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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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간혹 이런 책들이 있어. 리뷰를 올리고 싶지만 내 능력이 닿지 않는 책 말이야. 그런 책들이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야. 속이 상하는 거지. 그간 놓친 책들이 꽤 있었어. 정말 괜찮은 책인데 글로 옮기지 못하다니......이렇게라도 글을 올리고 싶은 건 이 책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야. 그 감상을 어떤 식으로든 남기고 싶었거든.

 

인간이 얼마나 감정적인지 알아? 내가 오래도록 김영하의 책을 읽지 않은 이유를 말하면 웃음이 날거야. 그 이유가 뭐냐구? 그의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이유야. 하여간 이런 이유로 작년까지 그의 책을 한번도 읽지 않았다는 거 아니야.

 

'너의 목소리가 들려'란 책으로 작년에 그를 처음 만났지. 내겐 크게 남지 않은 책이야. 한번 읽고 다시 한번 훑어보기를 했는데도 그냥 그랬어. 하지만 그 한번이 있었기에 이 책을 집어들었을거야. 오늘 그의 얼굴을 다시 보니 괜찮게 생겼더만. 공일오비의 장호일이랑 금뚝딱의 박서준을 닮은 거 같았어. 그간 왜 싫어했을까? 편견이란 이런 건가봐.

 

이 책 무척 마음에 들었어. 책도 얇고 제목도 확 들어오잖아. 아멜리 노통브의 '살인자의 건강법'을 읽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몰라. 그 책도 재미있었거든. 냅다 읽었지. 정말 살인자를 주인공으로 했더만. 작가들은 대단해. 어떻게 살인자를 머리 속에 넣어둘 수 있을까? 그 잔상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뭐, 하여간.

 

주인공의 이름은 김병수래. 나이는 일흔이고. 25년전 살인을 그만 둔 후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나봐. 그에겐 은희라는 딸이 하나 있어. 그가 죽인 여자의 딸이야. 내 아버지는 나를 유괴한 유괴범이었다는 드라마의 광고 카피같지? 딸 아이는 자신이 입양됐다걸 알아. 그가 말해 주었거든. 근데 그 이후로 서먹해졌다나봐.

 

이 책이 마음에 드는 건 군더더기가 없어서야. 난 묘사가 많은 문장은 좀 괴롭거든. 왜 글로 모든 걸 다 설명하려 하지? 차라리 글보다 사진이나 그림을 넣으면 어떨까 싶어. 소설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게 묘사였던 것 같아. 예전 작가들이 묘사를 아주 길게 하셨지.

 

한 번 아래를 봐. 사설이 없잖아. 의도적으로 문체에 신경을 안쓴 것 처럼 썼지? 김훈 같은 문체도 좋지만 이렇게 편한 문체도 괜찮지 않아? 난 여기서 여백을 느꼈어. 독자가 상상할 여지를 다양하게 남겨줬으면 좋겠어. 감동만이 능사는 아니라구. 이 책의 장점은 시원시원하다는거야.

 

시를 가르치는 문화센터의 강사는 내 또래의 남자 시인이었다. 그는 첫 수업 시간에 엄숙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해서 나를 웃겼다.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그때는 이미 수십 명의 사냥감을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해 땅에 묻은 뒤였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이 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살인은 시라기보다 산문에 가깝다.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살인은 생각보다 번다하고 구질구질한 작업이다.

 

어쨌거나 그 강사 덕분에 시에 흥미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나는 슬픔은 느낄 수 없도록 생겨먹었지만 유머에는 반응한다.

 

어때? 내가 재미있다고 한 이유를 알겠지? 병수씨의 예전 직업은 수의사였대. 그래서 살인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더군. 병수씨가 살인을 멈춘 이유를 내가 말했던가? 살인에 아무 쾌감이 따르지 않더래. 그래 그만 뒀다더군. 요즘 병수씨는 치매에 걸려 사투중이야. 기억이 없어져 무척 괴로운가봐. 뭣보다 은희를 기억 못할까봐 걱정이지. 은희는 농대를 나와 지역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어.

