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들처럼 떠나라! - 작가와 함께 떠나는 감성 에세이
조정래.박범신 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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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설레이는 말이다. 잠시 바람만 쐬도 상쾌해지는데, 하물며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곳을 간다는 건 기쁜 일이다. 꼭 내가 가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의 여정을 눈으로 따라가기만 해도 좋다. 여행지에서 전하는 이야기들은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들뜨게 한다. 불과 며칠 뿐인 시간이지만, 그곳에서의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시간을 맛보는 느낌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시간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시간이 이리도 금쪽같을 수 있다니. 여행은 이렇게 색다른 맛과 기운을 가지고 있다.

 

 

예전부터 여행 에세이를 읽고 싶었다. 다른 이도 아닌 작가들의 여행기라 더 관심이 갔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작가들이 자신의 문학적 고향을,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 방문하는 거란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진다. 서둘러 책을 폈다. 영화 '은교'의 작가로 재조명되고 있는 박범신이 완도로 안내한다.

 

 

완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에 속한 곳으로 주변에 유인도와 무인도가 200여개나 있다고 한다. 박범신은 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 내음을 들이마시며 먼저 청산도로 데려간다. 동행인은 영화감독 정지우와 재즈 피아니스트 진보라다. 그들과 함께 천산도의 강태공을 만나고 슬로길을 걸으며 여행이 좋은 이유로, 그저 가슴으로 느끼면 되는 일탈의 편안함을 든다. 문학과 반평생을 함께한 그에게 문학은 무엇일까? 그에게 있어 문학은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란다. 자신은 경력과 나이라는 계급장을 벗어버리고 언제까지나 고뇌하면서 글을 쓰고 싶단다. 박범신은 오로지 좋은 글만이 자신이 우러러봐야 할 계급이라는 그의 말에 괜시리 가슴이 먹먹해진다.

 

 

박범신에 이어 만남을 준비중인 작가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김용택과 강은교, 조정래와 이문열, 김탁환과 김주영이 대기중이며, 이순원과 하성란, 함민복과 하일지, 구효서와 성석제, 정호승과 고은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언어의 마술사 15인이 함께 했으니 얼마나 풍성한 잔치일런지는 짐작 가능할 터이다.

 

그들은 힘들고 아팠다면서도 대부분 고향을 찾았다. 고향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아련하고 슬프며 뜨거웠다. 어려웠던 시기를 보냈다면서 왜 하필이면 고향이었을까? 그 시절이 아무리 고통스러웠다 해도 자신을 만들었고, 그 곳의 땅과 하늘과 바다가 없이는 자신의 오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문학은 고향을 떠나서는 이해불가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의 표정이 마치 어린아이 같다.

 

 

수없이 많았던 불면의 밤에 이문열은 고향을 떠올리며 글을 썼고, 하성란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고기를 잡았던 거제도를 떠올렸다. 김용택은 갑갑했던 시골 집에서 월부 책장사가 가져다 준 책을 읽으며 자신의 길을 발견했고, 한번도 꿈꿔 본 적이 없었던 시인이 되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을 누를 길 없어 서른이 넘어 등단 했으면서도 김주영은 길 위의 인생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길 위에 있을 때 행복했고 그래서 그의 글은 길에서 나왔다. 지도를 보고 이야기 하며 지도를 보고 소설을 쓰던 그에게 길은 인생이자 멈추지 않아야 할 문학적 지표였다.

 

그랬다. 작가들에게 문학은 자신을 찾는 작업이었고, 여행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는 어머니의 가슴이었다. 이제는 돌아갈 어머니가 없는 그들에게 여행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사치는 그들이 마음껏 누려도 되는 호사였다. 그 호사에는 별다른게 없어도 되었다. 그들이 그리워했던 땅과 하늘, 바다와 강, 그리고 고향의 냄새로 그려지는 따뜻함만 있으면 되었다.

