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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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책을 읽었다. 165g의 중량에 표지까지 다 합쳐도 90쪽이 채 안되는 이 얇디 얇은 책이 내 전 존재를 흔들어놨다. 이 책은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 흐릿한 눈으로 회상하듯 말하는 노인의 고백록이 아니었다.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인지한 구십이 넘은 老 멘토의 인류를 향한 절절한 외침이었다. 죽음의 사선을 몇 번이나 넘나들고, 국적을 바꾸었으며, 소란스런 세상의 한복판에서 보편적 가치를 위해 생을 던진 늙은 투사의 살아있는 유언이었다. 그런 책을 읽었다.

 

할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던 책이었다. 제목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이 책의 제호는 안그래도 충분히 시끄러운 세상에 불을 던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탐탁치 않았다. 그러나 내 감정과는 별개로 이 책은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당시 내가 우려했던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충분하고도 넘쳐보이는 선동성이었다. 시류에 맞는 발간 시점을 보면서 이 책이 불쏘시개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끄러운 세상에 불화를 증대시키는 책의 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해가 갔다. 프랑스 老 레지스탕스의 외침이 서서히 줄어들 즈음 나는 이 책을 만나게 됐다. 한 책과의 만남은 한 존재와의 만남이며, 새로운 운명과의 조우다. 나는 올해 한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스테판 에셀이라는 한 인격적 존재와 대면을 한 것이다. 그의 어린 시절을 듣고, 그가 넘었던 사선을 생각하며, 그의 사유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분노하라'를 읽기 전 우려했던 선동성 대신 이 책이 가진 의도가 오독될 경우를 염려하게 되었다.

 

'분노하라'는 젊은이들의 피를 뜨겁게 달궈 투쟁으로 이끄는 책이 아니었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침해되고 원칙이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 공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책이었다. 그 분노의 색깔이 참 투명했다. 뜨거운 피뿌림에의 호소가 아니라 옳지 않음에 대해 주체적 인간으로서 분노하라는 간단 명료하고도 무서운 요구였다. 그러면서도 스테판 에셀은 비폭력을 주창했다. 그는 비폭력이야말로 폭력을 멈추게하는 확실한 수단이라며, 오늘날까지 세상의 혁명과 봉기를 주도한 힘이 비폭력적인 희망안에 있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희망에 등돌리는 행위가 폭력이라며 인간에게 내재한 폭력성을 잘 다스릴 것을 호소했다. 내 모든 우려가 불식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갈수록 속도가 나지 않았다. 한 두시간이면 끝낼 수 있는 책을 보름이 넘게 붙잡았다. '분노하라'는 근본적으로 속도를 내야 할 책이 아니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을 요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버리더라도 내 생각의 끝을 봐야 했다. 기대도 안했던 공감의 기쁨이 찾아왔다. 나만을 생각했던 내 작은 사유가 조금씩 확장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부끄러운 생각이 슬며시 찾아왔다. 스테판 에셀을 통해 무관심이 얼마나 비겁한 행위인가를 자각하면서 부터다. 그는 무관심을 최악의 태도라고 했고, 나는 내 무관심함으로 인해 비록 작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무관심으로 비롯된 행위를 마치 대단한 일을 한양 떠벌렸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뒤통수를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분노하라'의 출간 목적과 만나게 됐다. 달라지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읽었다. 느끼기 위해 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과연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알고 있는가? 혹여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를 내가 듣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 의심이 무색하리만큼 그는이미 이 시대의 징후를 잘 알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거대한 물결로 전세계 어디서나 물질을 향한 과도한 숭배가 도를 넘어서고 있으며, 너무도 벌어진 개인간의 격차가 타인을 향한 관심을 앗아간다는 것을 누구보다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말 한마디에는 그의 전 존재가 담겨 있다. 그는 말한다. 그럼에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을 때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고. 그러기 위해선 현대적인 소통방식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이다.

 

165g의 책 앞에서 나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 책이 말하는 바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고도 여전히 긍정적이며, 인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老멘토에게 나는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그를 믿는다면 이제 내 신뢰는 행동으로 보여야 할 차례일 터다. 오랜 동안 정치적 염증으로 가장된 내 이기심과 정치적 무관심의 옷을 나는 제일 먼저 벗어버릴 작정이다. 어쩌면 말처럼 쉽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첫발을 내딛었을 때 비로소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책이 아니라 가장 소망적인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이 책의 진짜 목적인 분노할 일이 없는 세상이 우리 곁으로 한 걸음 가까이 하게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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