 

최근 병수씨가 사는 동네에서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있어. 병수씨는 자신이 한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지. 아닐거라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야. 요즘 병수씨의 신경을 거스리는 놈 하나가 나타났어. 차에 선팅을 하고 사냥용 지프를 몰고다니는 놈이야.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고, 병수씨는 예삿놈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지. 그 놈의 트렁크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걸 본 적이 있거든.

 

그런데 하필 은희가 사귀는 남자라며 그놈을 데려 온게 아니야? 기억이 왔다갔다 하는 중에도 병수씨 기가 막히지. 게다가 병수씨 주변에서 살인 사건은 계속 생기고, 경찰서의 안형사라는 자가 자꾸 알짱대. 한번은 경찰대 학생들까지 무더기로 데려왔어. 병수씨, 자신의 입을 단속하느라죽을 뻔했지. 자랑하고 싶어서 말이야.

 

참, 요즘 은희가 계속 집에 안들어오는거야. 병수씨 걱정이 여간 아니지. 은희만큼은 자신이 지켜야한다고 생각하거든. 은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각오가 돼 있지. 어느날 사복입은 경찰이 문을 두드리네. 병수씨를 주의해 봤나봐. 병수씨 그들 패거리 중에서 그 놈을 본거야. 박주태란 놈 말이야.

 

병수씨, 저놈 잡으라 외치는데 형사들이 웃어. 그놈이 형사라는 거야. 그리고 자기가 은희를 죽였다는구만. 은희는 재가 요양보호사라는 거야. 애당초 병수씨에겐 딸이 없었대. 이게 어찌된 일이야. 모든게 다 흔들려. 뒤죽박죽이고. 게다가 은희라는 이름의 아이는 제 부모가 죽었을 때 같이 죽었다는 거야. 병수씨, 정신을 못차리겠는거지.

 

이 책을 읽고나니 예전에 본 영화가 떠올라. 제목은 기억이 안나는데, 범인을 무섭게 추적하고보니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어. 식스센스도 있지. 알고보니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이었어. 이런 류의 결말은 한동안 얼 빠지게 하지. 충격이 커서 말이야. 그런 식의 반전까진 아니어도 이 소설 또한 만만친 않아.

 

이럴 때 즉 어떤 뜻인지는 알겠는데 설명하라면 할 수 없을 때, 나는 맨 뒤의 해설을 봐. 이 책은 권희철이 썼더군. 그의 해설을 몇 편 읽은 적이 있어. 그를 직접 본 적도 있지. 그의 해설은 처음엔 갸우뚱하게 하다가도 결국엔 굴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 처음에 왜 갸우뚱하냐고? 그가 말하는 걸 나는 말할 수 없으니까. 지기 싫어 그러는 거지 뭐 큰 이유가 있겠어.

 

독자로서 바람이 있다면 각기 다른 해설을 보고 싶어. 한 책을 읽고 표현되는 평론가들의 각기 다른 시선 말이야. 권희철도 쓰고, 신형철도 쓰고, 고봉준도 쓸 수 있잖아. 같이 쓰면 안되나? 그럼 다양한 시각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한 책에 한 사람의 해설만 실으란 법은 없으니 말이야.

 

이 책에 대해 다른 평도 있더만 나는 좋았어. 김영하의 글을 두 편 밖에 읽지 않아 기대가 없거나 낮기에 좋게 말하는 수도 있겠지. 그럼 어때.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보는 사람도 있지. 김영하는 작가의 말에서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고 했어.

