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그래피 매거진 3 심재명 - 심재명 편 - 우리 삶은 회화보다 영화에 가깝다, Biograghy Magazine
스리체어스 편집부 엮음 / 스리체어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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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그래피 매거진』 ISSUE 3. 심재명 / 스리체어스

"우리 삶은 회화보다 영화에 가깝다"

  

 

 

 한 호에 한 인물을 소개하는 획기적인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이번 호 인물은 '심재명'이다. 지금도 항상, 영화보다는 책이 우선인 터라 '심재명'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명필름'이라고 말하니 "아-" 소리가 절로 나왔더랬다. 명필름은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하는 영화 제작사이며, 심재명과 이은 부부가 공동 대표로 있다. 이름만 들으면 대부분 아는 유명한 영화들 <접속>, <해피엔드>, <공동경비구역 JSA>, <마당을 나온 암탉>, <건축학개론>, 그리고 최근에는 <카트>가 있다. 흔히들 말하는 '역대 최다 관객'이나 한국 영화 TOP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의 정서를 자극하고, 제목만으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작품들이 많다. 김훈의 소설집 『강산무진』 속 '화장'이란 작품을 토대로 만든 영화 <화장>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다.

 

 

 

 

  사실 '명필름'이라고 해도, 대단하다는 느낌까지는 안 왔던 게 사실이었다. 제작된 영화를 쭉 살펴봤을 때 이어지는 비슷한 느낌은 있으나, 왜 충무로의 영화 제작사 중 돋보이는 곳인지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의 본문 구성 중 첫 번째로 나오는 (아주 심플하게 표현된) 업적들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 '최초'라는 말이 매우 많았다.

 

 한국 영화 최초 PPL을 넣었던 <결혼 이야기>

 국내 최초로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외국 노래를 사용한 영화 <접속>

 최초로 영화 홈페이지를 만들어 마케팅한 <조용한 가족>

 국내 영화사 최초로 마케팅 비용의 일부를 인터넷 펀드로 모집한 <해피엔드>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관객 220만 명을 동원한 <마당을 나온 암탉>

 

 '최초'의 가치가 어디까지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영화의 제작과 마케팅에 있어 새로운 도전을 하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명필름'의 행보는 굉장히 주목할 만하다.

 

 

 

 

 문화의 한 예술 장르로서, 확고한 자리를 만들어온 이번 호의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서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은 더욱 독특한 구성과 디자인으로 한 권의 책을 펴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심재명'의 인생을 영화적 기법으로 설명한 부분이다. 시놉시스 - 숏 - 앵글 - 미장센 - 조명과 색채 - 렌즈와 필터 - 움직임 - 음향과 음악 - 편집 - 시나리오 - 이데올로기 순으로 그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처럼 표현된다.

 

 

"언니가 '사랑의 집' 빌려 달래요."

 같은 반 친구에게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을 빌려 읽던 재명은 매번 손을 벌리기 민망해 네 살 아래 여동생을 앞세웠다. 카메라는 어린 재명의 떨리는 눈과 주름 잡힌 콧등, 마른침을 삼키는 목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이어지는 필로우 숏 Pillow shot. 노란 풍선을 들고 뛰는 아이와 그 뒤를 따르는 부부를 극단적인 롱 숏으로 보여 준다. 붉게 저무는 하늘과 하늘을 사선으로 가르는 비행운. 영화 내용과 무관한 정경을 담은 필로우 숏은 영화에 여백을 주고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 오스 야스지로 감독의 대표적인 숏이다. (45p) 

 

 단지 이번 호의 인물이 '영화인'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인생을 이렇듯 절묘하게 표현할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가난했던 '심재명'의 어린 시절과 남자로 가득했던 충무로에서 강단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 서울 극장 기획실의 '미스 심', 국내의 대표적인 여성 기획자로서 성장과 고난을 좌지우지한 대표 '심재명'의 인생까지.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은 영화적 기법을 간간이 설명해나가면서 삶의 흔적을 꼼꼼하게 찍어나갔다. 이후 이어지는 구성에는 우리나라의 '명필름'과 비교될만한 영국의 <워킹 타이틀> 제작사 에피소드가 등장했고,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영화 <건축학개론>의 비하인드스토리를 이용하여 영화 제작 과정을 설명하기도 했다.

