무런 도움 없이 자신의 유지, 생식, 개선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유식해 질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새로운 유전적 인계가 완성된다. 그 때가 되면 우리 문화는 인간의 생물학이 지니는 한계에서 벗어나 현재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직접 전달되는 방식이 아닌, 더 유능한 지능형 기계가 전달의 책임을 맡는국면으로 진화할 것이다.' 21p 서문

 

인류가 자신의 문화적 변화에 의해 사라지고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낸 자손, 즉 로봇에게 그 자리를 내어준 세계를 한스 모라벡은 인류의 미래로 그리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 인간의 두뇌에서 컴퓨터로 옮겨지는 '마음 이전'을 그는 해방이라 표현하며, 마음이 죽을 수 밖에 없는 몸으로부터 구출됐다고 표현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이 로봇으로 이식되어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영원한 삶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이 새로운 몸으로 이전될 수 있다는 생각이 부딪치는 반론에 대해 패턴-동일성이라는 입장을 제시한다.

 

'몸-동일성은 한 인격체가 인간의 몸으로 구성된 물질에 의해 규정된다고 가정한다. 오직 신체 구성 물질의 연속성을 유지함으로써만 우리는 하나의 개별적 인격을 보존할 수 있다. 역으로 패턴-동일성은 한 인격, 예컨대 나 자신의 본질을 내 머리와 몸 안에 일어나는 패턴과 과정으로 정의하고, 그 과정을 지지해주는 기계로 정의하지 않는다. 만일 그 과정이 보존된다면, 나는 보존된다. 나머지는 젤리에 불과하다.' 203p  

 

그의 진화론적 생사관이 드러난다. 그는 우리 몸의 보존과 신체의 상실이 일상 생활의 정상적인 일부로 보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 로봇으로 이전돼도 인류가 지속된다는 견해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그의 견해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몇 년 뒤도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에 1998년에 나온 이 책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고 로봇공학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진지하게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그려주는 인류의 미래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고 두렵다. 그런데 책의 내용을 따라가면 그렇게 될 확률이 매우 높을 것 같고 그 방향으로의 연구가 얼마나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당신은 한스 모라벡이 제시하는 미래가 마음에 드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떤 미래를 그리고 싶은가? 책을 덮고 나니 한숨이 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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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경영의 원칙 서울대학교 관악초청강연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안철수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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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사태'가 났을 당시, 나는 한 신학대학원의 학생으로 적을 두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TV화면에는 쌍둥이 센터를 향해 돌진하는 비행기의 모습이 반복해 비춰지고 있었고, 어쩔줄 몰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내 눈과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부랴부랴 학교로 갔다.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사람들로 교정은 뒤숭숭했고,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 수업종이 울리자 사람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수업에 들어갔다. 첫 수업은 이 시대의 선지자라 불리는 교수님의 수업이었다. 사태에 대한 명확한 진단조차 아직 언론사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교수님은 전문가의 논평보다 더 예리한 말씀을 하셨다. 앞으로는 테러가 일상화된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며,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테러로 인해 우리는 불안감을 안고 살게 될 것이라 하셨다. 이제 테러는 근원지와 무관한 곳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며 도심뿐 아니라 일반 아파트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하셨다.

 

몇 십년 후를 예견하신 그 교수님도 대단했지만, 내가 예전 일했던 곳에서도 비범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좋게좋게 넘어가는 것 같아도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주어진 일을 딱 부러지게 해내는 사람들이 주변에 깔렸다 할 정도였다. 언론고시라 불렸던 일터에서 뿐 아니라, 십여년 넘게 출석했던 교회도 반경 10미터 안에 서울의 국립대를 비롯, 내로라하는 직업과 학문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이 곳만 벗어나면 가물에 콩나듯이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많았던지, 덕분에 내 청춘은 시들은 과일 꼭지처럼 열등감에 쩔어 살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배울 것도 많고 좋은 기회였는데, 그 때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듯 싶다.

 

