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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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라는 단어를 보면 흔히 타인의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정신학적 용어에 따른 애도의 의미는 ‘모든 의미 있는 상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을 뜻한다고 한다. 애도의 대상과 방향은 고정되지 않고, 오로지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회복하는 과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철학자 김진영 선생이 임종 3일 전까지 꼬박꼬박 써 내려갔던 일기를 모은 이 책이 단순히 ‘투병일기’가 아니라 ‘애도일기’인 것은 그가 병상에 누워 애도하며, 삶을 긍정하고 투쟁한 기록이 꼼꼼히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이 애도일기라는 부제에는 다른 암시도 있다. 그가 번역한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절절하게 표현한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긴 이가 김진영 철학자였다. 그 아름다운 글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아침의 피아노> 속에서 그는 번역한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현재의 감회를 전한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다름 아닌 부끄러움과 괴로움이다. 타자를 향한 사랑으로 인한 고통을 표현했던 당시 화자에 비해, 자신의 고통을 걱정하는 이기심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현존하는 자신은 지극히 행복하고, 그것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지금 살아 있다는 것 -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병환과 죽음 앞에서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순간순간 눈물이 솟구칠 때도 있으나 저자는 매일 아침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오랜 시간 타자들 앞에 서 있었던 자신의 존재, 말, 시간, 사랑의 순간들을 기억한다. 어느 하나 무의미한 순간들은 없었다.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투쟁했던 한 철학자의 삶이 이 책에 모두 들어 있다. 짧은 글들의 모음이지만 텍스트를 둘러싼 여백에 포함된 한숨과 긴장, 슬픔과 고독의 시간들을 모두 읽어낼 수 있다면.

처음에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애도일기’라는 부제와 ‘아침의 피아노’라는 제목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내 좁은 식견으로는 아침보다 ‘저녁’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예상이 틀렸다. 이 책은 정말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아침이다. 사랑과 아름다움을 말하고,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힘차게 걸어나갔던, 한 철학자의 내밀한 기록이다.

 

흐른다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 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마음 놓고 떠내려가는 일 -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유였던가.

나 또한 나의 하류에 도착했다. 급류를 만난 듯 너무 갑작이어서 놀랍지만 생각하면 어차피 도달할 곳이다. 적어도 지금가지 나의 하류는 밤비 지나간 아침처럼 고요하고 무사하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공부하고 돌아오는 나에게 큰 서재를 만들어주고 싶어 하셨다. 여기가 그 서재가 아닐까. 나는 여기서 한 권의 책을 써야 하지 않을까.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 나와 나의 다정한 사람들, 미워하면서도 사실은 깊이 사랑했던 세상에 대해서 나만이 쓸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써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지금 내가 하류의 서재에 도착한 이유가 아닐까.

방금 아이가 묻던 말이 생각난다. 신기해 빗방울은 왜 동그랄까. 나는 대답했었다. 바보야 물이 무거우니까 떨어지면서 아래로 맺히는 거지. 그것도 몰라? 누가 그걸 몰라. 그래도 물방울이 신기해. 너무 예쁘잖아…… 문득 차라투스트라의 한 문장 : "인간은 가을의 무화과다. 인간은 무르익어 죽는다. 온 세상이 가을이고 하늘은 맑으며 오후의 시간이다." 무르익은 것은 소멸하고 소멸하는 것은 모두가 무르익었다. 니체는 그 순간을 ‘조용한 시간 Der stille Stunde’이라고 불렀다. 조용한 시간 - 그건 또한 거대한 고독의 순간이다. 사람은 이 난숙한 무화과의 순간에 도착하기 위해서 평생을 사는가.

내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내가 끝까지 사랑했음에 대한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다.