 

 

 

  '심재명'의 인터뷰와, 공동대표이자 배우자인 '이은'의 인터뷰에서는 제작자란 어떤 사람인지, 필요한 역량은 무엇인지, 상업영화를 바라보는 시선과 명필름의 영화적 화두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편집 요구가 많다는 항간의 소리에 대하여, '제작자가 지녀야 할 책임감으로 어느 정도 자신의 판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라는 강단 있는 모습도 드러났다. '영화적 과잉'을 줄여내도록 노력하는 탓에 '명필름'의 영화가 어느 정도 비슷한 분위기를 띄고 있는 것은 수긍이 갈 만했다. 국내 애니메이션 중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마당을 나온 암탉> 이후로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고 있다니 (게다가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 서울대 공원을 탈출한 곰 이야기라고 하니 영화적 성향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무척이나 기대된다.

 

 

 

 충무로에서 소신과 강단이 있는 여성 기획자로서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심재명'이라는 인물에 새삼 존경심이 어리며, 20주년을 맞이하는 '명필름'의 다음 행보도 호감을 갖고 지켜보고 싶다.

 

내화면의 공간 바깥에는 언제나 외화면이 있다. 우리의 능력이 태부족하여 외화면의 영역을 직접 비추지는 못하더라도 그곳에 사람과 풍경이 있음을 함께 긍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외화면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만으로 타인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장이 열리리라 믿는다. 내화면과 외화면은 상호작용하며 프레임을 해체하고 영화적 서사를 완성한다. 우리 삶은 회화보다 영화에 가깝다. (15p, 편집자의 서문)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을 소개하면서 꼭 한번 이야기하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남다른 문장이 늘 독자를 사로잡는다는 것이다. 일정한 규칙이 있는 구성이지만, 매번 놀라곤 하는 이유는 멋진 디자인뿐만 아니라 눈을 즐겁게 하는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꼼꼼하고 멋들어진 매거진이자, 한 권의 책이다.

 

Written by. 리니

잡지, 매거진/ 인물 평전/ 격월간지/ 한 호에 한 인물을 소개하는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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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웨이크 시리즈 - 전3권 - 꿈을 엿보는 소녀 + 끝나지 않는 악몽 + 최후의 선택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맥먼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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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웨이크 시리즈』 리사 맥먼 / 황금가지
꿈을 엿보는 소녀, 그 특별한 이야기
 

 
 
 ▒ 책을 읽고 나서.
 
 '꿈을 엿보는 소녀'라는 제목을 들었을 땐,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을 가장 먼저 떠올렸습니다. 누군가의 꿈에 침투하여 그 꿈을 조작하는 설정은 가히 충격이었죠. 그러나 『웨이크 시리즈』에서는 꿈에 '침투'하기보다는, 꿈에 '빨려 들어간다'는 표현이 좀 더 맞습니다. 주변에 누군가가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있으면 무방비하게 그 꿈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드림 캐처'의 삶을 다루는 것이죠. '꿈을 엿보는 소녀' 제이니가 꿈에 빨려 들어가 보게 되는 풍경들은 대개 무시무시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소녀는 온몸을 떨거나 발작을 하거나 잠시 동안 눈을 뜰 수 없기도 하죠. 그 정도는 갈수록 심해집니다. 영화 <인셉션>에서도 그렇고, 『웨이크 시리즈』에서도 그렇지만, 남의 꿈을 엿본다는 것이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며, 그것을 판타지나 히어로물처럼 밝게만 그리고 있진 않지요.
 