 

그토록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되었으련만 작가라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은 힘든 삶을 살아야했다. 부모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소설적 구상을 떠올렸다는 어느 소설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들은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글로 구현해야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이런 휴식이 주어져 좋았다. 덕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내 발길이 닿았고, 길 위의 고단했던 인생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여정에 함께 하면서 이 번에 나도 새로운 고향을 갖게 되었다. 그들처럼 당신도 떠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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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학교 알맹이 그림책 27
이경혜 글, 김중석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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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란 시.공간의 두 축에 내가 쏟아부은 마음을 나타내는 좌표이다. 아무리 좋은 옷이나 음식도, 때론 사람까지도 질릴 때가 있건만 추억은 몇 번을 돌이켜도 물리질 않는다. 시간의 빈 자리가 문득 문득 느껴지는 순간, 추억이 친구가 되어줄 때 서러운 마음은 사라지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추억을 떠올려주는 게 아니라 지나간 추억이 우리를 지탱케해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경혜의 동화를 읽게 됐다. 동화로 만나는 건 처음이지 싶다. 이경혜는 대상이 무엇이건간에 대상과 자신을 합치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그녀가 써낸 누군가가 아닌 그녀를 통해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번엔 사람이 아닌 학교다. 그것도 수몰로 사라지게 되는 학교를 말이다.

 

예쁜이 학교라 불리는 조그만 학교가 있었다. 그 학교에 삼대가 다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빠와 엄마, 그리고 아이들까지. 이 학교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이 어떨지 가히 짐작할만하다. 그런데 근처에 커다란 댐이 생기면서 이 학교가 물에 잠기게 될 처지에 이르렀다. 학교가 물에 잠긴다는 건 마을 전체도 잠기게 된다는 걸 의미하고, 이는 동네 사람들 또한 이 마을을 떠나야함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떠나고 운동장에는 쓸쓸함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건 우리의 시각일 뿐이다. 학교가 비면서 이 학교를 탐냈던 숲속 나라 동물 친구들이 교실에 가득하다. 부러워하기만 했지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이 곳에서 동물 친구들은 마치 잔치와 같은 시간을 보낸다. 드디어 학교가 물에 잠기기 하루 전, 동물들은 작별의 노래를 부른다. 이제 정말 모두와 안녕을 하게되는 예쁜이 학교.  

 

 

그랬는데 생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물에 비치던 학교를 쳐다보기만 하던 물속 친구들이 학교를 찾아왔다. 더이상의 만남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쁜이 학교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

 

 

기억 속에 살아있다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단지 그 정도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경혜는 사라지게 되는 것을 단순히 안타까워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사라짐을 통한 이별로 말미암아 또다른 생명과 조우하게 되는 기쁨을 그리고 있었다. 이를 통해 만남의 풍성함을 알려주고 있고, 이 만남이 단회적으로 그치지 않음을 연이어 보여주고 있었다. 나아가 그녀는 시각만 달리한다면 세상 어떤 것도 이별이 아님을 알려주려 하고 있었다.

 

수몰이 슬픔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감정적 상실이자 현재적 아픔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경혜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자신의 글을 통해 시각을 달리할 수 있도록 마음의 자리를 넓히고 있었다.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아픔을 또다른 추억의 장소로 치환한 그녀의 놀라운 힘에 나는 놀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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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읽기를 권함 - 우리시대 어느 간서치가 들려주는 책을 읽는 이유
김무곤 지음 / 더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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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았으면 싶은 게 있다. 그 중 하나가 내겐 책이다. 책은 오랜 시간을 우리와 함께 하며 때론 친구로, 때론 스승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바란다한들 세상은 이미 변하고 있고 책도 예외가 될 순 없을 것 같다. e-book이 등장한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이런 추세로라면 전자책이 종이책을 넘어서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여진다. 아......

 

그 긴 시간의 폭염과 추위, 비바람과 습기를 견디고 연하여 사람들의 부주의함과 무관심을 포함한 지극한 애정까지, 그 모든 극단적 거리속에서도 책은 꿋꿋이 버티어왔다. 그런데 이제 책의 운명이 바람앞의 촛불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런 책의 운명이 이 책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비감어린 애정이 출산한 '종이책 읽기를 권함'은 내게도 아련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좀 더 빠르거나 늦더라도 그 언젠가, 역사의 한 장으로 사라지고 말 것 같은 예감이 김무곤을 부추켰고, 그 예감은 무언의 무게가 되어 나를 재촉케했다. 어서 이 책을 읽어 보라고.

