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한국사 : 현대편 쟁점 한국사
박태균 외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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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가 역사를 등한시했던 지난날처럼, 내게도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라는 사전적인 의미에서만 머무르곤 했다. 학생 때는 연표를 작성해 외우는 역사가 너무도 재미가 없었고, 성인이 돼서도 가끔 흥미를 느끼는 주제가 생길 때만 종종 들춰보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사건들이 일어나자, 그 의미는 보다 폭넓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선조들의 빛나는 영광과 쓰디쓴 실패, 모두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교훈을 주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E. H Carr)'라고 했다. 백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말이다.

 

 "역사는 하나의 교과서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0명의 역사가가 있다면 10개의 관점이 있을 수 있다." (7쪽, 기획의 말 - 한명기)


 역사라는 분야야말로 다양한 시각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쓰인 것들을 두루 읽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에 너무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면에서 『쟁점 한국사』라는 책은 남다른 장점이 있는데, 한국사의 핵심 쟁점이라 할 주제들에 대한 다양한 역사학자들의 글을 모았다는 점이다. 지은이의 이름에는 역사학자 각각의 이름이 있지만, 국정 교과서 논쟁으로 떠들썩할 당시 창비 학당에서 열린 강의를 통해 시민들과 토론했던 내용을 토대로 묶었기에 좋게 말해 시민들이 참여한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가까운 역사인 '현대편'에는 관심 있는 시대였던 만큼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주제별로 깊이 공부해본 적이 없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부끄럽게 마주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에서의 민간인 희생자들 수가 엄청난 규모였다'는 점, '베트남 전쟁 이후, 수많은 외화에도 불구하고 부실기업이 늘어났다'는 점, '민주화 운동 속에서 도시 하층민들이 선두에 서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리고, 어린아이들도 참여해서 부모 형제들을 위해 운동을 했다는 점' 등,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마치 꼬인 실처럼 지금까지도 엮여있는, 결코 떼놓고 볼 수 없는 역사들도 있었다. 미국의 신탁통치,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유신, 민주화 운동 같은 주제들 속에는 현재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소중한 교훈들이 가득했다. 국제적 관계 속에서 강자들은 약자를 늘 오랫동안 억압해왔고 약자는 항상 소극적인 면모로 일관했다. 약자는 때로 강자가 되기도 했고, 그런 과거는 기억 속에서 지워갔다. 국내적으로 강자들 또한 마찬가지 행동을 취했지만, 약자들은 피를 흘리고 싸워가며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소리 내 외쳤다.

 

 우리는 역사적 순간을 걷고 있고, 아직은 출발점에 서 있다. 과거의 역사적 순간은 개개인의 관점을 정해주는 소중한 경험이 되고, 그런 소중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지금도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다.

 

"만약 그날 도청에 남았던 분들이 드라마 「시그널」처럼 지금 우리에게 무전을 걸어와 일제 35년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이고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뭐라 답해야 할까? 여전히 지금과 같은 현실이 계속되어 대통령은 유신잔당 정도가 아니라 유신공주가 하고 있고, 젊은이들은 헬조선 흙수저에 신음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꿈은 정규직인 나라라면, 그때 그분들이 도청에 남는 게 맞았을까? 유신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광주도 끝나지 않았다.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씌어져야 한다. 1980년 광주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응답하라, 2017!" (178쪽, 유신, 두 번째 내란 - 한홍구)

 

 

53쪽, 해방과 분단의 현대사 다시 읽기 - 정병준
전후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역사 분쟁, 영토 분쟁을 벌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천황이나 일본국가 · 국민 전체가 아닌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 일본 군부와 정치 지도자 일부만이 그 책임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일본은 국가 전체가 전쟁 책임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성하고 확인할 수 있는 국제적 프로세스를 거치지 못했다. 일본으로서는 전쟁의 참화를 국제적 규범 속에서 직시하지 못하고, 단지 일본의 패전으로만 기억하는 역사적 비극이 발생하게 되었다.

