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 잡혀간다 실천과 사람들 3
송경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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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된 말보다 표현되지 않은 말이 더 많은 책을 읽었다. 애초에 말은 사람의 마음을 다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했다. 이 책은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었다. 가슴으로 쓴 책이기에 가슴으로 읽어야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끌며 이 책을 펴지 않아도 될만한 변명거리를 독백처럼 뱉어냈다. 굳이 불편한 상황에 나를 밀어넣고 싶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송경동의 이야기에 다 동조하지 않음에도 가슴이 쓰렸다.

 

상처 많은 글이었다. 분노와 울분, 때로는 집어삼킬 듯한 증오까지 내비치는 글이었다. 그러나 그렇기만 했다면 아마 나는 중간에서 책을 덮었을 것이다. 끝까지 읽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꾸역꾸역 밥을 입에 밀어넣듯 글을 읽었다. 참 슬픈 책이었다. 핏발 선 눈과 목이 터지도록 외치는 갈라지고 탁한 음성은 언제부터 그의 것이 되었을까? 왜 그는 속죄양처럼 타인의 짐을 짊어져야 했을까? 분명 그와 나는 동시대인이건만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괴리를 느꼈다. 세상 어디도 만만한 곳은  없지만 그가 맞닥뜨려야했던 세상은 마치 무법지대와 같은 이질감마저 불러왔다. 그런 세상에서 송경동이 살았다.

 

물론 내가 속했던 세상도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깜짝 놀랄만한 일들이 그곳에서도 일어났다.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그곳은 차가웠다. 다들 자기 일에 바빠 누군가를 돌보거나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20대의 나는 늘 가슴이 얼어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 제작 여건은 자유로웠으나 그에 비례한 책임을 져야하는 곳이었다. 심적 부담과 초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업무 때문인지 그 직장에 속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다른 곳보다 짧았다. 그래도 업무는 견딜만 했다. 더 어려운 것은 비교 대상들의 탁월함에서 오는 상대적 열등감과 열패감이었고,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마음을 다칠 때 였다.

 

그런 상황이 송경동에겐 일상처럼 반복되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늘 불화했던 부모님과 특히 시장터의 세치 처세술로 아이들을 가르치려 했던 아버지, 깨진 유리 파편처럼 날 선 가족들의 모습은 어린 시절 그의 마음을 모멸감에 젖게 했다. 그랬건만 세상은 그를 품어주지 못하고 무지막지하게 대했다. 인격이 아닌 체력으로 그의 존재 가치를 인정했으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를 악물고 참아도 하늘아래 보금자리 하나 얻기 힘들게 만들었다. 또한 함부로 대했으며 검게 탄 얼굴과 손톱 밑의 때가 부끄러워 버스 손잡이마저 잡지 못하는 쓰라린 소외감을 갖게 했다. 그럼에도 주저앉지 않고 송경동은 자신의 상처를 우리의 이야기로 만드는 타자기가 되어 열악한 노동 현장의 친구들을 위무해주었다. 

 

그러나 웃을 일보다 울 일이 더 많았다. 산재로 세상을 떠난 수많은 김씨, 이씨, 박씨 형님의 죽음 앞에서 '남의 불행을 내게 닥친 일이 아니라서 감사해야 하냐'며 송경동은 처절하게 절규해야만 했다. 이름을 놔둔 채 성씨로만 존재했던 그들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장의 모습은,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죽어도 되는 목숨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그만 나오라'는 통고를 사전고지도 없이, 어느날 아침 문자로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일도 결코 남의 일일 수 없었다. 절망을 숙명인듯 받아들이며 체념하고 사는 것은 이미 지난 시간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송경동은 희망을 연대하며 노동자가 제대로 살 수 있는 나라를 꿈꾸었고 그 일에 자신을  밀어넣었다.  

 

송경동. 꿈꾸었기 때문에 잡혀갔고 꿈꾸었기 때문에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그의 꿈이 내 꿈이라는 입에 발린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의 과격한 투쟁구호에 다 동의하지도 않는다. 희망버스가 아니었다면 송경동이 누구인지도 나는 몰랐을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그가 가는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젊은 시절 그가 바랐던 '외뢰움보다 더 간절한 삶에 대한 예의와 청춘의 욕정보다 강했던 어떤 신뢰와 환대의 시간들'만은 내 가슴에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삶 속에서 그것을 지키며 살고 싶다.

 

거칠고 고함 가득했던 책이었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오히려 김춘수의 '꽃'이란 시가 떠올랐다. 이곳에 있는 내가 저곳에 있는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 시밖에 없다. 이 시는 어쩌면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소통의 또 다른 이름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지금 기쁘다.

