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손잡기 봄날의 시집
권누리 지음 / 봄날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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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두 얼굴

나는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은 더위를 견뎌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제일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냥 너무 극적인 것은 싫어서 잔잔한 계절을 찾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그러나 다시 여름, 하고 입에 굴려보기로 한다. 여름,이라고 말하자 갑자기 눈부신 추억들이 떠오른다. 찌는듯한 더위의 길을 걷다가 모든 것이 씻겨내려가는 물줄기가 확 뿌려지는 것처럼. 스무 살 때 친구와 여행을 갔다가 너무 더워서 분수대에 그냥 뛰어들어간 적이 있다. 그때의 깔깔대던 웃음은 여름이라는 말과 닮았다.

권누리 시인의 시집 「한여름 손잡기」의 표지를 보고 거의 말을 잇지 못하는 심정이 되었었다. 이렇게 예쁜 표지가 있나? 이렇게 제목과 잘 어울리는 표지가 있을까? 멀리서 언뜻 보면 은은한 그라데이션으로 색상만 뿌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다양한 것이 보인다. 여름의 싱그러움과 뿌연 뜨거움이 함께 있다. 잔해처럼 뿌려진 물줄기는 내가 여름을 입에 굴렸을 때 떠오르는 기억들이 담겨 있을 것만 같다. 한동안 나는 잠깐 표지에 잠겼다가 시를 천천히 읽었다.



여름은 시 속에서 계속해서 언급이 되고, 여름이 들어가는 시는 특히나 더 좋았고, 시인이 쌓아 올린 여름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한낮에는 눈부시게 밝고, 저녁이 되면 모두 캄캄해지는 않은 채 어스름하게 바래지는 여름. 한없이 가볍다가도 물이 내리면 다른 계절보다 한없이 무거워지는 여름. 어쩌면 사랑과 여름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밝음과 어둠 속에서


시인의 언어는 잔잔히 박동하는 듯하면서도 가끔은 어두운 질문들을 던지고, 나는 그 지점들에 멈춰서 생각한다. 오답과 죽음, 불신과 고립... 글의 초반 눈부신 여름의 추억을 상기했지만 시집에서는 꽤나 어두운 시어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왜인지 모르게 아주 깊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적당한 온도를 유지한다. 이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시를 좋아하게 된 건 시인이 만든 공백으로 ‘열려 있는’ 느낌이 좋아서였는데, 사실 시집 한 편을 읽으면서 모든 행간에 집중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읽기는 조금 버겁긴 하다. 그러나 이렇게 긴 호흡을 다시금 할 수 있게 하는 건 무심코 읽다가 만나는 이런 멋진 문장들 같은 것.

권누리 시인의 「한여름 손잡기」 가 좋았던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표지를 닮은 시인의 색채가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고 있어서였다. 한 쪽은 영롱하게 빛나고 한쪽은 바래진 채로 구르는 물방울 같은 시집이었다.


<하트*어택>

미안해하는 나를 상상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니?



물으면 나는 잘 모르겠고요

하지만 사랑에는 제법 재능이 있습니다

- P15

<한여름 손잡기>

여름이 여름이 아니었더라면.



사랑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무책임했고,

그래서 지난여름 내내 그것만 열심히 했다네요 - P79

<도로시 커버리지>

목적지를 위한 결정은 저 멀리 유리 숲에 유기해두었어요

버려두고 온 단단한 마음이 여기에서도 아주 잘 보이고요.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오답을 어떻게 아니?

- P47

<한철>

죽음이 태어나는 방법에 관해 생각하는 일은 멈출 수 없어 그것의 총량을 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살아 있어요?



사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66

<소유>

끝에서부터 쓰러지고 있는 나의 중간을 재빠르게 쳐내는 일 그거 필요해요.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오래 세워두었네요.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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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채우는 감각들 - 세계시인선 필사책
에밀리 디킨슨 외 지음, 강은교 외 옮김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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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에 민음사 세계시인선 필사책 「밤을 채우는 감각들」 책 수령 인증샷과 간략한 소개를 남겼었죠. 탄탄한 양장과 깔끔하고 감각적인 디자인, 두터운 내지로 필사하기 좋은 책이라 강력 추천을 남겼는데요! 이제 2주 정도의 시간 동안 직접 필사를 해보며 느꼈던 「밤을 채우는 감각들」 이야기를 전해볼게요.