114쪽, 박정희와 미국, 이승만과 미국 - 홍석률
강자들은 약자를 항상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사람들로 묘사해왔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사람들이 식민지 사람들을, 백인이 흑인을, 남성이 여성을 항상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했다. 약자들은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할 능력이 없기에, 강자에 의해 항상 주의 깊게 관리되어야 할 존재로 묘사된다. 그럼으로써 강자가 약자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이들을 관리하는 것이 합리화되는 것이다.

162쪽, 유신, 두 번째 내란 - 한홍구
이 사건을 33년이 지난 후에 무죄라고 하니 어쩌면 좋을까. 솔직히 그때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 국민은 극히 소수였다. 다들 빨갱이를 미리 적발해서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대공 요원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우리가 하재완과 같은 골목에 살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 모두 그의 아들을 묶었던 새끼줄 한 자락을 잡고 다닌 셈이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 모두 화해 이야기를 한다. 화해, 참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말하기 전에 구경꾼들은 억울한 피해자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250쪽, 민주화의 숨은 주역을 찾아서 - 오제연
한국 민주화의 역사 속에는 학생들의 헌신적인 노력 외에도 많은 시민들의 피와 땀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기록을 남기고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대개 엘리트들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학생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있다. 이 과정에서 은연중에 도시 하층민 등 일반 시민의 역할이 축소 · 은폐되거나 주변화되었다. 이제라도 우리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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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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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겨울, 밝은 새해를 맞아 집어 든 것이 이 책이었다. 너무 무겁게 고민하는 책은 싫어, 그래도 따뜻했음 좋겠어. 이런 생각으로 그동안 읽어볼까 고심했던 책을 읽기로 했다. 댓글 시인에 관해선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인터넷 기사에 올린 시를 읽어보진 못했다. 인터넷 기사와 시詩. 그 만남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한 문장이 그동안 마음에 들어왔던 시들만큼이나 잊히지 않았다.

 

 "그 쇳물 쓰지 말고 /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 정성으로 다듬어 / 정문 앞에 세워주게." (25쪽, 그 쇳물 쓰지 마라)


  용광로에 빠져 흔적 없이 사망한 20대 청년에게 남긴 시는 이랬다. 안타깝게 스러진 청년의 몸이 녹아있는 그 쇳물을 다듬고 조각상을 만들어, 엄마가 만질 수 있게라도 해주라는 시인의 탄식이었다. 단지 그것으로 허무하게 가버린 청춘의 넋을 위로할 순 없지만, 그거라도 해달라는 애통한 마음이 담겼다. 이 시를 읽고 연민 없이 단숨에 책장을 넘겨버릴 사람은 없으리라.


 표제작인 <그 쇳물 쓰지 마라>를 비롯하여, 많은 시들이 시인의 연민 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탄생되었다. 그리고 시가 수록된 페이지 옆에는 그가 댓글을 남긴 기사가 함께 실려 있다. 어떤 시는 기사 없이 내용을 판단할 수 있으며 오히려 기사가 없이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만, 시의 자유로운 감상 가능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시집에서 기사가 주는 의미는 무척이나 크다. 수많은 기사를 읽고, 어떤 누군가가 볼 거라고 확신할 순 없어도 끊임없이 사색하고 시를 남겼던 '댓글시인 제페토'라는 시인의 존재. 그리고 삭막한 인터넷 세상에서 누구나 쉽게 시를 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경험의 선물. 특히나 가장 큰 장점은 수많은 인터넷 기사들에 가려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했던 소식들도 시인이 발견해 독자들에게 전해줬다는 것이다.


