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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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난다.

학교 도서관이 새로이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틈만 나면 도서관에 갔고 한번에 두세권씩 책을 빌리곤 했다.

주로 외국 작가의 소설이었다.

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심지어 일본 작가나 작품에 대해 비합리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날,

어떤 호기심에 이끌려 이 책을 빌렸다.

책장을 연 그 순간부터 단숨에 이 책을 읽어 치웠다.

정말이다.


'읽어 치웠다'는 말이 딱 맞아 떨어지는 희한한 경험이었다.

개성적인 등장 인물은 말할 것도 없고

작가가 치밀하게 표현해 내는 그들의 물리적인 관계와 심리적인 묘사를 두고 어떻게 책읽기를 중도에 멈출 수가 있을까.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아우르는 방식은 어떤땐 내게 몹시 낯선 방법일때도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내면적인 혼란과 아픔이 더욱 직접적으로 내게 다가올 때도 있었다.


여느때와 똑같은 하루를 함께 보낸 후에 절친한 친구가 혼자서 자살을 했다면 나는 그 삶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 친구가 만약 한 몸처럼 사랑했던 연인같은 이 였다면 나는 그의 상실을 극복해 낼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나는 자신이 없었다.


그들과 같은 시절에, 딱 그만큼의 나이에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을 비롯해 다른 등장인물들의 미숙한 청춘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것이 몹시도 버거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언제든 어디서든 그 무게를 감당하는 법은 다른 것.

누구는 그것으로부터 성숙 하기도 하고 누구는 그것에 굴복 당하기도 한다.

그것은 책에서든 현실에서든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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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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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간 엄마가 마련한 새로운 집은 호은의 엄마 윤진이 자신의 존재를 성숙시켜가는 곳이자,

지난 과거와의 화해를 시도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는 장소이다.


어린 호은은 아빠가 배제된 집이 엄마에게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묵묵히 그곳에 속하기로 한다.

하지만 어린 호은에게 그것은 엄마라는 존재가 머무는 '집',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래서일까?

호은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기숙사로 들어간다.

엄마의 집이 같은 서울땅에 있음을 아는 친구는 없다.

그녀는 결핍된 실체로서의 자신이 속한 집을 스스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호은 앞에 나타난 아빠.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이복 동생을 맡기고 사라진다.

난감해진 호은은 엄마의 집에 동생을 데려간다.

어처구니없이 전남편의 아이를 맡게된 윤진은 전남편을 찾아 나서지만

아마도 시골로 들어갔을거라는 말만 전해 들을 뿐이다.

하는수없이 윤진은 자신의 집으로 아이를 데려간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기이한 동거가 호은으로 하여금 엄마의 집을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준다.


평범한 친척 아이처럼 전남편의 아이를 대하는 엄마,

아빠의 전처와 같이 살게 된 호은의 이복동생,

그리고 엄마와 동생과의 평범하지 않은 관계에 끼어버린 호은.

각각 다른 처지에 놓인 세 여자의 비범한 일상은 엄마의 집에서 자연스럽게 조화를 찾아간다.

그리고 저마다 타의로 얽힌 관계의 실마리를 풀어가며 화해를 시도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이 책에 등장하는 <엄마의 집>은 물리적 공간의 의미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신적 공간의 역할까지도 더해 가면서 비로소 그들 각자에게 걸맞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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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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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일까 악한 존재일까.
지식의 정도가 얼마이든 혹은 경험의 질이 어떠하든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온 물음이다. 작가는 그녀의 소설 [종의 기원]에서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인 유진은 정신과 의사인 이모로부터 사이코패스 판정 받는다.

미국 브르크하멜국립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감정을 지배하는 전두엽 기능이 일반인의 15%밖에 되지 않아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고통에 무감각하므로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받게 될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재범률도 높고 연쇄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일반 범죄자들보다 높다.(출처:두산백과)'고 한다.

그러나 유진이 사이코패스라고해서 그의 즉흥적인 폭력성이나 존속 살인 행각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작가가 유진을 인격적 장애를 가진 이로 설정하기는 했지만 그는 살인행위를 벌이는 동안 자신에게 그러한 장애가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러니 사이코패스라는 병리적인 진단명은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지는 연속적인 살인 행각에 대해 즉각적인 개연성을 부여하고 악인으로서의 인간의 진화를 구체화하기 위한 장치이며 실상은 유진이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 심연의 악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주된 의도이다.

