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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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하고 좁은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올라간다. 세월의 흔적이 약간은 느껴지는,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돌벽과 촌스럽고 정겨운 초록색의 바닥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온다. 지대가 높은 옥상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수많은 불빛이 뒤섞여 새로운 색을 만든다. 떠들썩한 소리 속에 고요한 옥상의 분위기가 묘하게 어우러진다.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분명 거리의 것과는 다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이런 옥상의 풍경을, 귀엽고 키치한 그림 속에 그대로 담은 이 책의 표지가 퍽 마음에 든다. 딱 정세랑의 작품 이미지 그대로였으니까. 광각으로 담은 듯한 세상의 풍경을 그리면서도 결코 무거워지지 않는 재기발랄한 정세랑의 세계같다.


초반에 나왔던 <웨딩드레스 44>는 표현력이 재미있는 소설이라 인상 깊었다. 분량 면에서는 단편이지만 묘하게 장면을 읽는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최근 읽고 있는 작가의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의 축소판 같기도 했다. 단 하나의 웨딩드레스가 수명을 다하기까지 거쳐갔던 44명의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은 작품의 주인공이라 하기엔 너무나 많은 인원을 내세웠지만 뒤죽박죽 어지럽지 않았다. 이유도 상황도 제각각인 그들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을 하고, 그 시선 속에는 각자 나름의 행복과 불행이 모두 들어 있었으니까.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을 가늠케 하는 단편들도 이어졌다. 오컬트와 뱀파이어, 판타지와 SF…… 내 눈을 의심하게 하는 독특한 장면들 속에서,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와 상징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었다. 격한 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특별한 연대를 그린 <옥상에서 만나요>, 뱀파이어가 된 여자의 이야기 <영원히 77 사이즈>, 쿠키 귀를 가진 남자의 이야기 <해피 쿠키 이어> 같은 단편들은 정세랑 작가여서 쓸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작가로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풀어낸 느낌이랄까.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작가의 역량인데 이 자유로움이 어색하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단편을 꼽자면, 돌연사한 사람들의 데이터를 모아 네트워크를 만드는 <보늬>와, 이혼을 앞두고 집안의 살림들을 친구들에게 되파는 <이혼 세일>이 기억에 남는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선호하는 성향상, 이런 단편들이 조금 더 깊이 다가오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매력적인 소설들이 가득했다.


표면적으론 독특한 배경과 장르로 작가만의 개성을 보여주던 단편들이었으나, 파고들어가면 사람 하나하나의 관계를 깊이 고민하게 하는 시선이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새 작품들 속 한 인물, 한 인물들에게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입해보고 있었다. 과거에 만났던 이들, 지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들, 미래에, 내 눈 속에 담게 된 이들, 혹은 나의 모습들. 그리고 다정하게 불리는 이름들. 전체적으로 시원하고 상쾌한 소설들이어서 불행을 이야기해도 전혀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 33쪽, <웨딩드레스 44>

"자기는 왜 그런 생각을 안해? 불행은 보이지 않는 모퉁이 너머마다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놀래키고, 인생은 그 반복일 뿐이라고 누가 그랬어.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우리 둘은 이제 불행 공동체가 된 거라고."

"평안하게 끝까지 잘 사는 사람들도 아주 없진 않잖아?"

"그런 경우라 해도 평균수명을 생각해서 일곱살쯤 어린 남자를 사랑할걸."

여자는 푸념했고, 교통사고 블랙박스 영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여간 어두운 생각 좀 하지 마."

남자는 간단하게 말했다. 여자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두워. 사랑은 어두워. 가족이 된다는 건 어두워. 어두운 면은 항상 있어. 아이를 낳으면 설마 그 아이의 죽음까지 두려워하게 되는 것일까? 여자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누운 채로 늘어날 두려움을 헤아려보았다.

● 43쪽, <효진>

적의에 대해 생각해. 적의에 오래 노출되고도 괜찮은 사람은 여기든 거기든 없을 거야. 그 나쁜 입자들을 씻어낼 수 있는 샤워 비슷한 게 있다면 좋겠다고도 생각해. 간편한 에어샤워 같은 것.

울면서 만든 베리타르트의 맛을 두고 컴플레인이 걸려오진 않았어. 슈거파우더로는 거의 모든 걸 덮을 수 있지. 사람들의, 관계의 가장 저열하고 싫은 부분까지도 말이야.

● 133쪽, <보늬>

유전자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그 사람의 심장이 너무 지쳐버렸나. 셋이서 고민하기도 하고 혼자서 고민하기도 하다가 어떤 날은 아예 고민하지 않기도 했다. 어쩌면 일정 퍼센트의 어린 개구리들도 그냥 죽는지 모른다. 일정 퍼센트의 낙타들도, 박쥐들도, 악어들도, 문어들도. 우리가 인간이라서 자연스러운 도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며불며 이렇듯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모든 것으로부터 한발짝 뒤로 물러서는 마음이 드는 그런 날이 있었다.

언니는 도태된 것일까. 종이 가만히 버리고 가는 일부였을까. 달팽이 진액처럼 뒤에 남았나.

● 216쪽, <이혼 세일>

들을 때는 별 도움 안되는 소리를 한다 싶었지만, 그후 지원은 이상하게 이재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 고정되지 않았어, 고정되지 않았어, 하고 주문처럼 되풀이했던 것이다. ‘보기 드물게 일관적인 양육자‘라는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날에는 ‘보기 드물게‘ 쪽에 방점을 두어 스스로를 칭찬하고, 어떤 날에는 ‘일관적인 양육자‘ 쪽에 방점을 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랬기에 지원은 어떻게든 아이들을 맡기고 이재의 이혼 세일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서 무언가 근사한 말을 돌려줘야 했다. 주문 같은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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