민음사 세계시인선 필사책 「밤을 채우는 감각들」 은 에밀리 디킨슨, 페르난두 페소아, 마르셀 프루스트, 조지 고든 바이런 이렇게 네 명의 시인의 시가 순서대로 각 챕터대로 담겨 있어요. 무작정 그들의 좋은 시를 골라 가져온 게 아니라, 민음사에서 출간된 세계시인선에서 시를 발췌하고 제목도 그대로 가져왔어요. 네 명의 시인의 좋은 시가 막 섞여 있는 게 아니라 작가별로 나누어져 있으니

한 작가에 집중해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순서대로.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필사하고 싶다면 자유롭게.

취향에 따라 각자의 방법대로, 좋은 시를 읽으며 필사를 하면 될 것 같아요. 저는 처음부터 이 네 분의 시가 어떻게 다른지 느껴보고 싶었기에 날마다 자유롭게 책장을 넘겨 보면서 골라 필사를 진행했어요. 하지만 편의에 따라 순서대로 정리해서 보여드릴게요.

Chapter 1.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에밀리 디킨슨

책을 사랑하게 되면서 에밀리 디킨슨의 이름은 참 많이 들어서 저의 책장에도 책이 있긴 하는데요. 에밀리 디킨슨은 19세기에 활동한 여성 시인으로 미국 문학계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하죠. 가정적인 배경과 건강, 여러 번의 정서적 위기로 오랫동안 은둔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것은 굉장히 상처를 주는데도 - / 상처 자국 하나 없어라. / 그러나 교감이 이는 내면에선 / 천둥같은 변화가-.”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에밀리 디킨슨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골몰했을 에밀리 디킨슨. 이제 우리는 빛나는 언어로 압축된 그의 세계를 볼 수밖에 없어요. 에밀리 디킨슨의 생애와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이라는 제목은 참 닮아 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필사를 하면서 천천히 글자를 따라가다 보니, 작가의 내면에 깊이 빠져들어가게 되고 수록된 책들을 전체적으로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Chapter 2.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페르난두 페소아

페르난두 페소아의 이름도 잘 알려져 있죠. <불안의 책> 으로도 유명한 페소아의 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시 뿐만 아니라 철학과 비평으로도 능통했던 페르난두 페소아.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양 떼를 지키는 사람>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는 제목도 담백하지만 강렬한 의미를 주는 것 같아요. 이 말에 정말 공감하는 게, 시를 읽을 때와 쓸 때는 여느 때보다 나만의 세계를 꾸리고 얇은 살을 하나씩 붙여 나가는 느낌이거든요. 페소아의 시구절을 읽다 보면 그에게 '시'를 쓰는 것은 어떤 욕망과 야망에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습관적이고 필수적인 행위인 것처럼 여겨져요.

Chapter 3.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 마르셀 프루스트

제목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요 ㅠㅠ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의 마들렌을 통해 향수를 떠올리는 도입부처럼 이 시집 속에는 오감을 활용한 그림과도 같은 시들이 담겨 있다고 해요. 어둡고 무거워 신비감이나 명확성이 떨어질지라도 꿈은 좋은 것. 삶 자체가 어차피 꿈꾸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마르셀 프루스트

「밤을 채우는 감각들」 필사를 하는 날이면, 저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조금 속도감 있게 펼쳐 보며 바로 눈에 들어오는 시를 골랐는데요. 우연처럼 저 대목이 마음에 들어서 필사를 하게 된 것 같네요. 어쩌다 보니 오감과는 관계 없는 조금 비장한 시를 골랐지만요.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라는 유명한 작품으로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그의 첫 작품집에 수록된 산문시들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정말 제목이 다시 보고 다시 봐도 너무 아름다운걸요!

Chapter 4.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 - 조지 고든 바이런

저는 바이런, 하면 늘 가수 이소라의 노래 가사가 생각나는데요 ㅎㅎ 바이런은 굉장히 혁신적인 시인이었다고 해요. 기존의 전형적인 시 형식을 탈피하면서도 낭만적인 색채를 잃지 않았다고 하죠.