 

 사진 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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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코끼리는 멜론을 좋아해! 푸른숲 작은 나무 16
하이리 슈트룹 글.그림, 전은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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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지 않은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기술력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새처럼 하늘을 나는 상상이 비행기를 출현케 했고, 말처럼 내달리는 상상이 자동차를 만들었다. 상상했을 때 지금껏 없었던 무언가가 현실로 나타났고 실체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놀라운 상상의 힘을 키워주는데 동화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놀랄텐가? 현실에서 상상으로 순식간에 넘어가고, 시간과 공간이 임의로 바뀌며, 동물과 사람이 얘기하고 공감하는 그런 세계는 동화 속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동화는 경계와 구분을 헐고 각기 다른 것들을 통합하는 힘이 있다. 게다가 책을 읽고 나면 이미지가 남는다. 아이들은 자신만의 이미지로 상상의 나래를 펴며 이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상상의 힘을 키우는 것이다.

 

 

현실과 상상이 자연스레 접목된 동화책 한 권을 읽었다. 나치 정권 때 만들어진, 육십도 훨씬 넘은 나든 책이다. 출간 당시 여러 출판사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눈 밖에 난 작가의 책이라, 판매되지 못하고 이제서야 빛을 보게되었다. 내용이나 구성이 신선하고 코믹해서 시간차를 느끼지 못했다. 단순하지 않은 구성에, 교훈을 주되 스치듯 지나가는 점이 마음에 든다. 교훈이 확연히 드러나는 책은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다. 책의 소재 또한 다양해 읽는 맛이 그만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정원사와 바다코끼리다. 추운 곳에서도 식물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원사가 멜론과 제비꽃 씨앗을 들고 북극으로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곳에서 정원사는 바다코끼리를 만나게 되고 서로 도와가며 지낸다. 바다코끼리는 맛있는 멜론과 제비꽃 향기에 흠뻑 빠졌고, 자신이 자리를 비운새 도시로 돌아간 정원사를 찾기로 한다. 사실 정원사라기보다는 멜론의 맛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인 셈이다. 도시로 가는 중에 바다코끼리는 별별 일을 다 당한다. 그러나 타고난 긍정성으로 힘든 일들을 이겨내고 쥐들의 도움으로 정원사를 만나게 된다.

 

 

한편 정원사는 바다코끼리를 다시 만나면서 자신이 받았던 오해를 풀게 된다. 정원사는 북극에 가기 전 어떤 교수와 작은 다툼이 있었다. 당시 그는 북극에서도 멜론과 제비꽃을 키울 수 있다고 했고, 교수는 따뜻한 곳에서만 자란다고 했다. 정원사는 자신의 주장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북극에 갔었고, 자신의 바람대로 그곳에서 열매를 맺고 꽃을 피워냈다. 그러나 증명할 길이 없었는데 바다코끼리가 오면서 오해가 풀리게 된 것이다. 멜론을 먹는 바다코끼리는 도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고 둘은 모인 돈으로 다시 북극으로 돌아간다.

 

이 책에 이들 외에도 다른 친구들이 등장한다. 남을 속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북극여우와 남을 도우려는 북극곰, 남을 해쳐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사기꾼들과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되는 쥐 한 마리와 그의 친구들이 있다. 다양한 만남 속에서 바다코끼리는 이용 당하기도 하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며,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휴식을 취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한 권의 동화책이 마치 잠언집같다. 게다가 사람과 동물, 육지와 바다, 도시와 한적한 곳을 가리지 않고 이야기가 진행되어 아이들이 생각을 제한없이 펼칠 수 있게 한다. 요즘처럼 통합이 시대의 화두인 때에 시.공간과 종(種)을 넘나들며 나누고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사고를 유연하게 할 것인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폭소가 아닌 은근한 미소를 짓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게 아니라 생각할 때마다 웃게 만드는 것은 재해석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여지를 주게 된다. 책 한 권에서 이렇게 다양하고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동화책이야말로 상상력을 키우는데 제일이라는 서두의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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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배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65
모리 에토 지음, 고향옥 옮김 / 비룡소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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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 옛날의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요? 무엇이 그토록 생명력으로 가득찬 우리를 겁먹게 했던 것일까요? 열대여섯 살의 우리를 쥐고 흔들었던 불안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정체 모를 고통과 격랑에 표류하던 우리는 왜 그렇게 힘든 시간을 불러온 것일까요? 그 시기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 모리 에토의 글입니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에 불과하지만 전작으로 이미 그녀의 매력을 충분히 맛보았기에 제 기대는 대단합니다. 격정의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을 그녀는 어떻게 그렸을까요? 담담했지만 열망을 간직했던 그녀의 글을 기억하고는 전 안심합니다. 그녀라면 이들의 아픔을 현실적 왜곡없이 그려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예견했던 대로 이 책은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정적이었느냐하면 그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나이대 아이들의 호들갑과 근거없는 과장도 보이거든요. 그래서 깔깔거리며 읽을 수 있었지만 반면 제 눈에 비친 아이들은 걱정을 사서 하는 것도 같았니다. 그 아이들을 소개하자면요, 화자인 중학교 1학년생 사쿠라와 단짝이었던 리리, 리리를 죽자사자 따라다니는 나오즈미와 사쿠라의 좋은 이웃 오빠인 사토루가 있습니다. 사쿠라와 리리는 좋지 않은 아이들 모임에 끼게 되고 거기서 훔칠 물건을 배정받습니다. 장난 삼아 시작하던 것이 이제는 빼도박도 못하게되어 손쓸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립니다. 마트에서 필름을 훔치다 사쿠라와 리리는 걸리게 되고, 사쿠라는 불문율을 어기고 리리를 부릅니다. 이 일로 사쿠라는 리리를 배신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고, 리리 또한 자신이 사쿠라를 두고 도망쳤다는데에 괴로워합니다. 사쿠라는 이 일을 계기로 시즈카 패거리에게 빠져나오지만 리리는 계속해서 모임에 머뭅니다.