군포 병원으로 면역 항암제를 맞으러 가는 길. 꽉 막힌 고속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들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 강렬한 그리움, 아니 그리움이 아니다. 살아서 한 번도 품어보지 않았던 욕망의 충동. 어머니의 품 안에 안기고 싶은, 아니 품 안으로 파고들고 싶은, 그렇게 어머니의 몸속을, 그 몸 안의 어떤 갱도를 통과하고 싶은 절박한 충동.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멘트 바닥을 천공하는 지렁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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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맑음 - 청소년과 함께 읽는 5.18 민주화 운동 이야기 창비청소년문고 33
임광호 외 지음, 박만규 감수, 5.18 기념재단 기획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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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연히 뉴스 기사를 읽고 경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2019년 촛불 집회 당시 엄청난 군 병력과 탱크, 장갑차 등으로 무력 진압을 하려고 했던 문건이 드러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무력시위로 변질될 때를 대비한 병력이라고는 하지만 촛불을 들고 질서를 지키며 평화적인 시위를 했던 시민들에게 이런 ‘거리를 쓸어버릴 만한’ 군 병력이 가당키나 할까요. 그 이야기를 듣고 ‘만약’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어디에선가 작은 충돌이라도 일어난다면, 거리에 있는 수많은 시민들을 ‘폭도’로 만들어버리는 건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만약’을 상상하면서 자연스레 떠오른 것은 1980년 5월의 광주였습니다.

“열받아서 몰입이 잘 된다”는 이유로 근현대사를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인이 되기 전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후, 교과서보다는 문학이나 만화, 영화, TV 시사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갔지요. 식민 통치를 받고, 수차례 전쟁을 겪고,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가 되기까지 대한민국의 역사는 아픈 역사 투성이지만, 가장 가슴 아픈 역사는 국가가 국민에게 폭력을 휘두른 사건들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가까운 과거의 역사인 5.18은 너무나 깊게 새겨진 숫자였습니다.

<5월 18일, 맑음>은 그날의 기억을 사실대로 전달함과 동시에, 역사를 어려워하는 학생들과 함께 읽을 수 있도록 쉽고 친근하게 기술한 책입니다. 광주에서 벌어졌던 열흘간의 항쟁뿐 아니라, 운동이 발발하기 전 대한민국의 상황, 그리고 5.18 이후 현재까지의 노력 등을 꼼꼼하게 담았습니다. 또한, 각 장마다 민주주의, 국가 폭력 등과 같은 키워드를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한편, 세계 속에서 5.18과 유사한 풍경을 그려낸 일들을 함께 소개하기도 했지요.

책은 어렵지 않게 편안하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사소한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소해 보이는 일들은 5.18의 진실을 하나하나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최초 사망자가 우연히 길을 걸어가던 청각장애인이었다는 것과, 그해 공수부대에서 수개월 동안 강도 높은 훈련과 세뇌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이 눈뜨고 보기 힘들었던 무차별적인 폭행과 진압이었다는 점을 반증합니다. 영화 <택시 운전사>에도 등장했던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는 “베트남 전쟁에서 종군 기자로 일할 때도 이렇게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다(82쪽)”고 말했다고 하지요. 어떤 설명을 하든 그때의 상황과 같을 수 있을까요.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만들어진 책은, 그 생생한 역사의 눈물 때문에 결코 편안하게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몸이 떨렸습니다. 

“원망스럽다, 이런 것들은 별로 없었어요. 기왕에 나는 죽겠다고 생각을 했고, (……) 당신들은 살아서 다음에 제대로 이야기해 주겠지. (……) 10년이 갈지, 100년이 갈지. 그거야 모르지만은 언젠가는 이 얘기가 나오겄지, 그렇게 생각을 했죠. (122쪽, 양인화, 당시 시민군의 증언)”

하나하나 기억할 것들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들불야학’을 통해 노동자를 교육하다가 민주화운동을 이끌게 되었던 ‘윤상원’ 열사의 이름과, 생생하게 남은 증언의 주인공들, 시위에 참여하고 시위를 도왔던 사람들과, 남모르게 눈물 흘리며 현재까지도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유족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 ‘아픔의 연대를 향해’를 통해 기억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습니다 아픈 역사를 단지 역사적 사실로만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끊임없이 끌어올려 현재의 상황을 꼼꼼히 따져보는 것.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나갈 청소년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조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국가의 그 누구에게도 국민의 인권을 마음대로 줄일 권리는 없습니다. 대통령일지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이 만든 법에서 나오고 국민은 누구나 그 법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이며 그가 가진 권력은 국민들에게 잠시 위임받은 것일 분입니다.
유신 공화국에 살던 사람들이 바란 민주주의는 그렇게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 같은 사소한 일부터 소신대로 신문 기사를 쓰고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는 것,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것 같은 작지만 소중한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자 했지요.
- P35