밤은 사랑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 / 그 밤 너무 빨리 샌다 해도 /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 달빛을 받으며" -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 조지 고든 바이런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는 수록된 민음사 세계시인선 중에선 가장 최근작이었네요.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라는 대목에서 약간 청춘의 마음이 연상되기도 하고, 어쩌면 전혀 무관하게 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중해서 읽게 되기도 하네요. 언어를 과하게 현란하게 만지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무게감으로 아름다운 선율처럼 느껴지게 하는 바이런의 시 세계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저는 상대적으로 외국 시나 세계시인선을 읽는 데는 소홀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번 민음사 세계시인선 필사책 「밤을 채우는 감각들」 필사를 하면서 외국 시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책장에 있는 민음사 세계시인선을 이제는 열심히 꺼내 봐야 할 것 같아요. 리뷰로 마무리하지만 남은 페이지들 필사도 틈틈이 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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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8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김운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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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한 번도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책. 「군주론」은 수백 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악마의 책인가, 리더들의 정치적 교과서인가' 하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분열되어 외세에 침략에도 번번이 속수무책이었던 1500년대 이탈리아의 상황 속에서 '마키아벨리즘'으로 대표되는 이 책이 탄생했고, 혼란스러운 상황은 지금의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장기간으로 지속되는 코로나 시대, 각 정당의 대립, 세계 속 외교적 방향 속에서 우리는 어떤 리더를 뽑아야 할까 하는 의문이 계속되고 있는 중,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읽기 전 생각했던 것보다 「군주론」은 짧고 세분화된 항목으로 글이 구성되어 있었다. 세습, 혼합, 시민, 교회 군주국 등 다양한 국가의 모습을 살폈고, 새 군주국을 어떤 방식으로 획득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리더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군주가 갖추고 있는 한 국가의 군대,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관리들에 대하여도 다방면의 시각으로 설명된 글이 돋보인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이탈리아의 역사 속 인물들을 사례로 들어 자신의 이론을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의 기본적인 토대와 같이 책 속에 표현된 리더의 조건은 '막강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으로 대표된다. 민중과 관리에 대한 시각도 약간은 부정적인 면이 있으며, 여성을 폄하하는 대목도 읽기 편하지는 않았다(시대가 시대인지라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했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특히나 이 책의 집필이 국가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는 '정의'에 따라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 본인이 공직에 복귀하기 위해 헌정한 글이라는 점은 약간의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과거를 넘어 현재에 있어서도 받아들일만한 주장들이 여럿 존재한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군주의 자리는 분명 아슬아슬하기에 굳건한 중심이 필요하다. 이 책의 나온 내용들을 누군가가 악용하진 않길 바란다. 좋은 것은 취하고, 옳지 않은 것은 배제하여 적용하는 지혜를 발휘할 리더가 나타나기를.

군주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군주는 시민이 나라를 필요로 하는 평온한 시기에 보여준 모습만 믿고 그들을 의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현명한 군주는 시민이 어떤 시기에도 자신과 나라를 필요로 하면서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만들 방법을 고안해야 합니다. - P78

모든 일을 고려할 때 어떤 것은 미덕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따르면 자신이 파멸할 수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악덕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따르면 안전과 번영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P112

그렇지만 믿고 행동할 때 신중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신중함과 인간애로 절제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지나치게 믿어 경솔해지지 말고, 과도하게 불신해서 아무도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 P119

군주가 만약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증오를 피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증오를 받지 않으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P120

자신을 다시 일으켜줄 사람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넘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혹시 그렇게 되더라도 당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 방어책은 비열할뿐더러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훌륭하고 확실하며 지속적인 유일한 방어책은 발로 자신과 자신의 역량에 의존하는 것뿐입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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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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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우리가 쓰지 않은 것들'. 작가가 표지 뒤쪽에 남긴 사인에 덧붙인 문장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82년생 김지영》 이후에도 작가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소설을 계속 써왔다. 우리가 쓴 것, 우리가 (아직) 쓰지 않은 것들 속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페미니즘 소설로 대표되는 '김지영'이라는 이름이 작가의 이름만큼의 무게감을 가지는 상황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꾸준히 해온 것에 대해서 일단  응원을 해주고 싶다.


《우리가 쓴 것》은 다양한 지면에 수록된 단편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며 몇 편의 작품은 이미 만나본 적이 있어 눈에 익었다. 총 8편의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은 의외로 몽글몽글하고 따뜻하다는 것이었고, 그다음에는 '이 작가라서'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현남 오빠에게」와 같은 공격적인 소설도 있었다. 가스 라이팅을 소재로 한 편지식 소설이고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어조로 항변하다 마지막 문장에서 폭발하듯 소리친다. 「미스 김은 알고 있다」는 부조리한 사내 환경 속에서 언제까지나 '미스 김'으로 남아있어야 했던 상황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강한 소설이 중간에 위치하고 있지만 작품들의 구성에 따라 따라가는 독서는 꽤 격하지 않고 부드러운 편이다. 마지막에 수록된 「첫사랑 2020」는 소설집의 분위기를 잔잔하게 마무리하듯 어루만진다.