그리 대단한 실수도, 배신도 아니었건만 아이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와 순간적인 행동의 지배를 받습니다. 한때 자신의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사쿠라와 리리는 이제 남보다도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상이 되고 맙니다. 나오즈미는 두 아이를 연결해주려 애쓰지만 전과 같을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참, 사쿠라가 주인에게 걸렸을 때 사쿠라를 빼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사토루입니다. 사토루는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의 마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쿠라에게 사토루는 피난처이자 안식처가 됩니다.


사쿠라에게 사토쿠가 그런 존재였는지 모르지만 사토루의 마음은 외롭고 춥기만 합니다. 아버지도, 엄마도 없이 혼자사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토루의 마음의 병은 갈수록 커져가고, 이제 2000년이 되면 곧 멸망할지도 모를 지구에서 자신의 친한 이웃들을 구출하려 애를 씁니다. 하루가 다르게 사토루는 변해가고 우주선에 대한 집착은 병적일 정도입니다. 이제 자해까지 하는 사토루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사쿠라와 나오즈미는 외국에 있는 사쿠라의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띄우고 큰아버지에게도 도움을 요청합니다.

 

아이들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이 한바탕 꿈 같습니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다투고 고민하며 커나갑니다. 서로를 잊기 위해 애썼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우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죄책감은 서로를 더 멀리 밀어냈지만 작은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불필요한 것처럼 보였던 혼돈과 방황이 사실은 아이들을 어른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었나 봅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불안을 이겨내었고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역시 모리 에토입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하기보다 곁에서 담담히 지켜보는 것을 선택합니다. 방황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청소년기를 지나는 친구들에게 가장 필요한 지원과 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선택은 탁월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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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지 않는 손 - 서정홍 동시집
서정홍 지음, 윤봉선 그림 / 우리교육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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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글을 동시라 말하는 시인이 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얘기라 저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혹 그 반대는 아닐까요? 시인은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풀어줍니다. 동시는 아이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써야하기 때문에 쓰면 쓸수록 어렵다구요.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습니다. 오랜만에 동시를 읽었습니다. 시인이자 농부인 서정홍의 동시입니다. 서정홍은 현재 경상남도 합천에 있는 황매산에서 생태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에게 문학과 삶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글은 머리에서 나오지 않고 삶에서 나옵니다. 모든 삶의 영역이 그의 시의 소재가 되는 것이죠.

 

바람과 나무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나무는 손을 흔들며 길을 내준다.

바람이 세게 불면

나무는 팔을 흔들며 길을 내준다.

바람이 진짜 세게 불면

나무는 온몸 흔들며 길을 내준다.

 

손과 팔이 부러지고

온몸이 흔들려도

바람이 지나가는 길마다

길을 내준다.

  

 

지금껏 한번도 위의 시처럼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그 생각의 참신함에 놀라고 맙니다.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거였군요. 아마 저는 도식적인 사고만 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조화로운 삶이 무엇인지 서정홍은 바람과 나무를 통해 쉽게 전해주네요. 그러고 보니 그의 시는 참 쉽습니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 다음 시를 볼까요?

 

스트레스

 

우리 고모는

전자 제품 공장에 다닙니다.