 

나도 그런 말로 작가에게 돌려주고 싶어. '이것은 내 리뷰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라고 말이야. 이렇게라도 책에 대한 소감을 쓰고 싶어 애쓰는 내가 기특해. 김영하, 당신은 더 멋지고 말이야. 고마워, 작가분. 간만에 리뷰쓰는 재미를 알게해 줘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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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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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관계로 마음을 다친 사람들은 나락을 경험한 자들이다. 마음을 이기지 못한 생각이 얼마나 비참하며, 시간만이 구원이 되는 현실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그들은 안다. 인간 관계의 친밀함이 지극히 허약한 기반 위에 서있었음을 그들은 선연히 보았다. 반추할 때마다 생채기에서 흐르는 피는 함께 했던 시간이 깊을수록 붉었다. 빛나던 시절이 과연 있긴 한건지 되묻는 것조차 의미를 잃을 때, 죽어버린 자신을 통해 그들은 비로소 절연의 상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 세계의 종언을 겪은 사람은 안다. 인간 관계에 자신을 밀어넣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임을. 그런 어리석은 일이 되풀이 되어선 안되며, 그래야 자신을 지킬 수 있음을 상기하며 그들은 이를 삶의 철칙으로 만든다. 그러나 예전의 자신이 이미 사라지고 없음을 절감할 때마다 끝없는 슬픔을 느끼며, 죽어버린 자신을 향해 조사를 바친다.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모두(冒頭)의 이 글은 이유도 모른채 친구들에게 버림 당한 다자키 쓰쿠루의 처절함을 감정적 동요없이 단정하게 드러낸다. 일체감을 느꼈던 네 명의 친구에게 일방적으로 내침당한 쓰쿠루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벗어나지도, 극복하지도 못한채 깊숙이 숨겨져 있다. 그 시간은 다자키 쓰쿠루를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못하며, 한때 싱그러웠으나 이제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폐쇄된 자로 만들었다. 16년이란 세월조차도 그를 원상으로 되돌리진 못했다. 돌아갈 길이 막힌 자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일상에 자신을 묶은 채 최소한의 관계만으로 삶을 유지하는 수 밖에 없었다. 기모토 사라를 만나기 전까지 다자키 쓰쿠루의 삶이 그러했다.

 

절연의 경험은 내게도 있다. 가족보다 깊은 유대 속에 십여 년을 함께 했던 선배와의 관계에 선을 그어야 했을 때, 그래야 살 것 같았을 때 내 속은 말이 아니었다. 그만 보자는 이야기는 내가 했지만 인간 관계의 종국이 이런 것인가란 생각에 몇 년을 쓰라림 속에 지내야했다. 소중했던 시간들이 전락하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신뢰가 흔들린 관계에서의 만남은 불편하고도 씁쓸했다. 정이 뭐라고 그래도 그리웠기에 몇 번 만나긴 했지만, 전같지 않은 마음을 확인하는 건 차라리 고문이었다. 관계에서의 올인은 모 아니면 도였다. 하나지만 전부였던 사이가 틀어지고나니 모르는 사람보다 못했다. 남편과 자식이 있어도 빈 자리는 메워지지 않았다.

 

덮어버린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기모토 사라는 여자의 직감으로 다자키 쓰쿠루에게 잃어버린 시간이 있음을 발견해낸다. 이 문제의 해결없인 쓰쿠루의 삶이 정상적이지 못하리란 생각에 그녀는 친구들을 만나기를 종용한다. 만나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시도조차 이미 놓아버린 쓰쿠루였지만, 미결이 답일 수 없음을 알기에 용기를 낸다.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 쓰쿠루와 함께 모임을 만들던 친구들이었다. 각자의 아름다움이 어울리며 만들어내는 조합은 환상적이었다.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일체감 속에 쓰쿠루는 행복감으로 충일했다. 그런 그들에게 쓰쿠루는 어떤 이유도 듣지못한채 추방당했다.

 