 

약간의 우울함으로 시작한 책읽기였다. 한데 읽어갈 수록 내 감정의 신파적 요소는 책 읽기의 기쁨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느림의 미학을 맛볼 수 있는 종이책만의 매력이 김무곤의 눈을 통해 그려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읽어달라 대놓고 주문했고, 책 내음을 즐기며 책의 감촉을 맛보라 청유했다. 그의 손길을 따라가 보았다. 종이책의 운명을 거슬러보려는 한 간서치의 회고조의 독백이나 한탄은 찾을 수 없었다.

 

이 책 속엔 기쁨만이 난무했다. 책 속에서 타자를 만날때의 기쁨, 그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기쁨, Reader가 Leader가 되는 기쁨,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이 쓸모있는 사람을 만드는 기쁨, 책 읽기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쁨, 전문 서적이 주는 기쁨, 책 속에서 좋은 문장을 만나는 기쁨, 묵독의 고요를 즐기는 기쁨등.등. 이 책은 책 읽기가 축제이자 향연임을 전하고 있었다. 책 안에 이렇게도 많은 기쁨이 있었다니, 거기까진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이렇게 감탄에 감탄을 연발할 즈음, 김무곤의 글이 갑자기 바뀌고 있었다. '당신은 책읽기가 마냥 즐겁기만 하냐'고. 언제는 책이라면 죽고 못살것 같더니 이 무슨 소리. 이리 시치미를 떼도 된단 말인가! 김무곤의 말은 계속된다. '책 읽을 때 우리는 세상과의 소통과 단절을 동시에 경험하며, 책 읽을 때 우리는 완전한 단독자로 세계와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에 책 읽기는 구원과 동시에 좌절이다.'

갑자기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고, 믿었던 사람이 돌변한 느낌이었다. 그의 좌절이 즉각 나의 좌절로 다가왔다. 책에는 없는 것이 없었지만 내 것은 아니었고, 책 읽기를 통해 자신에게 더 깊숙이 들어갔지만 책으로 말미암아 더 커져버린 세상을 향한 열망.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장벽을 만난 기분이었다.

 

문제를 주었으니 답도 주겠지. 계속해 읽어갔다. 나는 김무곤의 이 말에서 답을 찾았다. '책 있는 곳은 다 학교다.' 결국 책을 통해 모순을 해결해나갈 뿐 아니라, 두 세계를 내 안에서 통합하고 각자의 자리도 만들어주어야 했다. 즉 나와 타자, 나와 세계는 별개이면서 하나가 되어야 했다.

 

유학 시절 책을 팔아 책을 샀던 간서치의 글은 책 자체의 느낌과, 의미와, 가치를 오롯이 담고 있었다. 책과 함께 살아온 김무곤의 반생이 아름다운 추억이자 소중한 선물로 다가왔다. 그 시간들이 오늘을 만들었을 거라는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가 함께 한 책 속에는 단지 책만 있지 않았으니까. 책으로 인해 만나게 됐던 시간이 있었고, 공간이 있었으며,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가운데는 독자인 나도 포함된다.

 

                   사진 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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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한 결혼 - 어느 검사의 결혼 이야기
정원 지음 / 조은세상(북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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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그녀는 아픔이라는 공통분모로 만났다. 그 위에 놓인 분자는 분노라는 이름이었고, 그들을 부부라는 운명 공동체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의 만남은 오로지 운명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운명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만날 일도, 더더군다나 함께 살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검사였던 형을 조직폭력배에 의해 잃어야 했던 남자, 태윤. 그에게 형은 우상이자 모든 것이었다. 고지식하고 답답해서 싫은 소리를 했었어도 형만 생각하면 가슴이 뿌듯했다. 그런 형이 있었기에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그런데 형이 실족사로 죽었단다. 자신 앞에 누워 있는 형에게 태윤은 다짐한다. 형을 이렇게 만든 자들을 결코 용서치 않겠다고.

