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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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우리가 쓰지 않은 것들'. 작가가 표지 뒤쪽에 남긴 사인에 덧붙인 문장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82년생 김지영》 이후에도 작가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소설을 계속 써왔다. 우리가 쓴 것, 우리가 (아직) 쓰지 않은 것들 속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페미니즘 소설로 대표되는 '김지영'이라는 이름이 작가의 이름만큼의 무게감을 가지는 상황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꾸준히 해온 것에 대해서 일단  응원을 해주고 싶다.


《우리가 쓴 것》은 다양한 지면에 수록된 단편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며 몇 편의 작품은 이미 만나본 적이 있어 눈에 익었다. 총 8편의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은 의외로 몽글몽글하고 따뜻하다는 것이었고, 그다음에는 '이 작가라서'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현남 오빠에게」와 같은 공격적인 소설도 있었다. 가스 라이팅을 소재로 한 편지식 소설이고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어조로 항변하다 마지막 문장에서 폭발하듯 소리친다. 「미스 김은 알고 있다」는 부조리한 사내 환경 속에서 언제까지나 '미스 김'으로 남아있어야 했던 상황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강한 소설이 중간에 위치하고 있지만 작품들의 구성에 따라 따라가는 독서는 꽤 격하지 않고 부드러운 편이다. 마지막에 수록된 「첫사랑 2020」는 소설집의 분위기를 잔잔하게 마무리하듯 어루만진다.


소설 속 에피소드가 모두 작가의 경험담은 아니라고 밝혔지만,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 속에 갇히거나 숱한 오해로 "소설이 납작한 퍼즐 조각으로 잘려 끼워 넣어진 일은 셀 수도 없다(75쪽, 오기)"라는 문장 속에서 작가의 현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성문제와 시대의 변화, 세대 간의 첨예한 대립을 그린 소설 속에서 "그러니까 엄마, 업데이트 좀 해(293쪽, 여자아이는 자라서)"라는 아이의 말은 우리가 직면한 과제를 떠올리게 했다. 노년의 삶과 회한('매화나무 아래)'을 다룬 장면을, 가출한 아버지의 결제 흔적을 가만히 지켜보는 ('가출') 식구들의 마음을 보며 작은 위로까지 받았다.


「오로라의 밤」이라는 단편이 좋았다. 가족 내에서의 역할 갈등이 소멸된 상황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적당한 온도로 서로를 의지하며 지낸다. 함께 오로라를 보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둘은 각자의 소원을 큰 목소리로 빈다. 손주 보기 싫어서 울부짖는 며느리, 세상에 오래오래 숨 붙이고 싶다는 시어머니, 둘의 인생은 달라졌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수평적 관계 속에서 서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족 관계를 희망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맨 마지막 페이지, 작가의 수록 작품과 집필 연도를 살펴보며 비슷한 느낌의 소설들끼리 묶어 떠올려 보았다. 장편 소설의 엄청난 성공과 왕관의 무게, 함께 따라오던 비판과 수많은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꾸준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9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의 소설은 조금씩 변해왔고 그만큼 성장한 듯 보였다. 다음 소설이 기대된다. 




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었고 책임감을 가지고 써야 하는 글도 있다고 생각했다. 두렵고 외롭고 허탈할 때가 많았지만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기록으로 남기려고 애썼다. 하지만 적의는 호의보다 훨씬 힘이 셌다. 내가 하지 않은 말들이 따옴표 안에 들어가 인터뷰 기사에 실렸고, 내 소설에 있지도 않은 문장과 에피소드가 인터넷 리뷰에 올라왔다. 결국 내가 졌다. 이용당한다는 생각, 절대 가지지 않으려던 그 마음이 드는 순간, 내가 망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가지 않아도 되는 파티에 초대받았다. 초대 명단엔 내 이름이 틀리게 적혀 있었다. - P57

창문과 새로 단 도어록과 보조 걸쇠까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따뜻한 차라도 마시면 마음이 가라앉을까 싶어 주전자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에 올리는 순간 옆방에서 뭘 떨어뜨렸는지 쾅 하고 바닥이 울렸다. 그 소리에 심장이 크고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 그저 스토커나 강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것. 특정한 사고나 사건이 아니라 나를 에워싼 상황 같은 것. 이를테면 젊은 여자가 스스로를 오롯이 책임지며 혼자 사는 일. - P139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준비하는 것, 완전히 절망해 버리지 않는 것, 실낱같은 운이 따라왔을 때 인정하고 감사하고 모두 내 노력인 듯 포장하지 않는 것. 눈물이 멈췄다. - P250


피해 학생을 쫓아다니며 합의를 종용하는 성폭행 가해 학생의 부모, 내 아이 학교 옆에 특수 학교를 짓지 말라는 학부모들, 논문의 공저자로 미성년 자녀의 이름을 올리는 대학교수, 자녀의 취업을 청탁하는 고위 공직자…… 이런 뉴스를 볼 때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나빠지지 말아야지, 내 아이에게만 매몰되지 말아야지, 나빠지지 않고도 아이를 무사히 키울 수 있다고 계속 나를 다잡는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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