소설 속 에피소드가 모두 작가의 경험담은 아니라고 밝혔지만,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 속에 갇히거나 숱한 오해로 "소설이 납작한 퍼즐 조각으로 잘려 끼워 넣어진 일은 셀 수도 없다(75쪽, 오기)"라는 문장 속에서 작가의 현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성문제와 시대의 변화, 세대 간의 첨예한 대립을 그린 소설 속에서 "그러니까 엄마, 업데이트 좀 해(293쪽, 여자아이는 자라서)"라는 아이의 말은 우리가 직면한 과제를 떠올리게 했다. 노년의 삶과 회한('매화나무 아래)'을 다룬 장면을, 가출한 아버지의 결제 흔적을 가만히 지켜보는 ('가출') 식구들의 마음을 보며 작은 위로까지 받았다.


「오로라의 밤」이라는 단편이 좋았다. 가족 내에서의 역할 갈등이 소멸된 상황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적당한 온도로 서로를 의지하며 지낸다. 함께 오로라를 보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둘은 각자의 소원을 큰 목소리로 빈다. 손주 보기 싫어서 울부짖는 며느리, 세상에 오래오래 숨 붙이고 싶다는 시어머니, 둘의 인생은 달라졌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수평적 관계 속에서 서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족 관계를 희망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맨 마지막 페이지, 작가의 수록 작품과 집필 연도를 살펴보며 비슷한 느낌의 소설들끼리 묶어 떠올려 보았다. 장편 소설의 엄청난 성공과 왕관의 무게, 함께 따라오던 비판과 수많은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꾸준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9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의 소설은 조금씩 변해왔고 그만큼 성장한 듯 보였다. 다음 소설이 기대된다. 




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었고 책임감을 가지고 써야 하는 글도 있다고 생각했다. 두렵고 외롭고 허탈할 때가 많았지만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기록으로 남기려고 애썼다. 하지만 적의는 호의보다 훨씬 힘이 셌다. 내가 하지 않은 말들이 따옴표 안에 들어가 인터뷰 기사에 실렸고, 내 소설에 있지도 않은 문장과 에피소드가 인터넷 리뷰에 올라왔다. 결국 내가 졌다. 이용당한다는 생각, 절대 가지지 않으려던 그 마음이 드는 순간, 내가 망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가지 않아도 되는 파티에 초대받았다. 초대 명단엔 내 이름이 틀리게 적혀 있었다. - P57

창문과 새로 단 도어록과 보조 걸쇠까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따뜻한 차라도 마시면 마음이 가라앉을까 싶어 주전자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에 올리는 순간 옆방에서 뭘 떨어뜨렸는지 쾅 하고 바닥이 울렸다. 그 소리에 심장이 크고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 그저 스토커나 강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것. 특정한 사고나 사건이 아니라 나를 에워싼 상황 같은 것. 이를테면 젊은 여자가 스스로를 오롯이 책임지며 혼자 사는 일. - P139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준비하는 것, 완전히 절망해 버리지 않는 것, 실낱같은 운이 따라왔을 때 인정하고 감사하고 모두 내 노력인 듯 포장하지 않는 것. 눈물이 멈췄다. - P250


피해 학생을 쫓아다니며 합의를 종용하는 성폭행 가해 학생의 부모, 내 아이 학교 옆에 특수 학교를 짓지 말라는 학부모들, 논문의 공저자로 미성년 자녀의 이름을 올리는 대학교수, 자녀의 취업을 청탁하는 고위 공직자…… 이런 뉴스를 볼 때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나빠지지 말아야지, 내 아이에게만 매몰되지 말아야지, 나빠지지 않고도 아이를 무사히 키울 수 있다고 계속 나를 다잡는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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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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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생각하는 존재를 본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떠올리고, 인간을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존재를. 그는 감정을 느끼고 대화하며 소통한다. 반쯤, 아니 그 이상 인간과 닮았다. 인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딱 현재 갖고 있는 모습으로 태어나 매장에 진열된다는 것이고, 태양광 합성을 통해 양분을 얻는다는 점이다. AF(Artificial Friend), 지금보다 더 발전된 세상의 인공지능 로봇은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쇼윈도에 진열된 로봇 친구를 구매하기 위해 매장을 방문한다.

주인공 ‘클라라’는 AF중에서도 인간에 대한 관심이 특화된 개체다. 유리창 바깥을 구경하며 인간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파악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한 병약한 아이 ‘조시’를 만났다. 둘은 유리 너머 짧은 대화를 통해 마음을 나눈다. 클라라는 수많은 AF 중에서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며 꼭 데리러 오겠다는 조시와의 약속을 위해, 다른 손님을 거부하는 표현을 할 정도로 지능적인 모습을 보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조시는 어머니와 함께 매장을 방문해 클라라를 찾는다. 어머니는 클라라의 관찰력과 표현력을 시험해본 뒤, 함께 살자는 결정을 내린다.