 짐작건대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대개 슬프거나 안타까운 소식들을 담고 있을 거라 생각하여 은연중에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안타까운 죽음들, 부조리한 현실 등 어두운 이야기도 있으나, 풍경에 대한 감탄과 힘찬 희망을 담은 이야기도 많다. 특히 아무리 어두운 이야기여도 시인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을 기어코 찾아낸다는 점이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정하게 다독이고, 딛고 일어설 힘을 찾는 시인의 모습이 따뜻하다. 이는 그가 남긴 서문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전해오는 봄꽃 소식과, 가뭄을 끝내는 비 소식과, 축복처럼 내리는 첫눈 소식과, 황금빛 물든 억새밭 풍경과, 불편한 몸으로 힘들여 일군 소금을 이웃에게 베푼 염전의 성자와, 생명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사지로 들어간 소방관들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앞서 느낀 혐오와 절망은 적잖이 민망한 것이 되었고, 다시 살아갈 명분과 희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5쪽, 서문 - 풍선을 위로하는 바늘의 손길처럼 모서리를 둥글게 깎는 목수의 마음처럼)

 


 

37쪽, 이름 모를 친구에게
하필 당신 나와 같은 나이냐
전깃줄에라도 매달렸어야지
없는 날개를 냈어야지
누구는 이십 층서도 살았다던데
구 미터는 살았어야지
어떻게든 살았어야지



75쪽, 여생
잠시 헤어지는 것일 뿐 / 다시 만날 것을 믿자//
붐비는 종로 거리에서 / 결혼 앞둔 카센터 청년의 콩팥으로 / 동갑내기 소녀의 심장으로 / 붙임성 좋은 할머니의 췌장으로



95쪽, 다리 위에서
한번 더 기회를 주는 일. / 강물과 / 택시와 / 둔치에 앉은 연인과 / 도시와 / 붉어지는 하늘과 / 별과 / 우주와 / 이발사를 웃게 하는 정수리의 사마귀와 / 쓸 만한 유머 감각과 /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 대단한 주량과 / 악의 없는 거짓말과 / 이제껏 보고 들은 모든 것들과 / 가슴속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앓는 꿈들이 / 사라지지 않도록 허물뿐인 날들에 / 눈 한 번 감아주는 일.

185쪽, 부두에 생각을 매며
그러니 일상은 일상대로 / 가든 말든 놓아두되 / 우리만은 / 배가 출항했던 그날의 부두를 떠나지 말고 / 도통 이해되지 않는 일들과 / 수상한 사람들에 관하여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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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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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결말은 몇 줄에 걸쳐 걸작 내에서도 걸작이다. 대단원을 이루는 행들에서 나는 싸움을 포기하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다."

 프랑스의 작가 '장 도르메송'이 남긴 이 말은 책을 고르는데 큰 역할을 했으나 100퍼센트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설의 끝을 맞이했을 때 나는 그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지막 한 줄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영화 속에서 충격적인 장면이나 반전이 나올 때마다 들려오던 강렬한 사운드를 상상하며 들춘 그 문장은 압권이었다.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곤 다시 홀린 듯이 첫 페이지로 돌아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이 책의 첫 문장과 끝 문장, 그 속에 엮어진 이야기는 완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동급생』이라는 책의 제목은 내 안에 더욱 깊이 각인되었다.


 소설은 유대인 소년 '한스 슈바르츠'가 "내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절망의 원천이 될 그 소년"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소년이었던 한스는 새롭게 전학을 온 귀족 소년 '콘라딘 폰 호엔펠스'와 운명적으로 서로가 맞는 친구라는 걸 직감하며 우정을 키워나간다. 독일의 아름다운 고장 슈바벤에서 그들은 청춘을 즐기고, 문학과 예술, 철학 등을 몽상한다. 비록 나치 시대였지만, 그들은 꿈을 꿔가는 소년일 뿐이었다. 어른들의 이데올로기는 중요한 일이 아니며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위기가 닥치고, 한스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왜 아버지가 콘라딘을 만나자마자 자신에게는 전혀 보인 적 없는 비굴한 태도와 극존칭을 쓰는지. 왜 콘라딘은 집에 가족들이 없을 때만 자신을 부르는지. 이러한 의문은 그리 심각한 고민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소년 대 소년이 아닌, 가족과 가족, 뒤이어 혈통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어지자 소설에는 내내 불안감과 위기가 감돈다.