 

혜나는 한바탕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지금껏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고, 법 없이도 살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사람을 죽였단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혜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혜나가 아빠를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혜나는 피켓을 들고 법원 청사 앞에서 일인 시위를 벌인다.

 

그런 혜나를 누군가 주시하고 있다. 저렇게 하다 무슨 일이 날텐데. 가만히 보고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검사도 실족사로 위장해 죽여버린 그들이 아니었던가. 검사인 태윤과 고등학교 3학년생인 혜나는 이렇게 만났다. 그리곤 일사천리로 혼인신고를 한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혜나를 법적으로 보호할 길이 없다.

 

이렇게 법적으로는 부부지만, 그들은 서로 바빠 얼굴을 마주 할 일이 별로 없다. 식사를 같이 한 적도 몇 번 없었으니까. 혜나는 태윤에게 지고 있는 신세가 너무나 미안하다. 잘 곳이 있고 먹을 것도 해결됐는데 용돈까지 준단다. 그럴 순 없다. 자신에게 들어가는 최소한도의 용돈은 자신이 벌어야한다. 그건 혜나의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하자니 죽을 맛이다. 그래도 해야했다. 아빠를 구하자면 자신이 법대를 가서 검사 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어둠의 힘으로 낮에 기생하고 있는 조직폭력배는 곳곳에 자신들의 손을 뻗치고 있다. 삼선 국회의원이란 뺏지를 달고 있지만 그의 또다른 이름은 밤의 황제다. 김석환. 그에게 무서운 것이 있을까? 그와 패거리들이 혜나 아빠를 살인자로 몰아 사형수로 만들었고, 태준을 죽였으며, 적잖은 사람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 과연 이들과의 싸움에서 태윤과 혜나가 이길 수 있을까?

 

 

한편 미모의 변호사 선영은 태윤바라기다. 화려한 미모에 시원시원한 성격, 뭐 하나 빠질 데 없는 재원이다. 그런데도 태윤에게 선영은 친구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선영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선영은 태윤에게 여자가 아니었다. 아직은 어리고 쪼그만 사내녀석 같지만 태윤의 가슴 한 구석에 혜나가 들어온지는 제법 됐고 생각외로 깊었다. 그에게 여자는 혜나 밖에 없다.

 

한 집 안에서 젊은 남녀가 지내는 건 행복한 고문이다. 어찌 되었건 명색이 부부인데 풋풋한 신혼은 커녕 변변한 데이트도 못해 봤다. 혜나는 이제 대학생이 되었고, 그녀의 곁에 왠 멸치같은 녀석이 쫓아다닌다. 자신도 못가져본 시간을 다른 누군가와 보내고 있는 혜나가 신경 쓰인다. 혜나는 어느덧 숙녀가 되었다.

 

세월은 아픔도 무디게 한다던가. 그러나 무뎌지지 않는 아픔도 있고 잊어서 안되는 아픔도 있었다. 이제 칼을 뽑을 때가 되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고 이제 그 시간만 오면 되었다. 태윤은 그 시간을 위해 살았고, 만일 혜나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먼저 괴물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혜나를 지켜주리라 맹세하고 지나온 시간이었건만 돌이켜보니 오히려 혜나가 자신을 지켜준 시간이었다.

 

일망타진. 고통을 가슴으로 삭여온 그들에게 생이 준 선물이었다. 이제 저 하늘에 있는 형도 편히 웃을 수 있겠지. 혜나도, 누명을 벗은 장인도 앞으론 마음껏 만날 수 있다. 납덩이에 눌리고 어깨에 얹혀졌던 가슴속의 짐이 비로소 벗겨진다. 하늘이 푸르다.

 

아픔이란 공통분모를 가졌던 태윤과 혜나에게 이제는 사랑이 공통분모가 되었다. 분노란 분자는 어느새 행복으로 바뀌었고. 사랑이란 분모 위에 이제 또다른 분자가 태어날 것 같다. 쉿! 이건 비밀이다.