공수 부대는 한층 더 잔혹하고 무차별적이었습니다. 이성을 잃은 듯 사무실이나 주택, 여관까지 마구 들어가 곤봉으로 때리고 대검으로 찔렀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잡혀 오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속옷만 입게 한 채 마치 군대에서 하듯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등을 시키며 기합을 주었지요. 따라 하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구령에 늦을 경우 여지 없이 곤봉을 휘둘렀습니다. 가톨릭 사제조차 "옆에 총이 있었다면 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라고 느낄 지경이었습니다. 공수 부대와 함께 시위 진압을 맡은 경찰 간부마저 시위대에게 "제발 집으로 돌아 가라, 공수 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라며 울먹였지요. - P56

"몸이 약해서 보기에 그 헌혈허시면 안 되겠다고 그러면 막 화를 낸 거예요. 내가 죽어도 이럴 때 피 한 방울도 안 주면 내가 시민이 아니지 않냐. (……) 그때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슬펐고, 또 가장 인간으로서 감동적인 순간들을 너무 많이 체험을 한 거죠."
헌혈 행렬에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던 가정주부나 젊은 여성들이 특히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안타까운 일도 생겼습니다. 전남여성 3학년 박금희 학생이 광주기독병원에서 헌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 총을 맞고 사망한 것입니다. 박금희 학생은 헌혈했던 병원으로 다시 실려 오고 말았습니다. - P98

만약 어느 도시에서 치안이 사라진다면, 즉 경찰이 모두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잘못을 저질러도 처벌할 사람이 없다면? 남의 집 담을 넘는 도둑들, 은행마다 들이닥쳐 자루 한가득 돈을 실어 나르는 강도들, 내키는 대로 거리에 불을 지르며 화를 푸는 이들로 도시는 큰 혼란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한 21일 이후부터 다시 진입해 들어온 27일까지 광주는 사실상 치안이 사라진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군인도 경찰도 없었지요. 하지만 광주는 혼란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도시는 무척 안전했습니다. - P107

"도청 정문을 나설 때, 한편으로는 비겁하게 나 혼자만 살기 위해 빠져 나가는 것 같은 심정과, 또 한편으로는 저 많은 젊은이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는 운명의 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자꾸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많은 시민이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남아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도청 YMCA 건물에 있다가 집으로 가라 하면 도청으로 가고 도청에서 가라 하면 다시 YMCA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도청에 남은 그 누구도, 돌아가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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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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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혐오의 사회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하등한 존재로 취급하며 모욕하고 이용하는 일들이 흔하게 보인다. 서로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조롱의 말을 쏟아내고, 누군가의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귀를 닫아버리는 일들도 허다하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싸움은 늘 벌어진다. 애써 보려 하지 않았을 뿐,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들을 통해 심각함을 인지하는 요즘이다. 다름을 포용한다면 달라질 수 있을까.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나의 영역을 내주거나 누군가가 침투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면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러면 나는 나와는 다른 사람을 얼만큼이나 포용할 수 있을까.

<버드 스트라이크>는 신비한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날개가 달린 인간 (익인)이 등장하는데, 고원 지대에 모여 사는 익인 무리들은 필요에 의해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다친 대상을 꼭 안아 치유를 할 수도 있다. 생김새도, 사는 모습도, 도시의 사람들(날개를 가지지 않은 보통 인간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들은 오로지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살기만을 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도시를 습격하기 시작한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시작한 싸움이다.