 

​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더한 아름다움으로 존재했던 동급생 둘의 우정은 이 모든 갈등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 심한 유대인 탄압 속에서 대피해 '살아남은' 한스는 놀라운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한스가 읽고, 내가 읽고, 수많은 독자가 읽고 비통해 마지않은 한 줄이며, 두 소년이 했던 대화들, 뿌리깊게 박힌 이념들, 속수무책으로 흘렀던 세월과 비극을 상상케 하는 엄청난 한 줄이다. 나는 절대로 이 한 줄을, 소년들의 우정을, 비극적인 역사에 수그러졌던 사람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38쪽,
<내가 그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친구>라고 쓰기 전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뒤에도 나는 이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으며 내가 친구를 위해 - 그야말로 기뻐하며 -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믿는다.

62쪽,
정치는 어른인 사람들의 관심사였고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대로 풀어야 할 문제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삶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을지 배우는 것이었고 이것은 삶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 과연 있기나 한지, 또 이 놀랍고 헤아릴 수 없는 우주에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일지 알아내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히틀러니 무솔리니니 하는 덧없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진정하고도 영원한 의의라는 문제가 있었다.

​ 81쪽,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여기가 시작도 끝도 없는 내 나라, 내 집이며,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붉은 머리가 아니라 검은 머리로 태어났다는 사실만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첫째로 우리는 슈바벤 사람이었고 그다음은 독일인이었고 그다음이 유대인이었다. 내가 그 외에 달리 어떻게 느낄 수 있었을까?

111쪽,
마침내 그들을 보았을 때는 달아나고 싶어졌다. 유대인 아이의 본능적인 직감으로 볼 때, 채 몇 분도 못 가서 내 심장에 들어박히게 될 단검은 피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고통은 피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무슨 이유로 친구를 잃는 위험을 무릅써야 할까? 무슨 이유로 의심이 잠으로 달래지게 놓아두는 대신 증거를 요구해야 할까? 하지만 나는 달아날 용기도 없어서 고통에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떨리는 심정으로 기둥을 버팀목 삼아 기대어 서서 처형당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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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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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의 호위, 라는 제목을 발음할수록 따스한 기분이 든다. 게다가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제목을 보면 그 빛은 더욱 밝게 빛난다. 잿빛 세상에서 정처 없이 거닐 때, 혹은 도저히 길을 찾지 못할 때 우연히 빛 - 사람, 목소리, 연결되었다는 마음, 때로는 사물 등 - 의 호위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다행이라고만 할까, 때로는 사람을 살릴만한 가장 강한 힘의 빛을 선사하기도 한다.

 작가의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느꼈던 감정은 여전하면서도, 더 깊어진 것도 같다. 작가의 말에서 "이제야 나는, 진짜 타인에 대해 쓸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밝히는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타인을 본다. 유대인 등록령으로 지하창고에 은신한 유대인, 불법체류자, 역사적 폭력의 피해자, 직업을 잃은 사람들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며, 비슷한 사람들이 가느다란 끈으로 만나 서로를 은연중에 다독이고 '호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들은 "두 사람을 태운 전혀 다른 두 척의 배가 똑같은 섬에서, 똑같은 풍랑을 견디며 잠시 표류한 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빛의 호위')" 서로를 위로한다. 언어를 초월한 교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주고 ('번역의 시작'), 사는 게 원래 이렇게 무서운 거냐며 편지로 한탄하기도 하고 ('산책자의 행복'), 만남을 기대하며 서로의 신념을 상상하기도 한다 ('시간의 거절').