 
 
 그러나 밝게만 그리고 있지 않다는 게, 오히려 저는 좋았습니다. 이 시리즈는 황금가지의 '블랙 로맨스 클럽'에 수록된 작품인데요. 드림캐처 이야기 속에 10대 청소년들의 풋풋한 사랑을 끼워 넣기도 했습니다. 소녀의 '드림캐처' 능력을 우연히 알게 된 같은 학교 학생 '케이벨'과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드림캐처' 능력을 경찰 수사에 활용하고, 자칫 고통스러울 수 있는 소녀에게 힘이 돼주는 동반자가 바로 '케이벨'이죠. 이들의 사랑은 달달하고 설레지만, 판타지로 중심을 잡고 있는 이야기 속에서 자칫하면 몰입을 방해할 수 있거나 가벼워질 수 있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건 소설이 잡고 있는 어두운 분위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무게 있는 작품은 아니고, 적당히 재밌게 볼만한 작품입니다.)
 어딘가 무기력했던 소녀가 2권에서 남다른 능력을 좋은 쪽으로 발휘하면서 자신감을 얻고,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또 다른 '드림 캐처'를 통해 얻으면서 이야기는 조금 풀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불안불안하죠. 그녀의 능력, 아니 능력이라고 부르기엔 수많은 피해를 입는 '드림 캐처'는 더 부정적으로 그려집니다. 어쩔 수 없이 능력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그것을 없앨 순 없고, 계속 그 능력을 좋은 쪽에 활용하기엔 온갖 안 좋은 것들이 발현되는 상황 속에 소녀는 어떤 선택을 할지 두근거리며 읽게 되는 소설입니다. 10대 소녀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딜레마를 안고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미래를 고민하게 되는 감정의 변화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지요.
 
 

 

 그래서 그들은 결정한다. 무슨 일이 닥칠 때마다 매번 새로운 결정을 내리기로 결정한다.

 어떤 약속도 없이. 어떤 계획도 없이. 그저 매일 매일의 삶.

 조금씩 발전하면서. 압력을 거둬내면서.

 언제나 어디에나 망할 압력은 늘 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가능할 것이다. 

 
 3권으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는 『웨이크 시리즈』는 '꿈'이라는 소재로 소녀의 성장과 사랑, 고민을 매력적으로 풀어낸 소설입니다. 그러나 소재 자체가 특별했기에, 3권으로 끝내기에는 매우 아쉬운 기분입니다. 더 나올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여겨져도, 왠지 3권으로만 소모하기엔 아쉬운 아이디어거든요. 2권에서 나오는 소녀의 남다른 활약을 더 보여주거나 큰 사건을 더 추가해주었다면 하는 작은 바람은 있지만, 어찌 됐든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Written by. 리니

영미 소설/ 판타지, 로맨틱 스릴러/ 성장소설/ 황금가지 블랙로맨스클럽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서평입니다.

 


 

꿈이 그녀를 무차별 없이, 모든 방향에서 쉴 새 없이 덮친다. 제이니는 이미 감각의 과부하 상태다. 이것은 오직 그녀만의 물리적, 정신적, 감정적인 세 시간짜리 악몽이다. 제이니는 눈을 뜬다. 누군가가 휴대폰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안개가 걷히고 다시 볼 수 있게 됐을 때, 마침내 케이벨이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그의 눈, 그의 머리카락은 몹시 화난 상태다. 그의 얼굴이 하얗다. 그는 팔로 그녀의 어깨를 두르고 있다. 그녀를 붙들고 있는 것에 가깝다. 그녀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조금 운다. 그녀는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일 수 없다. 눈물이 새어 나온다. 케이벨이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닦아준다. 그것이 그녀를 더 심하게 울게 한다. (1권, 92p)

여기 당신이 알아야 할 몇 가지 중요 사항이 있습니다.

당신이 이 능력을 질병으로 보는 한, 이 병에는 `치료약`이 없습니다. 적어도 드림캐처의 능력이 알려진 이래로, 치료약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50년의 세월을 이걸 바꿔 보려고 애쓰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때때로 그걸 조절하는 것뿐입니다. (2권, 267p)

제이니는 사람들이 없는 삶을 생각해 본다. 그가 없는 삶. 마음이 산산조각 난 채로, 고독 속에서, 하지만 볼 수도, 느낄 수도 있는 삶. 살아 있다. 평화롭게. 다음 꿈이 어디서 공격해 올지, 어깨 너머로 항상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삶.