인정하건 안하건 지금 세계는 인재 전쟁중이고, 그들의 리더쉽에 의해 세계 지도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다르게 그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세상인데 우리는 아직도 정치라는 거대 그물에 갇혀 참으로 소모적인 싸움을 길게도 하고 있다. 언급할 필요도 없을 만큼 올해 우리는 중요한 정치적 기로에 서있는데, 감정의 폭증을 냉철한 논리와 가치관으로 얼마나 객관적으로 점검하느냐에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향후 대권주자로 물망에 오르고 있는 안철수에 대한 관심은 지대할 수 밖에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지도자가 나라의 흥망성쇄를 좌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도자를 배출하는 토양인 우리나라의 정치판은 언제나 저급이었고, 개중 나은 사람들이 몰려든 곳임에도 바닥의 정수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는 모습을 신문 지면에서 보자면 혹여 외국인이라도 볼까 부끄러웠다. 왜 멀쩡한 사람도 정치판에만 들어가면 물이 드는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나 비록 손가락질을 할 망정 그 곳에서 지도자가 배출되니 이런 현실에 저절로 눈물을 머금게된다. 발등에 불 떨어진 사태를 수습하고자 미친 듯이 날 뛸 정치판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 정치판에서 우리의 미래를 가늠해야 되는 처지가 딱하지만, 그래도 굳이 하자면 당을 떠나 이제는 출중한 개인에게서 희망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런 희망적 인물의 한 명으로 안철수를 들 수 있겠다. 이 책은 2010년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서 그가 가진 강연회를 서울대에서 펴낸 것이다. 안철수에 관해서는 그간 펴온 책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책은 여러 책에서 그가 가장 강조한 부분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사실 책이라기 보다는 모음집의 성격에 가깝다. 이 강연회에서 안철수는 자신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왔는지, 결단의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한 사람의 크기는 그가 가진 생각의 크기라는 말을 절감한다. 만약 삶의 질을 따질 수 있다면 안철수 만큼 고도의 질과 밀도있는 삶을 과연 어느 누가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컴퓨터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벌였던 7년의 시간들과, 미국 유학 당시 이틀에 한 번 꼴로 잠을 잔 탓에 누적된 피로로 인해 심각한 지경에 처했을 만큼 그는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그는 여전히 덤덤하게 전한다.

 

사회적 기업을 꿈꾸었고, 사회적 기업인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왔던 그는 현재, 교육의 최일선 현장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 벤처기업을 운영하며 자신의 계획대로 된 적이 거의 없었던 경험을 살려 주어진 오늘에 늘 최선을 다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계획도 딱히 세우지 않는단다. 단지 논리적으로 점검하고 점검한 후 늘 후회없는 결정을 한다고 했다. 아직 어떤 발표도 없다. 주변 사람들만 바쁠 뿐이다. 그의 행보로만 볼 때 그는 아직까지는 믿음직스럽다. 도덕적으로도 하자가 없어 보인다. 지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성실도에 관한한 말이 필요 없고, 인간미도 좋아보인다. 정치에 염증을 느끼다 못해 혐오까지 이르렀지만 나는 지금 이 책을 다각도로 읽는다. 비록 집에 있는 아줌마일망정 지도자가 될 재목을 찾아야하기에, 마치 시부모가 미래의 며느리감 보듯 조근조근 짚어가며 읽을 수 밖에 없다.

 

그에게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 제발 그만은 '브루투스 너마저'가 되지 않길 바란다. 밉건 곱건 정치에 기댈수 밖에 없는 운명적 공동체안에 내가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있는 그대로 읽힐 수 없었던 내 첫 번째 책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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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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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책을 읽었다. 165g의 중량에 표지까지 다 합쳐도 90쪽이 채 안되는 이 얇디 얇은 책이 내 전 존재를 흔들어놨다. 이 책은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 흐릿한 눈으로 회상하듯 말하는 노인의 고백록이 아니었다.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인지한 구십이 넘은 老 멘토의 인류를 향한 절절한 외침이었다. 죽음의 사선을 몇 번이나 넘나들고, 국적을 바꾸었으며, 소란스런 세상의 한복판에서 보편적 가치를 위해 생을 던진 늙은 투사의 살아있는 유언이었다. 그런 책을 읽었다.

 

할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던 책이었다. 제목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이 책의 제호는 안그래도 충분히 시끄러운 세상에 불을 던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탐탁치 않았다. 그러나 내 감정과는 별개로 이 책은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당시 내가 우려했던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충분하고도 넘쳐보이는 선동성이었다. 시류에 맞는 발간 시점을 보면서 이 책이 불쏘시개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끄러운 세상에 불화를 증대시키는 책의 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해가 갔다. 프랑스 老 레지스탕스의 외침이 서서히 줄어들 즈음 나는 이 책을 만나게 됐다. 한 책과의 만남은 한 존재와의 만남이며, 새로운 운명과의 조우다. 나는 올해 한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스테판 에셀이라는 한 인격적 존재와 대면을 한 것이다. 그의 어린 시절을 듣고, 그가 넘었던 사선을 생각하며, 그의 사유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분노하라'를 읽기 전 우려했던 선동성 대신 이 책이 가진 의도가 오독될 경우를 염려하게 되었다.