16년이 지나 다시 찾아온 쓰쿠루에게 아카와 아오는 상상도 못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로는 몇 년 전 괴한에게 살해됐고, 구로는 현재 핀란드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카는 중견 회사의 대표로, 아오는 수입차 업체의 딜러로 그들의 색채에 맞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쓰쿠루를 쫓아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며 미안해 했지만,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이 없음을 슬프게 예감한다. 왜 시로는 자신을 성폭행범으로 몰았으며, 구로는 확인도 하지 않은채 자신에게 돌을 던진걸까? 그러나 그녀 둘을 놓고 성적인 꿈을 자주 꿨던 쓰쿠루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당혹감을 느낀다. 사라는 쓰쿠루를 추동해 구로까지 만나게 한다. 핀란드에서 그는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으며 마침내 사건의 본질을 알게 된다. 아름답고 섬세했지만 당시 성폭행을 당해 정신이 불안정한 시로를 위해 구로가 결단을 내려야 했으며, 쓰쿠루가 빠진 모임은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최고를 맛본 자는 차선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토록 찬란했던 시간이 다시 올 수 없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그늘을 만들었고, 모임의 의미는 각자 찾아야했다. 아카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성장통의 일부로, 아오는 생의 정점을 찍었던 한 시절의 표상으로, 죽은 시로는 말 못할 아픔의 출발지로, 구로는 짝사랑의 환희와 고통이 공존했던 곳으로 모임을 조각했다. 특별한 색채가 없다 생각하며 자신을 별볼일 없는 자로 간주했던 쓰쿠루는,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빛났으며 현재 또한 무언가를 담기에 충분한 그릇이라는 사실을 구로의 입을 통해 듣게 된다. 불현듯 사라가 떠오른다. 그토록 강력하게 끌리는 사람은 처음이다. 그녀에게 자신 외에 다른 남자가 있다할지라도 쓰쿠루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기로 마음 먹는다.

 

쓰쿠루는 새로운 삶을 향해 도전장을 내밀었다. 나도 용기를 내기로 결심한다. 다음에 선배를 만나게 되면 가슴 속에 있는 말들을 차분히 전할 생각이다. 속으로 삭이기보다 밖으로 드러낸 후 선배의 입장도 들어볼 계획이다. 둘러가지 않을 것이며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접근도 나와 선배를 위해서 불허할 것이다. 그래야 내 삶이, 어떤 식으로든 나와 연결된 선배의 삶이 평안해 질테니까. 오해가 있으면 풀고, 사실이라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작정이다. 설사 쓸모없거나 덧없는 짓이 될지라도 관계를 포기하는 미련함 보다는 나으리라. 관계의 단절은 그 어떤 것보다 내게 상실감을 불러왔다. 자신을 지키겠다고 한 행동이 결국 자신을 더 외롭게 만들었다. 비온 뒤 땅이 굳는다 했던가. 쓰쿠루의 내일이 열려있는 것처럼 나의 내일도 열리길 소망한다. 그의 순례가 의미있었던 것처럼 내 여정도 그리 되길 바라며 발을 내딛기로 다시 한번 마음 먹는다. 깨어진 관계로 한때 나락에 떨어져 봤던 내가 이 책에서 얻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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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입니다 - 2005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 대상 수상작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 수상작 11
이혜란 글 그림 / 보림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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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 월간지에서 가수 이적의 어머니로 유명한 여성학자 박혜란씨의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그녀는 네 살짜리 손녀와 있었던 일을 소개하더군요. 하루는 손녀가 그러더래요. "할머니, 할머니 가족은 누구예요?" 그래서 손녀 이름을 대며 "응, 우리 ○○이가 내 가족이지." 그랬더니 할머니는 같이 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가족이 아니라며, 나중엔 눈물까지 글썽이더래요. 아무리 가족의 개념을 설명해줘도 아이는 아니라며 고개를 내젓더래요.

 

그 글을 읽은지 얼마 안돼 저희 딸이 "엄마, 친할머니는 우리 가족이야?"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 질문을 받으니 즉시 말이 안나오대요. 시어머니니 당연히 친족이라 여겼지만 어머니를 우리 가족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친정 엄마 또한 그랬던 것 같아요. 아마 가족의 개념을 무의식적으로나마 같이 사는 친족으로 정해놓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만약 저희 딸이 공부 때문에 외국에서 산다면 같이 안살아도 당연히 가족이라 생각하겠죠. 같이 살아야 가족이라는 개념과, 같이 안살아도 내 자식이니 가족이라는 개념이 제 안에 혼재돼 있었어요.