그리고 그녀는 그와 함께 하는 삶을 상상해 본다. 눈이 멀고, 손은 혹이 나고 구부러진 채로, 하지만 사랑 받는……. 적어도 일이 계속 좋게 돌아가는 한은 사랑 받는 삶. 그리고 항상 그의 꿈을 통해서 그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알게 되는 삶. 몇 년 동안이나 더, 정말로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보기를 원하는 건가? 정말로 그녀는 이렇게나 기막히게 멋진 남자에게 그 어마어마한 짐을 지우길 원하는 건가? 그녀는 여전히 어떤 시나리오가 이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 중이다. 아마도 산산조각 난 마음 쪽이 고장 난 손이나 눈보다는 좀 더 쉽게 고칠 수 있을 것 같다. (3권, 63p)

아, 스투빈 선생님.`

제이니는 숨을 몰아쉬며 뜨거운 시멘트로 몸을 낮춘다. 눈물이 펑펑 솟아나온다. 18살로 사는 것과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말할 수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에 대한 고통. 그리고 이 거대한 무게가 그녀의 가슴을 누르고 그녀를 메다꽂고 그녀가 원래 십 대 소녀라면 그래야 할 방식으로 사는 것을 방해한다는 느낌. 그녀는 왜 이 모든 엿 같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인지 궁금하다. 물론 이 질문이 처음 떠오른 것은 아니다. 자신이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 서장과의 일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이득을 위해 자신이 더 빨리 눈머는 길을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3권, 1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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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사랑한 꽃들 - 33편의 한국문학 속 야생화이야기
김민철 지음 / 샘터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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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문학이 사랑한 꽃들』 김민철 / 샘터

문학작품을 더욱 피어나게 하는 꽃들의 향연







 ▒ 책을 읽고 나서.


 두 사람이 함께 걷다가 같은 풍경을 본다. 한 사람은 "목련이 예쁘게 피었네" 혹은 "어머, 저 가랑코에 색이 정말 화려하다."라고 말한다. 다른 한 사람은 그저 "꽃이 예쁘다."라고 말한다. 물론 각자의 관심사가 다를 수 있지만, 이는 커다란 차이를 준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마주했을 때 두 눈으로 확인하고 감탄하는 것, 그 재미는 '모르고' 감상했을 때보다 몇 배는 커진다. 이 두 사람의 경우를 생각했을 때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후자에 속한다. 다양한 야생화와 식물들을 알고 싶긴 하지만, 그것을 찾아보고 눈에 담아 기억하기엔 관심이 부족하고 세심하지 못한 탓이다.



 꽃(혹은 식물)과 문학, 이 둘은 정말 짝을 이룬 것처럼 잘 맞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들이다. 김훈의『내 젊은 날의 숲』에서는 수많은 식물, 그리고 식물들이 연상시키는 의성어들로 풍성하고 유려한 문장들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문학작품을 구성하는 소재로서 세상의 무엇 하나 쓸모없는 것들이 없지만, '꽃'을 포함하는 '식물'들은 특히나 한글의 아름다움을 화려하게 뽐낼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알고 싶어진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야생화들과 이름 모를 식물들, '은행나무'와 '단풍나무' 등 유명한 것들 말고는 내 눈으로 구별할 수 없는 튼튼한 나무들을.



 이 책의 작가는 이전에 『문학 속에 핀 꽃들』이라는 책으로, 꽃과 문학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표현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더욱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로 책장을 꾸몄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 은희경의 <새의 선물>, 권정생의 <몽실 언니> 등 비교적 잘 알려진 작품들을 포함하여, 작가의 이름 또한 조금 생소하지만, 꽃에 관한 아름다운 문장이 깃들어있는 작품들도 모아두었다. '좋은 문장들을 쓰고 싶으면 꽃에 관해서 좀 알아두자'는 개인적인 다짐을 한 적이 있지만, 이제는 그 다짐을 더욱 굳게 지켜야 하겠다 싶을 정도로 한국 문학 속에는 수많은 꽃이 만발해있다.




