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지 않는 손 - 서정홍 동시집
서정홍 지음, 윤봉선 그림 / 우리교육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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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글을 동시라 말하는 시인이 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얘기라 저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혹 그 반대는 아닐까요? 시인은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풀어줍니다. 동시는 아이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써야하기 때문에 쓰면 쓸수록 어렵다구요.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습니다. 오랜만에 동시를 읽었습니다. 시인이자 농부인 서정홍의 동시입니다. 서정홍은 현재 경상남도 합천에 있는 황매산에서 생태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에게 문학과 삶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글은 머리에서 나오지 않고 삶에서 나옵니다. 모든 삶의 영역이 그의 시의 소재가 되는 것이죠.

 

바람과 나무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나무는 손을 흔들며 길을 내준다.

바람이 세게 불면

나무는 팔을 흔들며 길을 내준다.

바람이 진짜 세게 불면

나무는 온몸 흔들며 길을 내준다.

 

손과 팔이 부러지고

온몸이 흔들려도

바람이 지나가는 길마다

길을 내준다.

  

 

지금껏 한번도 위의 시처럼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그 생각의 참신함에 놀라고 맙니다.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거였군요. 아마 저는 도식적인 사고만 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조화로운 삶이 무엇인지 서정홍은 바람과 나무를 통해 쉽게 전해주네요. 그러고 보니 그의 시는 참 쉽습니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 다음 시를 볼까요?

 

스트레스

 

우리 고모는

전자 제품 공장에 다닙니다.

그런데 공장에만 가면

스트레스를 받아 옵니다.

 

사장이 일 빨리빨리 하라고

만날 잔소리 해 대는 바람에

스트레스 받아서 미치겠다는데

할머니가 한마디 거듭니다.

 

"야야, 오데 받을 끼 없어서

스트레스를 받아 오노.

일을 했으모 돈을 받아 와야지."

 

"어머이, 돈은

월급날이 돼야 받아 오지요."

"야야, 스트레스는 만날 받아 오면서

돈은 와 만날 못 받아 오노."

 

"아이고오 어머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이소.

아하하하 아하하하......"

 

말도 안 되는 할머니 말씀에 

우리 고모 스트레스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사장의 잔소리에 신경이 날카롭던 고모가 할머니의 말씀에 깔깔대며 스트레스를 풉니다. 이런 대화도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군요. 이렇게 쉽기만 하다면 저도 동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입말체의 말이 서정홍 시의 특징입니다. 그는 글을 잘 쓰려면 말하듯이 쓰면 된다고 합니다. 시와 가까이 할 수 있는 좋은 길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가 쉽다고 해서 그의 마음자리까지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글쓰기 시간에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쓰라는 선생님 말씀에

나는 몇 번이나 쓸까 말까 망설이다

솔직하게 쓰기로 했다.

 

"술만 마시고 오면

어머니를 패고 못살게 구는

아버지를 감옥에 넣어 주세요.

다시는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해 주세요. "

 

솔직하게 글을 써 놓고 보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그래도 우리 아버지인데.......

아니지, 우리 아버지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을지도 몰라.'

 

글쓰기 시간에

아버지 생각을 해도 슬프고

어머니 생각을 해도 슬프다.

 

 

어린 아이의 복잡한 심경이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가 미운 아이는 아버지를 감옥에 넣고 싶습니다. 그러나 써 놓고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분명히 잘못한 사람은 아버지인데 아이의 마음이 아픕니다. 아버지가 밉지만 그것이 옳은 생각이 아니라는 걸 아이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착한 아이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아버지가 저도 밉군요. 선생님과 친구들이 알게 되는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아이에겐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삶이 주체적인 삶이라고 서정홍은 말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좋은 글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치유하기도 하지요. 슬펐지만 아이는 후련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직접 쓴 듯한 느낌의 시였습니다. 아이의 마음에 닿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시입니다. 그의 시가 가진 가장 커다란 장점이지요. 그외에도 서정홍의 시가 가진 특징은 이웃을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이웃은 단순히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안엔 개미와 개구리, 까치와 집 개, 떠돌이 고양이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들어있습니다. 그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짐작케 합니다. 그런 그인데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무 생각

 

"아아, 이런 시원한 해물탕은

지난달에 이사 간

민영이 아버지가 좋아하는 건데."

 

"여보, 무김치 드셔봐요.

맛도 들고 맵싸한 게 정말 맛있어요.

순동이 엄마가 옆에 있으면 잘 먹을 텐데."

 

맛있는 음식 먹을 때마다

동무 생각 저절로 난다는

아버지, 어머니 말씀 듣고

나도 문득 동무 생각이 납니다.

 

지난 여름, 교통사고로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뒤

오늘도 동생 슬기와 둘이서

저녁밥 먹고 있을

내 짝 슬찬이 생각이 납니다.

 

 

서정홍은 밥 한끼를 먹으면서도 이웃을 생각하네요. 대단한 찬이 있어서 이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습관같습니다. 몸에 배어서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습관 말입니다. 때론 본능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이웃에 대한 관심이 그의 시 여기저기서 드러납니다. 삶과 시의 이분법이 그에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삶이 시인 삶을 살기 때문에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질 때 서정웅은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자에게만 시가 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로 제게는 들립습니다. 서두에서 그의 시는 쉽고 동시는 쓰면 쓸 수록 어려운 글이란 서정웅의 말을 언급했습니다. 이 시집을 다 읽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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