이 싸움의 중심에 ‘비오’와 ‘루’가 있다. ‘비오’는 다른 익인들과 비교해 현저히 작은 날개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익인들 무리에서의 소중한 구성원이지만 정작 중요한 행사에는 진정한 익인으로서 참여하지 못한다. ‘루’는 도시 사회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정쩡한 위치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소녀다. 우연히 만난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마음을 나누게 된다. 수많은 갈등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둘의 모습은 경계’에 맞서 싸우는 많은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성별과 외모, 피부색, 정체성, 가치관, 사랑의 형태, 가족의 형태…… 다수의 억압으로 만들어진, 결코 쉽게 부서지지 않는 경계들을.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죽을 듯이 날갯짓을 하며 앞서 나가던 비오의 모습을 떠올린다. 남들보다 작은 날개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 뒤에 숨겨진 수만 번의 날갯짓을 우리는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편견과 차별에 맞서기 위해 누군가가 오랫동안 몰두하고 투쟁해온 일들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우리는 자신이 태어나는지도 모르고 태어났지만 모두가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것. 여전히 어디선가 자신의 리스크를 넘어서고 작은 날개로 날갯짓을 하는 이들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떨어지지 않길 바라며 응원하고 지켜보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날그날의 감정에 충실할 권리가 있고, 그 결과로 인한 짐을 제 것이 아님에도 나눠서 져야 할 때가 있지. 그렇다고 해서 비오에게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다는 뜻은 아니란다. 우리가 짐을 나누는 것은 서로를 향해 마음을 베푸는 일이야. 그리고 나는 내가 데려왔던, 나를 다녀갔던 그 사람에게 베푼 것에 대해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나더러 좀 경솔했다고만 했을 뿐, 다음에 도시 사람 누군가가 우리의 눈앞에서 곤경에 빠져 있다면 그게 어떤 사람이든 모두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손을 내밀 테고 말이야. - P93

"그러면 그 애는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요."
그 작은 날개를 가지고서.
"어디가 됐든 그곳이…… 여기는 아니겠지. 또한 그렇다고 하여 생각만큼 멀리도 아닐 테고 말일세."
옛사람은 오수에 젖어 드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 그 작은 날개로 어디까지 날겠는지 고민하기보다는……"
이제는 날 수 없는 몸으로 초원조의 부름을 기다리는 옛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나." - P122

루가 눈을 떴을 때는 절벽 바깥으로 청년들의 모습이 세 개의 점처럼 멀어져 있었다. 비오는 이미 그 바람을 온몸에 맞으며 앞서 날아간 것이었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날개의 크기가 다른데 그게 가능한 일인지 루는 알기 어려웠으나, 다만 비오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그동안 다른 이들보다 몇 배의 날갯짓을 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몸을 으스러뜨리거나 목덜미를 낚아채어 던져 버릴 것만 같은 바람을 향해 비오가 날개를 활짝 펼쳤을 때, 그 앞에 펼쳐진 정경을 루는 결코 해독하거나 형언할 수 없을 것이었다. 루가 아는 어떤 사전을 머릿속에서 넘겨 보아도 이 느낌을 부를 마땅한 이름을 찾을 수 없었으나, 그것이 불안을 밀어 내고 순수한 경탄으로만 루를 감싸 왔다. - P168

혹시 그건 따라오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가 내려앉을 유일한 땅 한 뼘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의 휴식처로 남을 마음이 없어. 그래서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땅을 떠나기로 한 거야.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유한한 인간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라고 생각하니까.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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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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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스스로의 일에 변덕을 부리는 순간들을 생각한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것, 눈물 나게 힘들다가도 이 정도론 더 버틸 수 있다고 위안하는 것, 혼자가 좋다고 하지만 정말 혼자라면 견딜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것, 누군가를 싫어했다가도 못이긴 척 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 금세 미소를 띠고 살아가는 것. 이랬다저랬다 수많은 일들을 변덕스럽게 뒤집는 건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삶을 버텨나가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꼭 붙잡고 삶의 흐름과 관성을 유지해나가는 것과 같이.

박소란의 몇몇 시를 읽고 감동한 적이 있다. 우연히 마주친 시였고, 하나의 시를 읽는 것과 시인의 궤적을 품고 있는 한 권의 시집을 통째로 읽는 것은 당연히 결이 다른 얘기였기에 나는 또 경험해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었다. 초반부터 조금은 두근대는 마음이었다가, 점점 조금씩 벅차올랐다. ‘괜찮다’는 말 가운데서 머뭇거리고 변덕을 부리던 일들이 떠올랐고, 모두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시인의 말에 살짝 울컥하기도.