3월의 시작과 함께, 나는 첫발이 미끄러지듯 새 학기의 시작이 주는 쥐꼬리만 한 스트레스를 조르바에게 털어놓았다. (중략) 그래서 그날은 조금 과하게 술을 마셨다. 그럴 수 있는 일이었고 물론 그녀와 함께였다. 다음 날엔 그녀가 졸업 학기의 시작이 주는 쥐똥만 한 스트레스를 나에게 털어놓았다. 이거야 원, 다음 날 학교를 결석할 만큼의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자꾸만 생겨났다. 나와 그녀에게 아무 일이 없으면 조르바가 쥐며느리만 한 스트레스를 털어놓고, 마치 왈츠의 리듬처럼 그다음 날엔 조르바의 친구가 쥐방울 만한 스트레스를 털어놓았다. (중략) 결국 한 그루의 쥐똥나무만 한 스트레스가 서로의 마음속에 자라나 버렸고, 급기야 서로가 어우러진 울창한 쥐똥나무의 숲이 형성되어 버렸다. 결국 그해의 봄은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36p,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단순히 그 꽃(그리고 식물들)을 묘사하는 장면만을 상상할 수 있지만, 작가들의 개성과 글솜씨로 이런 문장들도 등장한다. 쥐꼬리만 한 스트레스, 쥐똥만 한 스트레스가 모여서 한 그루의 쥐똥나무만 한 스트레스를 이뤘다는 표현은 기발하고도 매력적이다. 독특하기로 잘 알려진 '박민규' 작가의 글이지만, 과연 이래서 '작가'인 듯싶다.




 



 

『문학이 사랑한 꽃들』은 마치 한편의 독서 에세이를 읽는 것도 같고, 가볍게 쓰인 식물도감을 보는 것도 같다. 책 속에 담긴 우리 문학 작품들은 풍성했고 읽어보고 싶은 것들도 많았지만,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각 장의 내용이 조금 짧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쓰인 작가의 이력 등은 굳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문학'과 '꽃'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기대가 커서 책은 오히려 조금 가볍게 여겨졌지만, 뒤로 갈수록 쌓이는 주옥같은 작품들이 책에 대한 만족도를 올려 주었다. 현재 출간된 많은 독서 에세이 (문학 에세이)들 중에서 특별한 소재로 중심을 잡고 있는 것도 큰 이점이라고 생각한다.





Written by. 리니

한국 에세이/ 문학, 독서 에세이/ 야생화, 꽃

서평단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서평입니다.



그날 마음 사람들과 아버지는, 용내천을 가로질러 쓰러져 있는 커다란 용수버드나무를 발견했다. 금방 잘린 듯한 나무 밑동 곁에는, 손잡이에 핏물이 밴 낡은 톱 한 자루가 버려져 있었다. 그날을 회상할 때마다 어머니는 깊이 파인 손바닥의 상처를 들여다보곤 했다.
어머니가 용수버드나무를 이용해 용내천을 건너 읍내로 내달릴때 아이는 소생했다. 미친 듯 달린 어머니의 몸이 아이의 횡격막을 자극한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를 부둥켜 안고 진창에 주저앉아 이년아, 이년아, 하고 울었다. 간수를 얻기 위해 어둠과 습기를 빨아들인 소금가마니처럼, 어머니는 어둠과 습기를 기꺼이 받아들여 자식들을 사랑으로 지켜온 것이다. (78p, 구효서 <소금가마니>)

<옛 우물>도 하나하나 따지며 의미를 부여하거나 페미니즘을 의식할 필요 없이, 그냥 중년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좋은 소설로 읽어도 무방할 듯 싶다. 주인공이 나무를 껴안고 희열을 느끼는 장면 등도, `그`의 죽음의 충격으로 생긴, 다소 일탈적인 행동 중 하나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결혼을 해본 남자라면, 여자를 사귀어 본 사람이라면 여자들이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심리 상태에 빠져 다소 엉뚱한 일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107p, 오정희 <옛 우물>)