  온전히 조해진만의 통일된 감정으로 읽고 싶어서 기다렸던 <산책자의 행복>도 너무 좋았고, 우연히 먼저 읽어본 <사물과의 작별>도 다시 읽으니 더 좋았다. 다른 작품들도 빼놓을 것들이 없었다. 상처를 받아 나약하고 무기력해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들지만, 조해진 작가가 써낸 아름다운 언어들이 그 슬픔과 아픔을 중화시키고 있었다. 빛, 철컹하는 기차 소리, 봄밤의 포근한 기억, 라오슈, 언니, 이름, 노래……와 같은 언어들이 두드러져, 소설의 끝에 가려진 주인공들의 따뜻한 내일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조해진이라는 작가는 내게 이렇게 다가온다. 작은 (이란 단어를 섣불리 판단하여 불끈!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사람들에 집중하여 그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천천히 보듬어 나간다. 그의 시선과 손길이 참 좋아서, 한동안은 그의 이름이 적힌 소설들에 빠져있을 것 같다.

 

 

57쪽, 번역의 시작
그의 머릿속에서 나는 한글을 깨치지 못한 다섯살 아이로 남아 있었다. 그림이라면 어린 딸아이도 해독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다리의 길이가 제각각인 의자는 불안감, 식품 판매대에 생뚱맞게 놓여 있는 곰 인형은 외로움, 갖가지 모양의 사탕들로 가득한 유리병은 그리움…… 때로는 불확실한 언어보다 형체가 뚜렷한 사물이 그 순간의 감정을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거라고, 나는 이 공책을 보며 배웠다.

69쪽, 사물과의 작별
긴 이야기의 끝에서 고모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나 늙고 병들었는데도,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있는 곳은 여전히 그 봄밤의 태영음반사야.

114쪽, 동쪽 伯의 숲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내 마음속엔 삶의 끝자락에 깃발을 꽂고 어제보다 더 큰 부끄러움을 좇아 욕망 없는 정복자처럼 한걸음 한걸음 혼신의 힘으로 걸어왔을 한 인간의 긴 발자취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걷는 곳은 언제나 빈 들판이었고, 투명한 계단을 지나 하늘 끝까지 이어진 그 발자취는 자격을 되묻는 것으로 충만했던 내 작은 웅덩이에서 올려다본 한 인간의 별자리처럼 빛났다. 상상보다 더 환하게, 더 고독하게……

128쪽, 산책자의 행복
라오슈, 오늘 저는 부재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건, 영원이라는 시작도 끝도 없는 선 위에서 점멸하는 작은 점,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이선을 생각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라오슈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어떤 언어가 라오슈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걸까요. 행복한가요, 라오슈? 제가 라오슈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사실 그뿐인데, 오늘도 저의 타전은 무력합니다.

213쪽, 문주
- 있잖아요, 왜, 사진의 접힌 부분 같은 거, 펴본 뒤에야 중요한 단서였다는 걸 알게 되는…… 내일 그분을 만나는 게 그런 과정일 수도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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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들 창비청소년문학 76
김남중 지음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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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는 이런 가상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소설을 줄곧 읽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배경이나 전개 방향이나 갈등 양상 같은 것들이 더는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때였다. 재미있게 끝까지 읽지만 남는 게 없는 듯한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 뒤따라왔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한 기대감과 불안감은 50대 50이었다. 기대감은 의외로 청소년 소설이 사랑(성욕을 포함한) 이라는 소재로 엮였다는 점에서 왔다.