 

그래서 가족이 진짜 어떤 관계를 말하는지 알고 싶어 검색해 봤어요. 다음엔 '부부를 중심으로 하여 그로부터 생겨난 아들˙ 딸˙ 손녀등 가까운 혈육으로 이뤄진 집단'이라 나왔더군요. 그러나 그 의미만으론 이 시대의 가족 관계의 변화를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러기 가족의 경우, 너무 오래 헤어져있다보니 부모 자식간, 때론 부부간에도 서먹서먹해지는 일들이 생기고 있으니까요. 가족이란 한 집에 함께 살면서 끼니를 해결하는 식구(食口)가 됐을 때 비로서 그 의미를 충족하는 관계가 되는 게 아닐까라 결론지었답니다. 식구가 됐을 때 타인도 품지만, 식구가 되지 못하면 가족조차도 남이 되는 일들이 생기니까요.

 

그런 가족 이야기를 다루는 동화책이 있어 펴봤어요. 처음 보는 책이라 생각했는데 출간된지 벌써 8년이나 됐더군요. 언제 이런 책이 나왔을까요? 너무 시간이 흘러 만난 건 아닌가 싶어 좀 아쉬웠답니다. 이 책은 보림창작그림책 공모전 수상작이래요. 저자를 몰랐다면 제가 좋아하는 작가 이형진의 그림책이라고 오해할뻔 했어요. 이 책엔 특징적인 부분들이 많아요. 우선 아이의 시점에서 아이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글은 많지 않은데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구요, 그 짧은 말 속에 아이의 가족이 처한 상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간단해요. 비록 여유는 없지만 엄마아빠가 짜장면 가게를 하며 오손도손 사는 아이의 집에 어느날 느닷없이 할머니가 택시를 타고 들이닥쳐요. 할머니는 아빠와 따로 살고 있었고, 어릴 때도 그랬대요. 그런데 할머니가 뭔가 이상해요. 어디서 옷을 주워 오질않나, 밥을 흘리고 먹질 않나, 게다가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요. 요강을 엎지르지를 않나, 옷에 실례를 하지를 않나, 그것도 모자라선지 손님앞에서 옷도 자꾸 벗어요.

 

 

이외에도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신 거예요. 그런 할머니가 아이는 싫어요. 그런대도 아빠는 할머니를 돌려보낼 수 없대요. 우리는 가족이니까요. 이게 다예요. 추측컨대 어린 시절 아빠는 할머니에게 제대로 된 보살핌도 받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늙고 병들자 할머니는 아빠를 찾아온 거예요. 그런 할머니를 아빠는 방이 딸린 가게에서 모셔요. 아빠가 할머니를 모시는 것은 단순한 체념이자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예요. 모시지 않는다해도 뭐라 할 사람 없지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하려는 것 뿐이지요. 그러나 아빠는 마지못해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할머니를 돌봐요. 그런 아빠와 엄마를 사랑하기에 아이는 더 이상 할머니를 싫어하지 않고 가족으로 받아들여요.  

 

이 책은 할머니가 가족이라고 결론을 내려요. 저도 부모님이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할머니는 당연히 우리 가족이었어요. 할머니없는 제 어린 시절은 상상도 할 수 없구요. 그런 저조차도 같이 살지 않는 시어머니를 우리 가족으로는 생각치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또한 친정 엄마도 우리 가족은 아니었던거지요. 앞에서 가족에 대한 정의를 제 나름대로 내렸지만 다시금 혼란이 오네요. 그럼 같이 살지 않는 시어머니나 친정 엄마는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하지요? 가족은 가족인데 우리 가족은 아닌건가요? 시대적 상황이 너무 달라져 이제 가족의 의미가 전처럼 단순할 수 없게 됐네요. 그럴 때 이 책은 진지하게 가족이 무엇인지를 생각케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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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하우스
캐슬린 그리섬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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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숨이 주인의 기분에 달려있던 시대에, 노예들은 그 어떤 것보다 생존을 가장 존엄한 가치로 붙들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느껴질만큼 견딜 수 없는 일을 겪을 때에도, 생존은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였다. 구차하게라도 목숨을 보존해야 했다.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유일한 무기가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주인에 의해 결정되고, 어떤 권리도 없던 그들에겐 오로지 의무란 이름의 복종만이 주어졌다. 복종은 자식들에게도 기필코 가르쳐야 할 생존 수칙이었다. 그런 험악하고 무서운 시대를 '키친하우스'는 이야기하고 있다.