그런데 공장에만 가면

스트레스를 받아 옵니다.

 

사장이 일 빨리빨리 하라고

만날 잔소리 해 대는 바람에

스트레스 받아서 미치겠다는데

할머니가 한마디 거듭니다.

 

"야야, 오데 받을 끼 없어서

스트레스를 받아 오노.

일을 했으모 돈을 받아 와야지."

 

"어머이, 돈은

월급날이 돼야 받아 오지요."

"야야, 스트레스는 만날 받아 오면서

돈은 와 만날 못 받아 오노."

 

"아이고오 어머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이소.

아하하하 아하하하......"

 

말도 안 되는 할머니 말씀에 

우리 고모 스트레스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사장의 잔소리에 신경이 날카롭던 고모가 할머니의 말씀에 깔깔대며 스트레스를 풉니다. 이런 대화도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군요. 이렇게 쉽기만 하다면 저도 동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입말체의 말이 서정홍 시의 특징입니다. 그는 글을 잘 쓰려면 말하듯이 쓰면 된다고 합니다. 시와 가까이 할 수 있는 좋은 길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가 쉽다고 해서 그의 마음자리까지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글쓰기 시간에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쓰라는 선생님 말씀에

나는 몇 번이나 쓸까 말까 망설이다

솔직하게 쓰기로 했다.

 

"술만 마시고 오면

어머니를 패고 못살게 구는

아버지를 감옥에 넣어 주세요.

다시는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해 주세요. "

 

솔직하게 글을 써 놓고 보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그래도 우리 아버지인데.......

아니지, 우리 아버지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을지도 몰라.'

 

글쓰기 시간에

아버지 생각을 해도 슬프고

어머니 생각을 해도 슬프다.

 

 

어린 아이의 복잡한 심경이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가 미운 아이는 아버지를 감옥에 넣고 싶습니다. 그러나 써 놓고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분명히 잘못한 사람은 아버지인데 아이의 마음이 아픕니다. 아버지가 밉지만 그것이 옳은 생각이 아니라는 걸 아이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착한 아이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아버지가 저도 밉군요. 선생님과 친구들이 알게 되는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아이에겐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삶이 주체적인 삶이라고 서정홍은 말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좋은 글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치유하기도 하지요. 슬펐지만 아이는 후련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직접 쓴 듯한 느낌의 시였습니다. 아이의 마음에 닿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시입니다. 그의 시가 가진 가장 커다란 장점이지요. 그외에도 서정홍의 시가 가진 특징은 이웃을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이웃은 단순히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안엔 개미와 개구리, 까치와 집 개, 떠돌이 고양이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들어있습니다. 그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짐작케 합니다. 그런 그인데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무 생각

 

"아아, 이런 시원한 해물탕은

지난달에 이사 간

민영이 아버지가 좋아하는 건데."

 

"여보, 무김치 드셔봐요.

맛도 들고 맵싸한 게 정말 맛있어요.

순동이 엄마가 옆에 있으면 잘 먹을 텐데."

 

맛있는 음식 먹을 때마다

동무 생각 저절로 난다는

아버지, 어머니 말씀 듣고

나도 문득 동무 생각이 납니다.

 

지난 여름, 교통사고로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뒤

오늘도 동생 슬기와 둘이서

저녁밥 먹고 있을

내 짝 슬찬이 생각이 납니다.

 

 

서정홍은 밥 한끼를 먹으면서도 이웃을 생각하네요. 대단한 찬이 있어서 이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습관같습니다. 몸에 배어서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습관 말입니다. 때론 본능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이웃에 대한 관심이 그의 시 여기저기서 드러납니다. 삶과 시의 이분법이 그에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삶이 시인 삶을 살기 때문에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질 때 서정웅은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자에게만 시가 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로 제게는 들립습니다. 서두에서 그의 시는 쉽고 동시는 쓰면 쓸 수록 어려운 글이란 서정웅의 말을 언급했습니다. 이 시집을 다 읽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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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의 꿈 푸른숲 역사 동화 5
배유안 지음, 허구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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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제발 죽지 마라."

 

전쟁으로 아비와 남편과 오라비를 잃은 여인은 어린 아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은 어떤 대의 명분보다 아들의 가슴에 남았습니다. 전쟁터에서 나간 아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해야했습니다. 어머니를 더이상 슬프게 할 순 없었거든요. 동화 '서라벌의 꿈'은 삼국 시대말 전쟁이 한창이었던 시절, 부소라는 어린 소년의 눈으로 그 시대를 그려주는 책이랍니다. 부소는 후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집에서 춘추공의 딸 고타소와 아들 법민을 보살피는 시종입니다. 부소의 아비는 부소가 여덟 살 때 낭비성전투에서 서른셋의 나이로 전사한 장수였습니다. 아비는 춘추공에게 풀밭같은 벗이었고 신라를 위해 명예로운 죽음을 당했지만, 그로 인해 부소는 늘 아비가 그리운 아이였 어머니는 그 후로 웃음을 잃었습니다.      

