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환상의 여자』 가뇨 로이치 / 황금가지

 "이 세상은 미담 따위 하나도 없어"

 

 

 

  ▒ 책을 읽고 나서.

 

  내 곁에 있는 누군가의 과거가 왠지 안 좋은 예감으로 다가올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왠지 그 진실 속에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고, 누군가의 현재 이미지를 송두리째 바꿔버릴 당황스러운 상황들이 예견될 때 말이죠. 아마도, 그 진실을 덮어두고 현재에 충실할 것이냐, 아니면 좋던 나쁘던 진실을 알아야 하느냐를 고민할 것입니다. 저는 어떨까요? 만약에 이런 상황이 온다면, 전자가 그나마 평화로운 날들을 보장해줄 확률이 높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후자를 선택하게 되지 않을까요? 바로, 『환상의 여자』의 주인공처럼요. (물론 이 정도까지 몸 사리지 않고 덤벼들진 않겠다만…….)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주인공이 잠시 불륜을 저질렀던 한 여자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상황을 그리고 있어요. 작품의 포인트는 바로 '과거'인데요.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도 일종의 트라우마가 된 과거의 기억을 항시 지니고 있고, 직업적인 부분에서도 실패를 맛본 경험이 있어 여자의 사건을 조사하는데 족쇄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정말, 뭔가에 이끌린 듯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여자의 과거를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어떤 위험한 상황이 와도 끈질기게 과거를 파헤치지요. 그녀의 죽음 소식을 들은 전날, 법원에서 우연히 만났고 이후 그녀가 남긴 음성 메시지에서 들은 "상담할 것이 있어."라는 말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져들게 한거죠.

 

 

 그녀의 정체에 엮인 비밀들이 만만치 않은 것들이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환상의 여자』는 생각보다 거대한 스케일의 사건들 - 정치적인 음모나 폭력 조직 등 - 을 등장시킵니다. (그만큼 등장인물도 엄청 많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하고요.) 그리고 주인공에게는, "이 세상은 미담 따위 하나도 없어"라는 말과 함께 "그런데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질문이 계속해서 던져지게 되지요. 그리고 그 진실은 몇 번에 걸쳐 뒤통수를 확확 내리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반전을 만나게 되는 순간, 왜 남자가 그렇게 홀리듯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진실을 알아내려고 했는지, 그녀에 대한 묘한 집착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이제야 자리가 잡히더군요. 이 둘의 인연이 왠지 모르게 소름 끼치기도 했고요.

 

 

 단, 치밀하게 짜인 스토리 속에 무거운 사건들, 그리고 주인공의 입장에서 그려진 세세한 감정선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다소 지루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만만치 않게 묵직한 소설이어서 말이지요. 하지만 주인공의 끈질긴 사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저절로 빠져들게 되어 비밀을 추적하는데 가담하게 될 것입니다. '미담'은 아니지만 궁금해서 못 견딜 거에요.

 

 

 

 

Written by. 리니

일본 소설/ 추리, 스릴러/ 장르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137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서평입니다.

 

그 마을에 있던 것은 그저 그녀의 과거일 뿐이었다. 과거의 상처가 꼭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있으면 있을수록 뿌리가 깊다. 그녀는 고향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배신한 사람을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지만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것도 있다. 내게는 아버지의 자살이 그랬다. 아니다. 아버지의 자살이 아니다. 내가 아버지를 죽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날 아버지의 눈. 눈꺼풀을 닫으면 언제든 그곳에 있다. 아니, 이렇게 창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온다. 아버지와 아들. 특히 서른을 넘은 뒤 내 얼굴은 아버지와 무척 닮아졌다. 그 무렵 아이였던 나는 몰랐다. 어른의 마음이 그리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어른이라는 게 사실 그렇게 확고한 존재가 아니며, 한 사람 한 사람은 발붙일 곳이 위태위태하다는 것을. (115p)

`혼자 짊어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한 소년은 그것을 어느 날 스스로 깨닫고, 그리고 짊어지고 갈 결심을 했다. 다만 짊어진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인생은 애처로울 정도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아이는 다른 청년은 되지 않는다. 청년은 다른 어른이 되지 않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검도부를 그만 둔 것은 검도에 열중해 봐야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법학부를 목표로 공부했다. 그다음 목표는 사법시험, 그다음 목표는 변호사로 정의를 관철하는 것. 그러나 나는 정의를 조금도 믿지 않는다. (119p)

상상 이상의 범위에 걸쳐 얼룩이 있었다. 기울어 가는 햇빛이 레이스 커튼 너머로 비치고 있었다. 열린 창으로 아래에서 길을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때때로 올라온다. 바람은 거의 없었지만 희미하게 커튼을 움직였다. 그 그림자가 흔들리면서, 얼룩과 겹쳐져 작은 벌레가 떼를 지어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유달리 피얼룩이 짙은 곳은 창문에 가까운 구석이었다. 틀림없었다. 그녀는 그곳에 쓰러져 숨졌을 것이다. 내 여자는 이 방에서 살해당했다. 몸에 칼을 찔려 피를 흘리며 아픔과 고통과 분함 등 상상하기 힘든 온갖 감정에 휩싸여 숨졌을 게 틀림없었다. 가슴속 깊이 눌러 앉은 덩어리가 팽창해 목구멍에서 튀어 나올 것 같았다. (2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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