‘인간처럼’ 사고하려고 노력하는 로봇과의 동행이 어떤 위기와 결과를 불러올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면으로 상상을 하게 되는데, 이는 로봇을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 책에서 나온 클리셰를 따르진 않아 더욱 흥미롭다.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전작인 <나를 보내지 마>에서 이미 로봇의 시점으로 다룬 소설을 펴낸 바 있고, 그 내용은 잔잔하면서도 폭발적인 슬픔으로 다가왔었다. <클라라와 태양>은 전작에 비해 조금은 가볍고 따스하며 희망적인 내용을 그리고 있다. 작가가 소설을 구상할 때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지도.

소설 속 눈에 두드러지는 점이 있다면, 인물들의 성격이 뚜렷하게 규정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선인과 악인 또한 완벽히 구분되지 않는다. 병약한 아이와 함께 사는 어머니는 놀라운 비밀을 안고 있고, 해맑아 보이는 조시는 친구들 앞에서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모범적인 아이들로 보이는 조시의 친구들은 자신과 동반자인 로봇을 비하하기도 한다. 인간을 파악하기 좋아하는 클라라에게, 조시의 삶은 놀랍고도 새로운 데이터를 축적하는 환경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을 따라가는 독자인 우리들은 인간이 갖추고 있는 것, 갖추지 못한 것, 갖춰야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공상보다 빠른 과학 발전의 시대다. AI는 벌써 우리에게 익숙한 기술이 되었고, 어떠면 빠른 시일 내에 인공지능은 더욱더 발전해서 상상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 로봇의 등장,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까. 그들이 인간과 완전히 닮게 되는 순간, 우리는 어떤 면모로 인간됨을 확인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이 뒤따른다.

"네, 조시는, 좀 더…… 이렇게 앉을 거예요."

어머니가 테이블 위로 몸을 숙이며 눈을 가늘게 떴고 어머니 얼굴이 폭포를 담은 가장자리 상자만 빼고 상자 여덟 칸을 채웠다. 한순간 상자마다 어머니 얼굴 표정이 다르게 느껴졌다. 어떤 상자에서는 눈이 잔인하게 웃는데 바로 옆 상자에서는 눈에 슬픔이 어려 있었다. 폭포 물소리, 아이들과 개의 소리가 줄어들었고 나는 고요한 가운데에서 어머니가 하려는 말을 기다렸다. - P159

"그냥 희망이야? 아니면 네가 기대하는 뭔가 구체적인 게 있는 거야? 우리가 아직 모르는 거?"

"제 생각에는…… 그냥 희망인 것 같아요. 하지만 진짜 희망이에요. 저는 조시가 곧 좋아질 거라고 믿어요."

그 뒤로 한동안 어머니는 말없이 창밖을 멍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나는 어머니가 우리 앞에 있는 도로를 과연 볼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너는 똑똑한 에이에프야. 어쩌면 우리가 못 보는 걸 보는 지도 모르지. 네가 희망을 갖는 게 맞는 일일 수도 있지. 네가 옳을지도
- P165

헛간 안쪽이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지만 다정한 어둠이었다. 이내 부분 부분 쪼개진 것들이 사라지더니 이제는 실내 공간이 나뉘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해가 떠나갔음을 알았고, 그래서 점는 의자에서 일어나 처음으로 맥베인 씨 헛간 뒤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서 나무가 울타리처럼 죽 늘어서 있는 곳까지 펼쳐진 풀밭과 해가 그 뒤로 피곤한 듯 이제 흐릿한 빛을 내며 땅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았다. 하늘이 밤으로 물들며 별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해가 쉬러 내려가면서 나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짓는 걸 느꼈다. - P247

"(…) 우리는 감상적인 사람들이죠. 어쩔 수가 없어요.우리 세대는 여전히 과거의 감정을 지니고 살죠. 마음 한편에서 그걸 붙들고 버리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 내면에 가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계속 믿고 싶어 해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누구나 아는 사실이죠. 당신도 알고요. 우리 세대 사람들은 무언가 있다는 생각을 놓기 힘들어요. 하지만 그 생각을 버려야 해요, 크리시." - P308

"(…) 너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 믿니? 신체 기관을 말하는 건 아냐. 시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야. 인간의 마음.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해? 사람을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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