 

'분노하라'는 젊은이들의 피를 뜨겁게 달궈 투쟁으로 이끄는 책이 아니었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침해되고 원칙이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 공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책이었다. 그 분노의 색깔이 참 투명했다. 뜨거운 피뿌림에의 호소가 아니라 옳지 않음에 대해 주체적 인간으로서 분노하라는 간단 명료하고도 무서운 요구였다. 그러면서도 스테판 에셀은 비폭력을 주창했다. 그는 비폭력이야말로 폭력을 멈추게하는 확실한 수단이라며, 오늘날까지 세상의 혁명과 봉기를 주도한 힘이 비폭력적인 희망안에 있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희망에 등돌리는 행위가 폭력이라며 인간에게 내재한 폭력성을 잘 다스릴 것을 호소했다. 내 모든 우려가 불식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갈수록 속도가 나지 않았다. 한 두시간이면 끝낼 수 있는 책을 보름이 넘게 붙잡았다. '분노하라'는 근본적으로 속도를 내야 할 책이 아니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을 요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버리더라도 내 생각의 끝을 봐야 했다. 기대도 안했던 공감의 기쁨이 찾아왔다. 나만을 생각했던 내 작은 사유가 조금씩 확장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부끄러운 생각이 슬며시 찾아왔다. 스테판 에셀을 통해 무관심이 얼마나 비겁한 행위인가를 자각하면서 부터다. 그는 무관심을 최악의 태도라고 했고, 나는 내 무관심함으로 인해 비록 작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무관심으로 비롯된 행위를 마치 대단한 일을 한양 떠벌렸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뒤통수를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분노하라'의 출간 목적과 만나게 됐다. 달라지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읽었다. 느끼기 위해 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과연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알고 있는가? 혹여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를 내가 듣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 의심이 무색하리만큼 그는이미 이 시대의 징후를 잘 알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거대한 물결로 전세계 어디서나 물질을 향한 과도한 숭배가 도를 넘어서고 있으며, 너무도 벌어진 개인간의 격차가 타인을 향한 관심을 앗아간다는 것을 누구보다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말 한마디에는 그의 전 존재가 담겨 있다. 그는 말한다. 그럼에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을 때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고. 그러기 위해선 현대적인 소통방식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이다.

 

165g의 책 앞에서 나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 책이 말하는 바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고도 여전히 긍정적이며, 인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老멘토에게 나는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그를 믿는다면 이제 내 신뢰는 행동으로 보여야 할 차례일 터다. 오랜 동안 정치적 염증으로 가장된 내 이기심과 정치적 무관심의 옷을 나는 제일 먼저 벗어버릴 작정이다. 어쩌면 말처럼 쉽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첫발을 내딛었을 때 비로소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책이 아니라 가장 소망적인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이 책의 진짜 목적인 분노할 일이 없는 세상이 우리 곁으로 한 걸음 가까이 하게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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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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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에 담보로 붙잡힌 사람들...검버섯이 새겨질 때까지

 

한 사람이 자신의 사유를 글로 풀어낼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글은 시간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시간은 세월이란 이름의 무게를 달고 온다. 그들에게 시간은 매섭다. 그들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을 산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그들을 담금질하고 해체한 것이다. 그들이 보낸 시간은 사투와 같았다.

 

노벨 문학상이란 거대 담론과 나

 

오늘날 노벨 문학상은 인류의 문학적 자산이 되었다. 그 안에 자신을 등재한 사람들은 유명세란 이름의 반대급부를 어쩔 수 없이 치르게 되었다. 이제 그들의 남다른 사유와 개인사의 질곡은 궁금증을 넘어 글쓰는 이의 교본처럼 다가오고 있다. 그들에게 글은 무엇이며, 그들 각인의 내밀하고도 아픈 경험이 타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이 책은 내게 그런 의미만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읽는 동안 마치 넓은 대양 앞에 서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내 숨통을 틔워주었다. 세상과의 이별을 앞둔 老 작가들의 짧고도 명쾌한 말은 답답한 내 가슴에 차가운 물을 부은 듯 청량했다.

 

언젠가부터 내가 얼마나 모르는가를 알기 위해 배운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나는 타인의 재능을 향한 경쟁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타인의 재능을 기뻐하며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부족함을 알게 될수록 내 알량한 지식에 기대지 않게 되었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벗어나게 될수록 내 생각은 손톱 만큼씩 자라게 되었다.

 

그녀가 떠나던 날, 그녀를 만나다

 

이 책을 읽게 된 날은 비슬라바 쉼보르스카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가장 뒤에 있던 그녀의 글을 사람도 몇 없는 지하철 안에서 맨 처음으로 읽으며, 한 권의 책은 운명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한 사람의 사유가 다른 한 사람을 매료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그녀를 소개하는 첫 장에는 이런 말이 쓰여져 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게 매혹적인 것이다' 이렇게 멋진 말을 老 시인에게 듣게 되다니, 나는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만일 지하철만 아니었다면 손뼉을 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독자에게 '세세한 것들에 주목하라'고 말해요. 인생이란 무한하게 풍요롭다는 것을, 아주 명확한 것처럼 보이는 사물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해요. 모든 사물은 적어도 여섯 개의 시각, 다시 말해 네 방향과 위 아래 두 방향에서 볼 수 있잖아요."  