먼저 그녀의 어깨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목덜미에서부터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주와 빨강의 반쯤 열린 꽃봉오리들이 어깨와 등으로 흐드러지고, 가느다란 줄기들은 옆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오른쪽 엉덩이의 둔덕에 이르러 자줏빛 꽃은 만개해, 샛노란 암술을 도톰하게 내밀었다. 몽고반점이 있는 왼쪽 엉덩이는 여백으로 남겼다. (중략) 그는 이번에는 노랑과 흰빛으로 그녀의 쇄골부터 가슴까지 커다란 꽃송이를 그렸다. 등 쪽이 밤의 꽃들이었다면, 가슴 쪽은 찬란한 한낮의 꽃들이었다. 주황색 원추리는 오목한 배에 피어났고, 허벅지로는 크고 작은 황금빛 꽃잎들이 분분히 떨어져 내렸다. (292p, 한강 <채식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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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적나라한 결혼생활 - 전4권 적나라한 결혼생활
케라 에이코 지음, 심영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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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적나라한 결혼생활』 케라 에이코 / 21세기북스

아따맘마 작가의 결혼 4부작(신혼편, 3년째, 7년째, 결혼편)

 

 

  ▒ 책을 읽고 나서.

 

  참 귀여운 책을 만났습니다. 알록달록한 표지에 귀여운 그림, 그리고 '적나라한'이라는 표현이 왠지 음흉하게 재밌는 에피소드를 까발리고 있을 것 같은 만화. 이 책은 <아따맘마>라는 만화로 유명한 '케라 에이코'의 신작입니다. 여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결혼에 대한 모든 것을 파헤치고 있는 책이죠. '케라 에이코'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신혼편, 3년째, 7년째, 결혼편으로 나누어 4부작으로 만화를 펴냈습니다. 결혼편은 시리즈의 네번째지만, 이 시리즈의 프리퀄로서 '케라 에이코' 부부가 결혼을 다짐하고 결혼식을 마감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내용은 약간씩 다르지만 네 권 모두 비슷한 분위기이기도 하고, 에피소드 형식이라 각각의 책을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만 딱 골라서 읽어도 되고요. 그치만 결혼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저는 그 변화를 알고 싶어 순서대로 읽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신혼생활,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하는 행동도 모두 다른 두 사람이 가족이 되면서 일어나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결혼이랑은 아직 거리가 먼 제 상상으로는 '신혼'생활이라면, 왠지 아직도 관리를 하고 있고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인데, 이 책에서는 부부가 어느 정도 '자신을 놔버린' 상황부터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규칙이 아직 존재하고 있지만 점점 그 규칙을 지키는 것이 느슨해지고, 뭐 이런 일상들이 등장하는데요. 귀여운 캐릭터에 적나라한 모습들이 더해지니 픽- 하고 웃으면서 보게 됩니다.
 
 

 
 특히나 '신혼편'에서는 부부들의 설문조사 페이지가 많이 실려있었는데요. 가사를 분담하는 부분, 부부싸움의 빈도, 남편(혹은 부인)을 길들이는 법에 대한 그래프 등이 나와 있습니다. 이걸 보면 참 재미있어요. 결혼을 하지 않은 입장에선 공감이 가지 않지만, 재미있는 표현에 웃음이 나더군요. 부부싸움으로 일어나는 행동들을 그려놨다든지, 배우자의 기분 나쁜 정도를 나눠서 (답답기 - 부글기 - 억울기) 기분 풀어주는 법을 그리고도 있고요.
 
 

 

 
 
 제가 볼 때 제일 '적나라한' 편은 2편, '3년째'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재미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케라 에이코' 부부가 서로 장난치는 모습도 담겨있고, 투닥거리면서도 작은 애정행각을 하는 모습도 등장하고요. 그림이 귀여워서인가요, 이들 부부 참 귀여워요.
 

 
  절대 빈말은 해주지 않는 남편. "아내분 만화 아무 데도 안 팔던데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답정너에 촌철살인을 해주는 순박한 남편분입니다.
 