심야 식당의 우동이나 퇴근길에 산 상추 한 봉지, 방바닥에 깐 전기장판과 같이 정감 가는 소재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끔은 작은 공간에서 혼자 무언가에 감탄하거나 위안을 받고, 가끔은 주저앉아 맥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가끔은 많은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이 속에 나는 있다 / 지금은 안심할 수 있다 (108쪽, <천변 풍경>)고 말하는 시인의 일상은 익숙한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가. 어쩌면 조금은 다를지 몰라도, 견딜 수 있다거나 잊으면 그만이라고 다독이거나, 죽음과 삶 사이에서 살아있다고 매번 다짐하는 시인의 말은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곤 하는 것.

“벽돌에게도 밤은 있고 / 또 그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아픈 기도의 문장을 읊조리기도 할테지만 / 그것은 단지 벽돌의 일 / 당신과는 무관한 일” (114쪽, <이 단단한>)

시집을 읽으면서 자꾸 이 시를 보내주고 싶은 사람들 생각이 났다. 책을 자주 읽지 않아도, 시를 어색하거나 낯설어하든 간에 찬찬히 읽어내리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것 같아서. '한 사람이 돌진하여 슬픔을 쏟아내고, 그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그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리는 (65쪽, <감상>)' 일을, 나도 조심스럽게 따라 해보고 싶다고 나지막이 다짐해보는 밤이다.

 

 

 

 

 

 


● 18쪽, <비닐봉지>

퇴근길에 김밥 한줄을 사서

묵묵한 걸음을 걷는



묵묵한 표정을 짓는

입가의 묻은 참기름 깨소금을 가만히 혀로 쓸 때마다

알 수 없는,

참 알 수 없는 맛이다



● 20쪽, <심야 식당>

모르겠어요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 86쪽, <벽>

언제부터

벽은 거기에 있었나

벽에 기대어 생각했다 벽의 아름다운 탄생에 대해



벽은 온화하고 벽은 진중하니까 벽은 꼭 벽이니까

● 93쪽, <모르는 사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몰래 훔쳐봅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 100쪽,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을 잃고 난 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그것을 아주 갖지 않는다는 것

갖지 않고도 산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 나는 더 아름다워질 수 있게 되었다

머리핀이 아니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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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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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하고 좁은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올라간다. 세월의 흔적이 약간은 느껴지는,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돌벽과 촌스럽고 정겨운 초록색의 바닥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온다. 지대가 높은 옥상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수많은 불빛이 뒤섞여 새로운 색을 만든다. 떠들썩한 소리 속에 고요한 옥상의 분위기가 묘하게 어우러진다.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분명 거리의 것과는 다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이런 옥상의 풍경을, 귀엽고 키치한 그림 속에 그대로 담은 이 책의 표지가 퍽 마음에 든다. 딱 정세랑의 작품 이미지 그대로였으니까. 광각으로 담은 듯한 세상의 풍경을 그리면서도 결코 무거워지지 않는 재기발랄한 정세랑의 세계같다.


초반에 나왔던 <웨딩드레스 44>는 표현력이 재미있는 소설이라 인상 깊었다. 분량 면에서는 단편이지만 묘하게 장면을 읽는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최근 읽고 있는 작가의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의 축소판 같기도 했다. 단 하나의 웨딩드레스가 수명을 다하기까지 거쳐갔던 44명의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은 작품의 주인공이라 하기엔 너무나 많은 인원을 내세웠지만 뒤죽박죽 어지럽지 않았다. 이유도 상황도 제각각인 그들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을 하고, 그 시선 속에는 각자 나름의 행복과 불행이 모두 들어 있었으니까.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을 가늠케 하는 단편들도 이어졌다. 오컬트와 뱀파이어, 판타지와 SF…… 내 눈을 의심하게 하는 독특한 장면들 속에서,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와 상징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었다. 격한 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특별한 연대를 그린 <옥상에서 만나요>, 뱀파이어가 된 여자의 이야기 <영원히 77 사이즈>, 쿠키 귀를 가진 남자의 이야기 <해피 쿠키 이어> 같은 단편들은 정세랑 작가여서 쓸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작가로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풀어낸 느낌이랄까.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작가의 역량인데 이 자유로움이 어색하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단편을 꼽자면, 돌연사한 사람들의 데이터를 모아 네트워크를 만드는 <보늬>와, 이혼을 앞두고 집안의 살림들을 친구들에게 되파는 <이혼 세일>이 기억에 남는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선호하는 성향상, 이런 단편들이 조금 더 깊이 다가오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매력적인 소설들이 가득했다.


