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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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스스로의 일에 변덕을 부리는 순간들을 생각한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것, 눈물 나게 힘들다가도 이 정도론 더 버틸 수 있다고 위안하는 것, 혼자가 좋다고 하지만 정말 혼자라면 견딜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것, 누군가를 싫어했다가도 못이긴 척 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 금세 미소를 띠고 살아가는 것. 이랬다저랬다 수많은 일들을 변덕스럽게 뒤집는 건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삶을 버텨나가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꼭 붙잡고 삶의 흐름과 관성을 유지해나가는 것과 같이.

박소란의 몇몇 시를 읽고 감동한 적이 있다. 우연히 마주친 시였고, 하나의 시를 읽는 것과 시인의 궤적을 품고 있는 한 권의 시집을 통째로 읽는 것은 당연히 결이 다른 얘기였기에 나는 또 경험해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었다. 초반부터 조금은 두근대는 마음이었다가, 점점 조금씩 벅차올랐다. ‘괜찮다’는 말 가운데서 머뭇거리고 변덕을 부리던 일들이 떠올랐고, 모두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시인의 말에 살짝 울컥하기도.

심야 식당의 우동이나 퇴근길에 산 상추 한 봉지, 방바닥에 깐 전기장판과 같이 정감 가는 소재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끔은 작은 공간에서 혼자 무언가에 감탄하거나 위안을 받고, 가끔은 주저앉아 맥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가끔은 많은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이 속에 나는 있다 / 지금은 안심할 수 있다 (108쪽, <천변 풍경>)고 말하는 시인의 일상은 익숙한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가. 어쩌면 조금은 다를지 몰라도, 견딜 수 있다거나 잊으면 그만이라고 다독이거나, 죽음과 삶 사이에서 살아있다고 매번 다짐하는 시인의 말은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곤 하는 것.

“벽돌에게도 밤은 있고 / 또 그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아픈 기도의 문장을 읊조리기도 할테지만 / 그것은 단지 벽돌의 일 / 당신과는 무관한 일” (114쪽, <이 단단한>)

시집을 읽으면서 자꾸 이 시를 보내주고 싶은 사람들 생각이 났다. 책을 자주 읽지 않아도, 시를 어색하거나 낯설어하든 간에 찬찬히 읽어내리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것 같아서. '한 사람이 돌진하여 슬픔을 쏟아내고, 그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그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리는 (65쪽, <감상>)' 일을, 나도 조심스럽게 따라 해보고 싶다고 나지막이 다짐해보는 밤이다.

 

 

 

 

 

 


● 18쪽, <비닐봉지>

퇴근길에 김밥 한줄을 사서

묵묵한 걸음을 걷는



묵묵한 표정을 짓는

입가의 묻은 참기름 깨소금을 가만히 혀로 쓸 때마다

알 수 없는,

참 알 수 없는 맛이다



● 20쪽, <심야 식당>

모르겠어요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 86쪽, <벽>

언제부터

벽은 거기에 있었나

벽에 기대어 생각했다 벽의 아름다운 탄생에 대해



벽은 온화하고 벽은 진중하니까 벽은 꼭 벽이니까

● 93쪽, <모르는 사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몰래 훔쳐봅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 100쪽,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을 잃고 난 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그것을 아주 갖지 않는다는 것

갖지 않고도 산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 나는 더 아름다워질 수 있게 되었다

머리핀이 아니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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