 

'키친하우스'는 18세기 말 남부 버지니아의 한 농장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아일랜드계 백인 노예인 라비니아다. 라비니아는 흑인 노예들이 거주하는 키친하우스로 보내져, 농장주의 딸인 흑인 노예 벨에게 맡겨진다. 벨은 자신을 홀대하는 주인에게 화가 나 라비니아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 또한 이곳에서 새 가족을 만난 기억을 되살려 라비니아를 가족으로 품는다. 그때 벨의 나이 열여덟, 라비니아는 일곱 살이었다. 키친하우스에는 제이콥 아저씨와 마마와 파파, 그리고 마마와 파파의 딸인 쌍동이 비티와 파니가 있다. 따로 살지만 마마와 파파의 아들 벤은 라비니아가 나중에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다. 백인 노예에 고아였지만 라비니아는 그곳에서 그들의 보살핌 아래 따스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제임스가 주인으로 있을 때는 살만했다. 노예 감독관 랭킨이 아무리 잔혹하게 굴어도 견딜 수 있었다. 주인이 돌아오면 바로 잡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주인이 몇 년간 병석에 누워있을 때에도 노예들은 힘을 낼 수 있었다. 주인은 그런대로 관대했고 노예들을 챙길 줄 알았다. 비록 벨이 자신의 딸임을 숨겼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벨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런 은폐가 비극의 씨앗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안주인은 벨을 남편의 숨겨진 여자로 오해하곤 정신이 멀쩡했을 동안 고통 가운데 살았고, 아들인 마셜은 자신의 어머니를 힘들게 한 여자라며 누이인 벨을 증오했다.  

 

결국 주인이 세상을 떴다. 그동안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아이를 몇이나 잃은 안주인은 아편 중독으로 침대에만 누워있었고, 노예감독관 랭킨의 악행은 차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셜은 가정교사의 가혹한 체벌과 훈육으로 이미 정상이 아니었고, 가정교사가 쫓겨난 후에는 노예감독관 랭킨과 어울려 나쁜 짓만 일삼았다. 호시탐탐 벨을 넘보던 랭킨은 벨과 사랑하는 사이인 벤을 미워해, 누명을 씌운 후 한쪽 귀를 자른다. 어린 나이인데도 술에 취해 살던 마셜은 벨이 자신의 누이인지도 모른채 어느날 그녀를 성폭행한 후, 아이까지 낳게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라비니아와 벨의 입을 통해 번갈아가며 들려진다.

 

마셜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키친하우스에 위기감이 감돈다. 마셜이 공부하러 나가있던 동안에는, 주인이 농장을 맡게 한 감독관 윌이 있어 좋았다. 그는 공정했고 노예들을 배려했다. 그런데 마셜이 온다니, 마마와 파파를 비롯한 노예들은 농장이 결코 전 같을 수 없음을 알고 불안에 떤다. 게다가 자신의 이모네 집에 있던 라비니아를 부인으로 맞아 데려온단다. 마셜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잘알고 있던 키친하우스 사람들은 앞으로의 일에 걱정을 감출 수 없고, 순진한 라비니아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거란 생각에 행복해한다. 마셜은 집에 오자마자 본색을 드러내고, 라비니아에게도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져 라비니아는 마음이 편치 않다. 마셜은 신분이 달라졌다며 키친하우스에 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다.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고, 게다가 남편과 비티의 관계가 아무래도 수상하다. 여자로서의 질투와 예전에 함께 했던 시간들을 생각하곤 라비니아는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낀다. 예전 시어머니가 왜 그렇게 우울했으며 마약에 의존했는지를 이제서야 깨닫게 된다. 마셜은 농장 경영엔 관심도 없고, 노예들에게도 가혹하게 대한다. 빅하우스에서는 누구도 행복하지 않고, 그런 주인 밑에 있는 키친하우스도 그늘이 짙다. 비티는 이미 마셜의 아이를 몇이나 낳았다. 일상화된 강간과 폭력 때로는 살인까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키친하우스의 사람들은 마셜로부터 벗어나기로 마음 먹는다. 