 

 

 
 
 조금 더 원숙해진 결혼생활을 다룬 3편, '7년째'에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자신이 남은 음식을 말없이 먹어주는 남편에게 감동을 받는 모습, 과한 애교는 아니지만 적당한 터치로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고, 털을 뽑아주고 수염을 밀어주는 (ㅋㅋㅋ) 등의 적나라한 일상도 역시 포함됩니다.
 
 

 

 
 그리고, 3편에서 남편 만화가 등장합니다! 집요할 만큼 깔끔을 떠는 부인 '케라 에이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진짜 남편이 그린 건지 모르겠지만, 남편의 시각에서 보는 만화가 등장하니 또 새로운 맛이 있습니다. 대신, 너무 짧아서 싱겁긴 하지만요 ^^;
 
 
 

 
 가장 재밌게 본 편은 4권, '결혼편'인데요. 아무래도 '결혼생활' 보다 '결혼식'에서 제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넓잖아요. 결혼식은 이곳저곳 많이도 볼 수 있지만, 결혼 생활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선 알 수 없으니까요. 프로포즈에서부터 신혼여행까지를 다룬 이 책에서는 '케라 에이코'도 처음이어서 우왕좌왕 방황했던 결혼식 준비과정이 그대로 담겨 있어요. 드레스 고르기, 상견례, 하객 연락하기, 두근거리고 정신없는 결혼식 당일까지! 역시나 만만치 않은 적나라한 '결혼' 준비를 세세하게 그려놓은 걸 보고 약간 겁을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두 부부가 참 행복해 보여서 결혼에 대한 호감도 더욱 생겨났답니다.
 
 

 

 
​  이 부부는 여자 측에서 먼저 프로포즈를 했다고 하는데, '케라 에이코'의 열의 넘치는 프로포즈에 전혀 거절할 수 없었던 남편... ㅎㅎㅎㅎㅎ
 "매일매일같이 있고 싶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같이 살자고"​ 말하는 작가의 모습! 정말 멋지죠 :)
 요즘엔 여자 공감 만화를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적나라한 결혼생활』시리즈는 더욱 유쾌하고 귀엽게 그려낸 작품이에요. 결혼을 안한 저에게는 아직 낯선 모습,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지만, 작가가 워낙 재밌게 그려내선지 키득거리며 즐겁게 읽었고요. "이렇게 재밌게 살고 싶다-" 하는 바람도 조금 생겨났어요. 특히나 '결혼편'에서는 우리나라와는 살-짝 다른 일본의 결혼 문화까지 만나볼 수 있어서 또 신선했고요. 아마도 기혼자분들이라면, 아니면 결혼 생활을 꽤 오래 하신 분들이라면 눈물 나게 웃기고 엄청나게 공감 가는 에피소드를 발견할지도 모르겠어요 ㅎㅎㅎㅎ
 
 

Written by. 리니

일본 만화/ 아따맘마 / 결혼생활/ 공감만화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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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환상의 여자』 가뇨 로이치 / 황금가지

 "이 세상은 미담 따위 하나도 없어"

 

 

 

  ▒ 책을 읽고 나서.

 

  내 곁에 있는 누군가의 과거가 왠지 안 좋은 예감으로 다가올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왠지 그 진실 속에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고, 누군가의 현재 이미지를 송두리째 바꿔버릴 당황스러운 상황들이 예견될 때 말이죠. 아마도, 그 진실을 덮어두고 현재에 충실할 것이냐, 아니면 좋던 나쁘던 진실을 알아야 하느냐를 고민할 것입니다. 저는 어떨까요? 만약에 이런 상황이 온다면, 전자가 그나마 평화로운 날들을 보장해줄 확률이 높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후자를 선택하게 되지 않을까요? 바로, 『환상의 여자』의 주인공처럼요. (물론 이 정도까지 몸 사리지 않고 덤벼들진 않겠다만…….)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주인공이 잠시 불륜을 저질렀던 한 여자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상황을 그리고 있어요. 작품의 포인트는 바로 '과거'인데요.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도 일종의 트라우마가 된 과거의 기억을 항시 지니고 있고, 직업적인 부분에서도 실패를 맛본 경험이 있어 여자의 사건을 조사하는데 족쇄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정말, 뭔가에 이끌린 듯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여자의 과거를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어떤 위험한 상황이 와도 끈질기게 과거를 파헤치지요. 그녀의 죽음 소식을 들은 전날, 법원에서 우연히 만났고 이후 그녀가 남긴 음성 메시지에서 들은 "상담할 것이 있어."라는 말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져들게 한거죠.