우리 사회는 인간의 유해한 본성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없이 그것을 규제하기에 급급하다. 마치 유진의 이모가 간질약이라고 속이고 알약을 처방하는 것처럼 말이다. 약을 처방하는 행위는 마치 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선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를 유해한 반인격적 존재로 낙인찍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런 존재에게 주체적인 선택이나 인간적인 선처따위는 없다. 또한 악한 본성을 드러낸 인간은 선한 존재로 선택된 인간의 제재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묵인한다. 이 또한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쯤되니 인간은 마치 악한 것으로 똘똘 뭉쳐진 존재같다. 게다가 악이란 생각보다 치밀한 것이어서 선한 것으로 둔갑하는 것쯤은 식은죽 먹기다. 이 책에 따르면 선한 본성이 악한 본성을 제압하기란 도무지 쉽지 않다. 그러니 악에게 희생당하지 않으려면 그의 화를 돋구지 말아야 한다. 참으로 섬뜩한 결론이다.


'도로는 한적하고, 12월의 밤은 스산하고, 바다는 부옇게 젖어 있었다. 저 앞 흐릿한 안개 속에선 누군가 걸어가고 있었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짠 바람을 타고 피 냄새가 훅, 밀려왔다.(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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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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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중편소설이 하나로 묶여 연작소설이 탄생했다. 각각의 소설은 서로 다른 화자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 중심엔 '영혜'라는 인물이 있다.

첫편인 [채식주의자]에는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된 경유를 밝힌다. 어느날 영혜는 남편의 성화로 허둥대다 손가락을 베이고 틈새로 방울지는 비릿한 피의 맛이 그녀를 기묘한 꿈으로 이끈다.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의 기억이 되살아 나고 아버지에 의해 잔인하게 죽은 개의 기억이 겹쳐진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서 온갖 추한 것들이 쏟아져 나오듯 학대에 대한 기억은 무의식의 밑바닥에 꽁꽁 숨겨 두었던 공포를 불러 일으키고 잠재된 저항감이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표출된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기로 한다. 잔혹한 폭력의 결과물로 인식되어버린 고기덩어리를 그녀는 더이상 자신의 몸안에 받아 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육식을 거부한 채식주의자라는 테두리안에 그녀를 가둬 버린다. 구체적인 범주안에 갇힌 이는 그 자체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또 다시 집단적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계속해서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자 그녀의 아버지는 고기를 그녀의 입에 강제로 쑤셔 넣고 순식간에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영혜는 자신의 손목을 그어 버림으로써 폭력에 대한 저항감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드러 낸다.

두번째 편인 [몽고반점]에서 영혜를 향한 시선은 형부인 인혜의 남편에게로 옮겨간다. 어느날 그는 인혜로부터 영혜의 몸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존재한다는 얘기를 듣고 주체할 수 없는 예술적 영감에 사로 잡힌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이다. 몽고반점을 향한 열망은 그의 불순한 욕망과 묘하게 겹친다. 결국 그는 영혜와의 육체적인 결합을 통해 의도적인 예술 작품을 완성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것은 비윤리적인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는 단 한번의 예술적 탐닉으로 그동안 쌓아 온 예술가로서의 명성도 한 여자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인간적인 지위도 모두 잃는다.

마지막 편인 [불꽃 나무]에서 영혜는 육식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흙 속에 뿌리를 박고 나무가 되기를 소망한다. 나무가 자라려면 저절로 얻어지는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된다. 나무는 자신의 성장을 위해 다른 존재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의 저항은 이제 최고조에 이른 것이다. 나무가 된다는 것은 혹은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소멸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소멸을 통해 폭력의 대상으로서의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의 바램은 이상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몸은 물리적인 고통에 시달리게 되고 그녀의 정신은 점점 파괴되어 간다. 정신병원에 갇혀 죽어가는 영혜를 보며 혼자서 되뇌이는 인혜의 절규는 그래서 더 비참하다.

'하지만 뭐야.
그녀는 소리내어 말한다.
넌 죽어가고 있잖아.
그녀의 목소기가 커진다.
그 침대에 누워서, 사실은 죽어가고 있잖아. 그것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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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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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내재된 본능에 속한다'고 일찌기 프로이트는 말했다고 한다. 그 욕망이 말 그대로 이유도 목적도 없는 단순한 본능에 의해 발현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느끼는 고독감이 너무나 강렬해서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인간 내부에 자라기 시작한 고독은 결국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파괴의 욕망을 표출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종결점에는 죽음이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은 삶에 대한 절망과 고독을 떨쳐 버리기 위해 사탕을 빨기도 하고 예술 행위에 몰두하기도 하지만 내부의 빈공간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는다. 이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죽음뿐이다. 죽음은 그들을 제자리로 돌려 놓을 것이다. 그들이 고독해지기 전, 그들이 존재하기 전의 상태로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인 고독감에 헤매고 있다 한들 한번뿐인 죽음의 순간마저 철저하게 고독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그들은 조력자를 찾아간다. 죽음의 방식을 의논하고 자기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찌보면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곧 소멸된 인생에 무슨 미련이 남았단 말인가. 결국 인간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 있을만큼 절대적인 고독은 감내하지 못하는 연약한 몸뚱아리인가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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