 

이 책에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비애와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런 이야기가 참 많았다. 키친하우스에는 노예들의 피와 같은 눈물이, 빅하우스에는 끊이지 않는 비극이 마른 눈물로 되풀이 되었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부리는 이상 빅하우스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지옥과 같은 그곳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키친하우스뿐이었다. 자신들이 키웠던 사람으로부터 자신들의 딸이 유린 당하고, 자신들의 손녀가 팔려가는 잔혹한 일을 겪었음에도 그들은 증오를 택하기보다 사랑을 붙들었다. 도덕을 지킬 수도, 항변할 수도 없는 곳이었지만 감내하며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냈다.

 

그러나 그토록 폭력이 난무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수시로 훼손됐지만 키친하우스에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들의 주인은 빅하우스에서 노예들을 다스렸지만 실제 그 곳의 행복은 노예들이 거주하던 키친하우스에서 비롯되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품었던 그들이 있는 곳에만 행복이 머물 수 있었다. 마셜조차도 키친하우스에 있을 때에야 잠시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부조리와 억압에 아무런 말도 못한채 무력하게 당하고 있었지만, 마침내 작은 바람을 이룬 키친하우스의 흑인 노예들을 통해 결국 사랑만이 모든 걸 이뤄내는 부드럽고 강력한 힘임을 실감한다. 오랜만에 도저하고 흡인력있는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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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껴쓰기로 연습하는 글쓰기 책
명로진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언론사 시험을 앞둔 기자 지망생들이 시간은 없고 필력은 늘지 않을 때, 비책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필사라 한다. 어디 기자 지망생 뿐일까, 작가 지망생들의 경우 필사는 불문율처럼 내려오는 글쓰기 방법의 하나다. 또한 대입 논술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게도 글쓰기는 반드시 넘어야하는 산이다. 한때 강남의 유명 대입 논술 학원에서는 글 잘 쓰기로 소문난 어떤 작가의 글을 필사하게 한 후, 아예 외워버리라고 했다 한다. 원론을 따질 겨를이 없을 때 필사 즉, 베껴쓰기는 최적의 방법이지 싶다. 

 

예전부터 베껴쓰기에 관한 책을 읽고 싶었다. 베껴쓰기가 좋다는 말을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좋은지 알고 싶었고, 무엇보다 좋은 작가의 빼어난 문장을 소개받고 싶었다. 그래선지 이 책의 재출간 소식이 반갑게 다가왔다. 책을 읽기 전 마침 기회가 되어 소개 글을 잠시 보게 됐는데, 몇 마디 문장이 꽤 가슴에 와닿았다. 지극히 당연한 내용인데도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바라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는 박웅현의 광고 카피가 어떤 의미인지를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문장이었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것은 접속사가 아니다. 저자가 가진 의식이다. 그 의식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한다. 』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것을 접속사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자각이 처음 들었다. 이렇게 피상적인 눈으로 사람과 사물을 대하고 글을 썼을 걸 생각하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왜 그동안 내 생각은 의식이란 데에까지 나가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이 세 문장은 나를 당혹스럽게도 했지만 동시에 아름다움도 선사해, 마치 시어처럼 나는 몇 번이나 되뇌었다. 