 

 

 그녀의 정체에 엮인 비밀들이 만만치 않은 것들이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환상의 여자』는 생각보다 거대한 스케일의 사건들 - 정치적인 음모나 폭력 조직 등 - 을 등장시킵니다. (그만큼 등장인물도 엄청 많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하고요.) 그리고 주인공에게는, "이 세상은 미담 따위 하나도 없어"라는 말과 함께 "그런데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질문이 계속해서 던져지게 되지요. 그리고 그 진실은 몇 번에 걸쳐 뒤통수를 확확 내리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반전을 만나게 되는 순간, 왜 남자가 그렇게 홀리듯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진실을 알아내려고 했는지, 그녀에 대한 묘한 집착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이제야 자리가 잡히더군요. 이 둘의 인연이 왠지 모르게 소름 끼치기도 했고요.

 

 

 단, 치밀하게 짜인 스토리 속에 무거운 사건들, 그리고 주인공의 입장에서 그려진 세세한 감정선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다소 지루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만만치 않게 묵직한 소설이어서 말이지요. 하지만 주인공의 끈질긴 사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저절로 빠져들게 되어 비밀을 추적하는데 가담하게 될 것입니다. '미담'은 아니지만 궁금해서 못 견딜 거에요.

 

 

 

 

Written by. 리니

일본 소설/ 추리, 스릴러/ 장르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137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서평입니다.

 

그 마을에 있던 것은 그저 그녀의 과거일 뿐이었다. 과거의 상처가 꼭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있으면 있을수록 뿌리가 깊다. 그녀는 고향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배신한 사람을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지만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것도 있다. 내게는 아버지의 자살이 그랬다. 아니다. 아버지의 자살이 아니다. 내가 아버지를 죽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날 아버지의 눈. 눈꺼풀을 닫으면 언제든 그곳에 있다. 아니, 이렇게 창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온다. 아버지와 아들. 특히 서른을 넘은 뒤 내 얼굴은 아버지와 무척 닮아졌다. 그 무렵 아이였던 나는 몰랐다. 어른의 마음이 그리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어른이라는 게 사실 그렇게 확고한 존재가 아니며, 한 사람 한 사람은 발붙일 곳이 위태위태하다는 것을. (115p)

`혼자 짊어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한 소년은 그것을 어느 날 스스로 깨닫고, 그리고 짊어지고 갈 결심을 했다. 다만 짊어진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인생은 애처로울 정도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아이는 다른 청년은 되지 않는다. 청년은 다른 어른이 되지 않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검도부를 그만 둔 것은 검도에 열중해 봐야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법학부를 목표로 공부했다. 그다음 목표는 사법시험, 그다음 목표는 변호사로 정의를 관철하는 것. 그러나 나는 정의를 조금도 믿지 않는다. (119p)

상상 이상의 범위에 걸쳐 얼룩이 있었다. 기울어 가는 햇빛이 레이스 커튼 너머로 비치고 있었다. 열린 창으로 아래에서 길을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때때로 올라온다. 바람은 거의 없었지만 희미하게 커튼을 움직였다. 그 그림자가 흔들리면서, 얼룩과 겹쳐져 작은 벌레가 떼를 지어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유달리 피얼룩이 짙은 곳은 창문에 가까운 구석이었다. 틀림없었다. 그녀는 그곳에 쓰러져 숨졌을 것이다. 내 여자는 이 방에서 살해당했다. 몸에 칼을 찔려 피를 흘리며 아픔과 고통과 분함 등 상상하기 힘든 온갖 감정에 휩싸여 숨졌을 게 틀림없었다. 가슴속 깊이 눌러 앉은 덩어리가 팽창해 목구멍에서 튀어 나올 것 같았다. (2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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