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깨어진 관계로 마음을 다친 사람들은 나락을 경험한 자들이다. 마음을 이기지 못한 생각이 얼마나 비참하며, 시간만이 구원이 되는 현실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그들은 안다. 인간 관계의 친밀함이 지극히 허약한 기반 위에 서있었음을 그들은 선연히 보았다. 반추할 때마다 생채기에서 흐르는 피는 함께 했던 시간이 깊을수록 붉었다. 빛나던 시절이 과연 있긴 한건지 되묻는 것조차 의미를 잃을 때, 죽어버린 자신을 통해 그들은 비로소 절연의 상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 세계의 종언을 겪은 사람은 안다. 인간 관계에 자신을 밀어넣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임을. 그런 어리석은 일이 되풀이 되어선 안되며, 그래야 자신을 지킬 수 있음을 상기하며 그들은 이를 삶의 철칙으로 만든다. 그러나 예전의 자신이 이미 사라지고 없음을 절감할 때마다 끝없는 슬픔을 느끼며, 죽어버린 자신을 향해 조사를 바친다.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모두(冒頭)의 이 글은 이유도 모른채 친구들에게 버림 당한 다자키 쓰쿠루의 처절함을 감정적 동요없이 단정하게 드러낸다. 일체감을 느꼈던 네 명의 친구에게 일방적으로 내침당한 쓰쿠루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벗어나지도, 극복하지도 못한채 깊숙이 숨겨져 있다. 그 시간은 다자키 쓰쿠루를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못하며, 한때 싱그러웠으나 이제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폐쇄된 자로 만들었다. 16년이란 세월조차도 그를 원상으로 되돌리진 못했다. 돌아갈 길이 막힌 자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일상에 자신을 묶은 채 최소한의 관계만으로 삶을 유지하는 수 밖에 없었다. 기모토 사라를 만나기 전까지 다자키 쓰쿠루의 삶이 그러했다.

 

절연의 경험은 내게도 있다. 가족보다 깊은 유대 속에 십여 년을 함께 했던 선배와의 관계에 선을 그어야 했을 때, 그래야 살 것 같았을 때 내 속은 말이 아니었다. 그만 보자는 이야기는 내가 했지만 인간 관계의 종국이 이런 것인가란 생각에 몇 년을 쓰라림 속에 지내야했다. 소중했던 시간들이 전락하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신뢰가 흔들린 관계에서의 만남은 불편하고도 씁쓸했다. 정이 뭐라고 그래도 그리웠기에 몇 번 만나긴 했지만, 전같지 않은 마음을 확인하는 건 차라리 고문이었다. 관계에서의 올인은 모 아니면 도였다. 하나지만 전부였던 사이가 틀어지고나니 모르는 사람보다 못했다. 남편과 자식이 있어도 빈 자리는 메워지지 않았다.

 

덮어버린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기모토 사라는 여자의 직감으로 다자키 쓰쿠루에게 잃어버린 시간이 있음을 발견해낸다. 이 문제의 해결없인 쓰쿠루의 삶이 정상적이지 못하리란 생각에 그녀는 친구들을 만나기를 종용한다. 만나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시도조차 이미 놓아버린 쓰쿠루였지만, 미결이 답일 수 없음을 알기에 용기를 낸다.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 쓰쿠루와 함께 모임을 만들던 친구들이었다. 각자의 아름다움이 어울리며 만들어내는 조합은 환상적이었다.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일체감 속에 쓰쿠루는 행복감으로 충일했다. 그런 그들에게 쓰쿠루는 어떤 이유도 듣지못한채 추방당했다.

 

16년이 지나 다시 찾아온 쓰쿠루에게 아카와 아오는 상상도 못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로는 몇 년 전 괴한에게 살해됐고, 구로는 현재 핀란드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카는 중견 회사의 대표로, 아오는 수입차 업체의 딜러로 그들의 색채에 맞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쓰쿠루를 쫓아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며 미안해 했지만,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이 없음을 슬프게 예감한다. 왜 시로는 자신을 성폭행범으로 몰았으며, 구로는 확인도 하지 않은채 자신에게 돌을 던진걸까? 그러나 그녀 둘을 놓고 성적인 꿈을 자주 꿨던 쓰쿠루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당혹감을 느낀다. 사라는 쓰쿠루를 추동해 구로까지 만나게 한다. 핀란드에서 그는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으며 마침내 사건의 본질을 알게 된다. 아름답고 섬세했지만 당시 성폭행을 당해 정신이 불안정한 시로를 위해 구로가 결단을 내려야 했으며, 쓰쿠루가 빠진 모임은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최고를 맛본 자는 차선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토록 찬란했던 시간이 다시 올 수 없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그늘을 만들었고, 모임의 의미는 각자 찾아야했다. 아카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성장통의 일부로, 아오는 생의 정점을 찍었던 한 시절의 표상으로, 죽은 시로는 말 못할 아픔의 출발지로, 구로는 짝사랑의 환희와 고통이 공존했던 곳으로 모임을 조각했다. 특별한 색채가 없다 생각하며 자신을 별볼일 없는 자로 간주했던 쓰쿠루는,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빛났으며 현재 또한 무언가를 담기에 충분한 그릇이라는 사실을 구로의 입을 통해 듣게 된다. 불현듯 사라가 떠오른다. 그토록 강력하게 끌리는 사람은 처음이다. 그녀에게 자신 외에 다른 남자가 있다할지라도 쓰쿠루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기로 마음 먹는다.

 

쓰쿠루는 새로운 삶을 향해 도전장을 내밀었다. 나도 용기를 내기로 결심한다. 다음에 선배를 만나게 되면 가슴 속에 있는 말들을 차분히 전할 생각이다. 속으로 삭이기보다 밖으로 드러낸 후 선배의 입장도 들어볼 계획이다. 둘러가지 않을 것이며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접근도 나와 선배를 위해서 불허할 것이다. 그래야 내 삶이, 어떤 식으로든 나와 연결된 선배의 삶이 평안해 질테니까. 오해가 있으면 풀고, 사실이라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작정이다. 설사 쓸모없거나 덧없는 짓이 될지라도 관계를 포기하는 미련함 보다는 나으리라. 관계의 단절은 그 어떤 것보다 내게 상실감을 불러왔다. 자신을 지키겠다고 한 행동이 결국 자신을 더 외롭게 만들었다. 비온 뒤 땅이 굳는다 했던가. 쓰쿠루의 내일이 열려있는 것처럼 나의 내일도 열리길 소망한다. 그의 순례가 의미있었던 것처럼 내 여정도 그리 되길 바라며 발을 내딛기로 다시 한번 마음 먹는다. 깨어진 관계로 한때 나락에 떨어져 봤던 내가 이 책에서 얻은 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