 

이렇게 근사한 말을 책을 펴자 마자 보게 되다니, 내 심장이 일정 속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뻔한 얘기와 뻔한 시각에 나는 꽤 질려 있었다.

 

독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작가

 

몇 편을 거꾸로 읽다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주제 사라마구였다. 그의 책은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접한 적이 있다. 앞을 못보게 된다는 극단적 상황을 설정해 인간 본래의 모습을 폭로하는 작가의 글은, 읽는 동안 나도 모를 긴장감을 갖게 했다. 그는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와는 또 다른 소리를 냈다.

 

"......본격적으로 창작의 길로 들어선 것은 <디아리우 데 노티시아>지에서 기자 일을 잃었을 때였소. 그때 내 나이 오십이었지요. 누군가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진지하게 이렇게 대답해요. 아무것도 쓸 게 없었다고."

 

그러면서 그는 젊었을 때 자신의 삶에 지표가 되어준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잘난 체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것임을 넌 알아야 해. 알면 알수록 그건 아주 사소한 것임을 넌 알아야 해. 달은 세상의 모든 호수를 비춘다는 것을, 그래서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그러나 전직 자물쇠공을 위대한 작가로 만들어준 이 영향력 있는 시인이, 가족에게조차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됐음을 아는 것은 비감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문학의 도상에 자신의 生을 바쳐야 했던 수 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언뜻 비쳐진다. 그들에겐 보상이 없었다. 아프다.

 

 

그들도 인간이었다...우리와 같은

 

이 책엔 이들을 비롯 16인의 대담이 실려있다. 예전부터 익히 이름을 알았던 작가도 있었고, 처음 들어본 작가도 있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라 하여 이들 모두가 자신만의 사유를 진지하게 풀어낸 것은 아니었다. 삶에 너무 지쳐 버린 작가도 있었고, 혼탁한 세상이 흠집을 낸 작가도 있었다.

 

아직도 과거의 상흔으로부터 회복되지 못한 작가도 있었고, 여전히 치명적인 우울과 싸우는 작가도 있었다. 문학적 소신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작가도 있었고, 그로 인한 실질적 외상으로 남은 생을 힘겹게 살다 가버린 작가도 있었다. 이들 모두는 여리고 작은 한 인간에 불과했다. 일반인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럼에도 그들은 달랐다...현재를 복원한다

 

그러나 그들에겐 우리와 다른 것이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찰나인 현재를 붙잡았다. 바로 그때, 즉시 과거가 되는 현재를 글로 포착해, 영원한 현재성을 우리에게 복원해 주었다. 잠시 잠깐 스치고 만, 그래서 항상 놓칠 수 밖에 없는 현재의 시간을 그들이 포획함으로 우리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닌 현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시간의 회복으로 우리는 이제 과거의 회한에 젖지 않게 되었다. 시간을 회복시키는 작업은, 오로지 그들만이 할 수 있는 획기적인 役事였다. 지나간 것을 미화하지 않으며, 미래를 희망으로 채색하지 않고도 그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현재 속에서 있는 그대로 구현해 냈다. 그러므로 현재는 지난 과거를 추억으로 전환할 수 있는 힘을 주며, 오늘을 오늘로서 살게 하는 미래의 선물이 되었다.

 

시간안에서 보편성을 걷어올리다...승리자의 노래

 

'약속하되 거기에 어떤 희망도 심지 않는다'는 주제 사라마구의 말은 문학적 희망의 부재를 말함이 아니다. 이는 문학만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희망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일터다. 홀로코스트의 공포와 천안문의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또한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나락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한 것은 밤새 쓰고 지웠던 글밖에 없었다.

 

그 오랜 시간 글을 붙잡고 시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 그들은 마침내 보편성이라는 가치를 획득하게 됐다. 이제 그들은 전세계에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아우르는 사람이 됐다. 그런 자리에 서기 위해 시간은 그들을 무섭게 단련했다. 혹독한 시간의 다룸 속에서 자신의 아픔으로 시대를 위로할 수 있고, 자신의 상흔으로 시대의 가공할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됐을 때, 그들은 시간의 보상을 받았다.

 

이런 그들에게 노벨 문학상이란 영예는 지극히 작은 것이다. 그것이 별 것 아니며 세상의 영예 또한 부질없는 것임을 알 때 시간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 영예는 그들에게는 기쁨을, 우리에게는 희망을 되돌려 선물할 것이다. 이는 검버섯이 그들의 얼굴에 나타날 때까지 참고 인내해준 그들에게, 혹은 미래의 그들인 우리에게 주는 시간의 축하 메시지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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