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거리 한약방
서야 지음 / 가하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전주를 배경으로 하는 책을 읽었다. 예전에 한 번 스치듯 가본 곳이라 많은 기억이 남아 있진 않다. 게다가 언제적 이야기냐고 할 만큼 시간도 흘렀다. 하지만 나는 전주를 아직도 아담하고 고풍스런 도시로 기억하고 있다.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있던 유적지들과 정갈한 음식들로 차려진 식탁의 조용한 향연은,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전주만의 고담한 아름다움이었다.

 

 

그 전주 교동의 한옥마을에, 老 한의사 강원장이 운영하는 한약방이 있다. 강원장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손녀 늘뫼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늘뫼는 경계성 지적장애를 안고 있다. 눈부시도록 사랑스런 얼굴과 어린 아이같은 순수함의 공존은 늘뫼를 아끼는 사람들에겐 손톱 밑의 가시같은 아픔이다. 부모 없이 자란 것도 불쌍한데 이제 자신마저 떠나고 난 뒤 홀로 남겨지게 될 늘뫼를 생각하면 강원장은 잠이 오질 않는다. 그의 시름은 나날이 깊어만 간다.

 

올해도 어김없이 서울 소담골 병원의 편원장이 의료 봉사팀을 데리고 왔다. 편원장과 강원장은 둘도 없는 친구다. 편원장의 봉사팀이 올 때 마다 삼거리 한약방엔 생기가 돈다. 의료팀 가운덴 샤방샤방하니 근사하게 생긴 의사 둘이 눈에 띈다. 두 노인의 오가는 눈길이 은밀하다. 그 은밀함의 의미도 모른채 강원장에게 스캔되고 있는 서이준과 이호윤. 사방을 둘러보기 바쁜 호윤과 달리 이준은 아무 관심도 없는 듯 무심하기만 하다.

 

놀다 들어온 늘뫼의 눈에 두 의사가 띄었다. 늘뫼의 얼굴이 한없이 행복해진다. 안그래도 예쁜 얼굴이 찬란하게 빛난다. 늘뫼의 관심은 분명해 보인다. 올해는 호윤인가 보다. 늘뫼의 편애속에 호윤은 행복해 하고, 이준은 자신의 심장 가운데 찬바람이 훑고 가는 걸 느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도 없다.

 

늘뫼뿐 아니라 집안 일을 돌봐주는 솜래할매도 신이 나기는 마찬가지다. 안채가 사람들로 북쩍대는 건 이때 뿐이다. 늘뫼는 호윤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두 노인은 이준이 아님을 아쉬워한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던가. 늘뫼의 이종사촌 오빠 박조령이 오랜만에 놀러왔다. 판소리 명창인 조령은 공연이 있을 때마다 이 곳에 들러 강원장의 친구가 되어준다. 그 또한 노인의 마음을 잘 알기에 편원장의 의료봉사팀이 오면 더욱더 마음이 들뜬다. 그의 눈에도 이준과 호윤은 괜찮아 보이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 노인들의 계략으로 엉겹결에 남았던 이준과 호윤도 떠나고, 삼거리 한약방엔 다시 적막감이 감돈다. 그런 이 곳에 조령의 친구 문명이 등장한다. 까다롭기 한량없고 얼음보다 찬데다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 것으로 명은 유명하다. 오라고 청한 이가 아무도 없건만 명은 마치 제 집인양 늘뫼와 솜래할매를 부려 먹는다. 그러나 늘뫼를 대할 때마다 마음 속 얼음이 조금씩 녹는 듯하다.

 

 

늘뫼의 사랑이 이뤄질 수 있을까? 늘뫼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아름다움만으로 현실의 장벽을 넘을 수 있을까? 현실이 만만치 않음을 알기에 늘뫼의 사랑이 아프다. 그래서 이 사랑은 늘뫼를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과 이뤄져야 한다.

 

늘뫼의 그가 늘뫼를 선택함으로 얻게 되는 것들이, 늘뫼를 선택함으로 포기해야 할 것들보다 많았으면 좋겠다. 그가 세상으로부터 늘뫼를 지키고 감싸주듯이, 늘뫼 또한 세상 누구도 줄 수 없는 사랑으로 그를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사랑은 그렇게도 강력한 거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