 

 

 

"전쟁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지만 신라를 지키려면 적과 싸워야지. 백제가 자꾸 쳐들어오는데 전쟁을 하지 않으면 신라가 망하고 말잖아."

 

"아버지께서는 더 이상 전쟁이 없도록 하기 위해 고구려, 백제와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하셨어."

 

후에 문무왕이 되는 법민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없도록 하기 위해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전쟁이라면 넌더리가 났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전쟁은 협상이라는 말로는 끝낼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멸망이라는 말로 종지부를 찍을 때 까지 치뤄야하는 숙명적 아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아직은 고타소와 법민, 부소의 것이 아니었을 때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신분의 차이는 있었지만 법민은 부소를 형이라 불렀고 고타소는 부소와 예쁘게 마음을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부소는 법민에게 동생의 정을 느꼈고 고타소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순정을 품었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지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어미처럼 모전(양털로 두텁게 짠 양탄자) 기술자가 되어 춘추공네 집사로 살았으면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는 그런 삶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진골일망정 고타소와 법민은 왕족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선택할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왕족으로 태어났기에 그들에게 정해진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고타소는 왜를 상대로 큰 무역 상단을 운영하는 집안의 자제인 품석과 혼인을 합니다. 춘추공은 결혼과 함께 품석에게 대야성 성주라는 직책을 맡깁니다. 품석은 훤칠한 키에 잘 생기고 무예도 출중합니다. 그러나 성품은 얼굴에 미치지 못했던 듯 합니다. 품석은 부하의 아내를 빼앗았는 등 방종한 행실로 인심을 잃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백제에게 성을 빼앗기게 됩니다. 성의 함락으로 품석과 고타소는 목베임을 당하고 시신은 목이 없는 채로 거두어집니다. 부소가 전쟁터로 나가기 전 고타소는 부소에게 예쁜 새가 수놓아진 비단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부소 또한 고타소에게 나무로 만든 새를 선물로 줍니다. 이것이 마지막일 줄 그누가 알았을까요?

 

한편 전쟁터에서 제대로 된 싸움도 못하고 고구려군에게 붙잡힌 부소는 동료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신라군의 비밀을 털어놓게 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배신자로 찍혀 신라로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어미에게만은 알려야겠다 싶어 부소는 아무도 몰래 집에 들리고 그 후 3년 여를 여기 저기 떠돌게 됩니다. 어미가 모전을 짜던 모습을 보고 자란지라 부소는 모전이 가장 편하게 느껴집니다. 부소는 단양의 모전 공방에 들어가고 거기서 정성을 다해 모전을 짭니다. 그래서 고타소의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 소식은 고구려의 사신으로 가던 춘추공을 우연히 만나면서 그의 입을 통해 듣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예쁜 웃음과 고운 마음씨를 가진 고타소에게 닥친 참혹한 죽음에 부소는 눈물을 멈추지 못합니다. 살아 생전 고타소는 미덥고 안심이 된다며 고타소에게 풀밭같은 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말을 들었을 때 고타소는 기뻤습니다. 부소는 아비처럼 법민에게는 풀밭 같은 벗이 되고 싶었고 고타소 곁에는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바람은 영원히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부소에게 어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은 고통을 잊으려고 모전을 짜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기억을 채우려고 모전을 짠다구요.

 

"잊으면 가슴이 텅 비지 않겠니? 내겐 아버지 어머니도, 오라비도, 네 아버지도 모두 살아있다. 그분들과 행복했던 기억을 고운 문양으로 놓는 거란다." 

 

"저도 그럴 수 있을까요?"

 

"세월이 힘을 준다고 하지 않더냐? 시간이 지나면 너도 그럴 수 있을 게다."

 

세월이 흐르면 부소도 어미처럼 그렇게 되겠지요? 참 아름답고 슬픈 동화를 읽었습니다. 역사와 운명을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아릿하게 합니다.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전쟁을 해야하는 아이러니에 콧끝이 찡해집니다. 역사책에 이름도 적히지 못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어갔을까요?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갔습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삼국통일을 잘했니 못했니 하는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역사를 보는 관점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네요. 역사는 많은 말을 하지만 또 말이 없기도 하니까요. 단지 저는 그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들이 있었네요. 그리고 오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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