 『해방자들』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설정이 있다. 이는 소설의 배경이 여섯 국가로 되어 있고, 이 국가의 특장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국가들은 가장 여유로운 삶을 사는 '렌막'이라는 국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농업, 수산업, 공업 등의 기술들을 가진 각국의 시민은 자격시험을 통해 렌막의 영주권을 얻는다. 주인공인 '지니'에게도 렌막은 꿈의 도시다. 가난과 위험에 찌든 도시를 벗어나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밀입국을 시도하고, 그저 풍요롭게만 보였던 렌막이라는 국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바로, 사랑을 통제당한다는 것. 렌막의 시민들은 복합 예방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아 성욕을 억제당하고, 낳을 수 있는 아이의 수도 부富에 따라 제한된다. 그러한 렌막에 사는 '소우'라는 또 다른 주인공은 주삿바늘이 무서워 예방주사를 맞지 않았다가 곤혹스러운 경험을 한다. 그는 첫사랑에 실패하고, 우연히 '지니'를 만난다.


  한 평론가가 작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설마 거기까지는'이라고 안심하고 있을 때, 기습적으로 경계를 넘는 작가"라고. 흥미로운 설정은 당연히 특이한 상황을 낳는다. 밀입국한 여성들을 모아 만든 유흥업소는, 돈이 어느 정도 있지만 아기를 자유롭게 낳을만한 정도는 아닌 남성들에게 '아기 돌보기 체험'을 제공한다. 하룻밤 아빠가 된 남성들은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며 환희와도 같은 감정을 느낀다. 나는 이 장면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일반적인 경계를 넘은 상상은 파격이었다.


 아니, 이 소설 자체가 파격일지 몰랐다. '지니'와 '소우' 의 사랑이 주가 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이는 산뜻하고 가볍게 표현된다. 대신에 '사랑'이라는 감정 대신, 그것을 뺏긴 사람들의 행동이 강렬하고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이를 탄압하는 국가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장면이나 상황을 연상케한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190쪽)"라고 되묻는 모습은 성인인 나에게도 낯설지 않은 질문이었으며, 교훈은 노골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좋았다. 단,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어선지, 분량과 이야기 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 유독 눈에 띄는 다양하고 독특한 설정, 재미난 인물들로 진행된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기는 조금 서운한 마음이다.

 

 

52쪽,
지니가 분유를 타서 다미 아빠에게 건넸다. 다미 아빠가 아기를 안고 분유를 먹였다. 배가 고팠던 아기는 힘차게 젖병 꼭지를 빨았다. 꼴깍꼴깍 분유가 넘어갔다. 투명한 분유병을 통해 꼭지를 빠는 아기의 입이 동그랗게 보였다. 다미 아빠는 황홀한 눈으로 아기를 바라보았다. 지니는 그런 다미 아빠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받은 돈을 차마 주머니에 넣을 수가 없었다.


123쪽,
"사실 고맙기도 했어. 이성 생각이 나면 더 힘들었을 테니까. 성욕이라는 건 엄청난 족쇄거든. 수염처럼 깎아도 깎아도 날마다 자라나지. 아침에 면도를 해도 잠시뿐이고 면도를 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개운하지 않지. 그렇지만 말이야, 우리가 놓친 게 있어. 성욕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사랑마저 포기하면 안 되는 거였어. 성욕이 다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에는 성욕도 포함돼 있거든. 우리는 불필요한 성욕을 제거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꼭 필요한 사랑까지 국가에 내줘 버린거야."

190쪽,
소우의 얼굴을 본 순간 지니는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소우와 오래오래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렇지만 소우의 뒤에는 진다이가 버티고 있었고 자신은 여전히 밀입국자 신분이었다. 소우를 따라간다는 것은 결국 진다이의 손으로 들어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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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02-24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ㅡ 잘 읽고 가요 . 가상세계 ㅡ 저도 그리 좋아는 않는데 ㅡ이 책은 몰입또 좋더라고요! ^^

시읽는리니 2017-03-04 02:05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 안녕하세요. ^^ 몰입이 좋아서 술술 읽히는 소설이었습니다!

[그장소] 2017-03-04 08:28   좋아요 0 | URL
네에~ 정말 재미있었어요 . 세계관도 흥미롭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