 

이 책은 목차안의 제목만 유념해도 글 쓸 때 적잖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중 몇을 옮겨보자면 '무엇을 쓸지보다 어떻게 쓸지를 생각하라', '쉽게 쓰는 게 정답이다', '어미를 잘 써라', '잘난 척하는 마음을 버려라', '그리고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불필요한 접속부사 빼기', '소리내어 읽으며 어색한 문장을 찾아라', '한 번에 하나씩 써라', '독자의 입장이 되라', '독자의 이해를 구하지 말라', '글은 이어진 사슬이다', '글을 쓰려면 탄탄한 플롯을 짜야 한다', '끝을 위한 비장의 무기를 마련하라', '틀린 부분이 없는지 사전을 찾아라', '책이 내 것이라야 책 속 내용도 내 것이 된다'등이 있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다시금 생각케 하는 제목들이었다. 가만히 점검해보니 나는 이 책의 지침과 어긋나게 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쓸지 보다 무엇을 쓸지를 생각했고, 쉽게 쓰기보다 어려운 말 몇 개를 넣어 현학적인 느낌이 나도록 쓰고 싶어했으며, 잘나지 못해선지 잘난 척 하고 싶어했다. 또한  접속부사를 끔찍이도 사랑했으며, 어색한 문장이 고쳐지지 않을 때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한 번에 하나씩 쓰기보다 서너 개 쓰기를 원했고 그런고로 갈팡질팡하기도 했다. 독자의 입장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에 내 입장만 생각했고, 그럼에도 독자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쓸데없는 눈치를 보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글은 이어지지 못하고 딱딱 끊어졌으며, 탄탄한 플롯을 짜기도 전에 서두가 잡혀지면 글부터 썼다. 또 결론은 대충 얼버무렸고, 서론과 결론이 따로 놀 때도 있었다. 책이 내 것이 될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책 속 내용은 좋은 얘기에 그치고 말았고 이런 적은 부지기수다. 총 30강의 내용대로 가자면 내 부족한 점은 끝도 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독자를 생각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해서가 아닌가 싶다. 각 장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려주고 그 강에 부합한 좋은 글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정혜윤과 김연수, 박범신과 성석제를 비롯 글 잘 쓰기로 유명한 작가들의 글이 30여편 가까이 예시돼 있다. 그 글을 읽는 맛이 솔솔찮지만,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았던 것은 어느 누구의 글이 아닌 저자 명로진의 글이었다. 그는 젊음과 늙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젊다'는 형용사이고, '늙다'는 동사다. 형용사는 양태를 나타내고, 동사는 움직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젊다는 건 순간이고 늙는다는 건 쉼 없이 지속된다. '너 때문에 내가 늙는다 늙어!'라는 말은 있어도, '너 때문에 내가 젊는다 젊어'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젊음은 한 때의 이미지지만 늙음은 시간의 흐름이다……중략……사랑이 형용사가 아닌 세상에 살고 싶다. 살아오면서 사랑 하나 갖지 못했던 이유는, 늘 동사로 늙어가는 내 추함 때문이다. 늙어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싶다. 타락하고 문란하고 퇴색한 이 땅에서, 오롯이 솟아 오른 뿔 같은 사랑 하나 간직하고 싶다……. 하략 』

 

젊음과 늙음을 새로운 각도로 풀어쓰니 더 참신하게 다가온다. 이 글을 읽지 않았다면 늘 그랬듯이 반의적인 단어, 또는 각 단어가 생성하는 이미지 그 이상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문장을 읽기만 해도 달라지는데 하물며 공들여 베껴쓴다면 글쓰기의 도움은 기대 이상이리라 생각된다. 전문적으로 쓰든 아니든,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람대로 되기보다 그리 되지 않을 때가 더 많고, 머리를 쥐어짜도 마땅한 글이 나오지 않을 때, 재능이 있네 없네 하며 한탄하기 보다 차분히 좋은 문장을 베껴쓰면 어떨까 싶다. 읽을 때는 스치고 지나갔던 글이 가슴에 확 들어오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 글은 체화돼 내것이 될 수 있을 터다.  

 

저자는 서문에서 하루에 한두 페이지씩 일년만 베껴쓰기를 해보라 권했다. 그러면 분명 달라져 있을 거라 했다. 덧붙여 그는 베껴쓰기가 가장 쉽고 빠른 글쓰기 해결책이라 했다. 믿져야 본전이니 당신도 해보면 어떨까? 난 이미 시작했다.  

 

사진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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