표면적으론 독특한 배경과 장르로 작가만의 개성을 보여주던 단편들이었으나, 파고들어가면 사람 하나하나의 관계를 깊이 고민하게 하는 시선이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새 작품들 속 한 인물, 한 인물들에게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입해보고 있었다. 과거에 만났던 이들, 지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들, 미래에, 내 눈 속에 담게 된 이들, 혹은 나의 모습들. 그리고 다정하게 불리는 이름들. 전체적으로 시원하고 상쾌한 소설들이어서 불행을 이야기해도 전혀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 33쪽, <웨딩드레스 44>

"자기는 왜 그런 생각을 안해? 불행은 보이지 않는 모퉁이 너머마다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놀래키고, 인생은 그 반복일 뿐이라고 누가 그랬어.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우리 둘은 이제 불행 공동체가 된 거라고."

"평안하게 끝까지 잘 사는 사람들도 아주 없진 않잖아?"

"그런 경우라 해도 평균수명을 생각해서 일곱살쯤 어린 남자를 사랑할걸."

여자는 푸념했고, 교통사고 블랙박스 영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여간 어두운 생각 좀 하지 마."

남자는 간단하게 말했다. 여자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두워. 사랑은 어두워. 가족이 된다는 건 어두워. 어두운 면은 항상 있어. 아이를 낳으면 설마 그 아이의 죽음까지 두려워하게 되는 것일까? 여자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누운 채로 늘어날 두려움을 헤아려보았다.

● 43쪽, <효진>

적의에 대해 생각해. 적의에 오래 노출되고도 괜찮은 사람은 여기든 거기든 없을 거야. 그 나쁜 입자들을 씻어낼 수 있는 샤워 비슷한 게 있다면 좋겠다고도 생각해. 간편한 에어샤워 같은 것.

울면서 만든 베리타르트의 맛을 두고 컴플레인이 걸려오진 않았어. 슈거파우더로는 거의 모든 걸 덮을 수 있지. 사람들의, 관계의 가장 저열하고 싫은 부분까지도 말이야.

● 133쪽, <보늬>

유전자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그 사람의 심장이 너무 지쳐버렸나. 셋이서 고민하기도 하고 혼자서 고민하기도 하다가 어떤 날은 아예 고민하지 않기도 했다. 어쩌면 일정 퍼센트의 어린 개구리들도 그냥 죽는지 모른다. 일정 퍼센트의 낙타들도, 박쥐들도, 악어들도, 문어들도. 우리가 인간이라서 자연스러운 도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며불며 이렇듯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모든 것으로부터 한발짝 뒤로 물러서는 마음이 드는 그런 날이 있었다.

언니는 도태된 것일까. 종이 가만히 버리고 가는 일부였을까. 달팽이 진액처럼 뒤에 남았나.

● 216쪽, <이혼 세일>

들을 때는 별 도움 안되는 소리를 한다 싶었지만, 그후 지원은 이상하게 이재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 고정되지 않았어, 고정되지 않았어, 하고 주문처럼 되풀이했던 것이다. ‘보기 드물게 일관적인 양육자‘라는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날에는 ‘보기 드물게‘ 쪽에 방점을 두어 스스로를 칭찬하고, 어떤 날에는 ‘일관적인 양육자‘ 쪽에 방점을 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랬기에 지원은 어떻게든 아이들을 맡기고 이재의 이혼 세일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서 무언가 근사한 말을 돌려줘야 했다. 주문 같은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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