 

사진 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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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리 한약방
서야 지음 / 가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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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주를 배경으로 하는 책을 읽었다. 예전에 한 번 스치듯 가본 곳이라 많은 기억이 남아 있진 않다. 게다가 언제적 이야기냐고 할 만큼 시간도 흘렀다. 하지만 나는 전주를 아직도 아담하고 고풍스런 도시로 기억하고 있다.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있던 유적지들과 정갈한 음식들로 차려진 식탁의 조용한 향연은,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전주만의 고담한 아름다움이었다.

 

 

그 전주 교동의 한옥마을에, 老 한의사 강원장이 운영하는 한약방이 있다. 강원장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손녀 늘뫼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늘뫼는 경계성 지적장애를 안고 있다. 눈부시도록 사랑스런 얼굴과 어린 아이같은 순수함의 공존은 늘뫼를 아끼는 사람들에겐 손톱 밑의 가시같은 아픔이다. 부모 없이 자란 것도 불쌍한데 이제 자신마저 떠나고 난 뒤 홀로 남겨지게 될 늘뫼를 생각하면 강원장은 잠이 오질 않는다. 그의 시름은 나날이 깊어만 간다.

 

올해도 어김없이 서울 소담골 병원의 편원장이 의료 봉사팀을 데리고 왔다. 편원장과 강원장은 둘도 없는 친구다. 편원장의 봉사팀이 올 때 마다 삼거리 한약방엔 생기가 돈다. 의료팀 가운덴 샤방샤방하니 근사하게 생긴 의사 둘이 눈에 띈다. 두 노인의 오가는 눈길이 은밀하다. 그 은밀함의 의미도 모른채 강원장에게 스캔되고 있는 서이준과 이호윤. 사방을 둘러보기 바쁜 호윤과 달리 이준은 아무 관심도 없는 듯 무심하기만 하다.

 

놀다 들어온 늘뫼의 눈에 두 의사가 띄었다. 늘뫼의 얼굴이 한없이 행복해진다. 안그래도 예쁜 얼굴이 찬란하게 빛난다. 늘뫼의 관심은 분명해 보인다. 올해는 호윤인가 보다. 늘뫼의 편애속에 호윤은 행복해 하고, 이준은 자신의 심장 가운데 찬바람이 훑고 가는 걸 느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도 없다.

 

늘뫼뿐 아니라 집안 일을 돌봐주는 솜래할매도 신이 나기는 마찬가지다. 안채가 사람들로 북쩍대는 건 이때 뿐이다. 늘뫼는 호윤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두 노인은 이준이 아님을 아쉬워한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던가. 늘뫼의 이종사촌 오빠 박조령이 오랜만에 놀러왔다. 판소리 명창인 조령은 공연이 있을 때마다 이 곳에 들러 강원장의 친구가 되어준다. 그 또한 노인의 마음을 잘 알기에 편원장의 의료봉사팀이 오면 더욱더 마음이 들뜬다. 그의 눈에도 이준과 호윤은 괜찮아 보이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 노인들의 계략으로 엉겹결에 남았던 이준과 호윤도 떠나고, 삼거리 한약방엔 다시 적막감이 감돈다. 그런 이 곳에 조령의 친구 문명이 등장한다. 까다롭기 한량없고 얼음보다 찬데다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 것으로 명은 유명하다. 오라고 청한 이가 아무도 없건만 명은 마치 제 집인양 늘뫼와 솜래할매를 부려 먹는다. 그러나 늘뫼를 대할 때마다 마음 속 얼음이 조금씩 녹는 듯하다.

 

 

늘뫼의 사랑이 이뤄질 수 있을까? 늘뫼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아름다움만으로 현실의 장벽을 넘을 수 있을까? 현실이 만만치 않음을 알기에 늘뫼의 사랑이 아프다. 그래서 이 사랑은 늘뫼를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과 이뤄져야 한다.

 

늘뫼의 그가 늘뫼를 선택함으로 얻게 되는 것들이, 늘뫼를 선택함으로 포기해야 할 것들보다 많았으면 좋겠다. 그가 세상으로부터 늘뫼를 지키고 감싸주듯이, 늘뫼 또한 세상 누구도 줄 수 없는 사랑으로 그를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사랑은 그렇게도 강력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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