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겨울, 밝은 새해를 맞아 집어 든 것이 이 책이었다. 너무 무겁게 고민하는 책은 싫어, 그래도 따뜻했음 좋겠어. 이런 생각으로 그동안 읽어볼까 고심했던 책을 읽기로 했다. 댓글 시인에 관해선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인터넷 기사에 올린 시를 읽어보진 못했다. 인터넷 기사와 시詩. 그 만남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한 문장이 그동안 마음에 들어왔던 시들만큼이나 잊히지 않았다.

 

 "그 쇳물 쓰지 말고 /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 정성으로 다듬어 / 정문 앞에 세워주게." (25쪽, 그 쇳물 쓰지 마라)


  용광로에 빠져 흔적 없이 사망한 20대 청년에게 남긴 시는 이랬다. 안타깝게 스러진 청년의 몸이 녹아있는 그 쇳물을 다듬고 조각상을 만들어, 엄마가 만질 수 있게라도 해주라는 시인의 탄식이었다. 단지 그것으로 허무하게 가버린 청춘의 넋을 위로할 순 없지만, 그거라도 해달라는 애통한 마음이 담겼다. 이 시를 읽고 연민 없이 단숨에 책장을 넘겨버릴 사람은 없으리라.


 표제작인 <그 쇳물 쓰지 마라>를 비롯하여, 많은 시들이 시인의 연민 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탄생되었다. 그리고 시가 수록된 페이지 옆에는 그가 댓글을 남긴 기사가 함께 실려 있다. 어떤 시는 기사 없이 내용을 판단할 수 있으며 오히려 기사가 없이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만, 시의 자유로운 감상 가능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시집에서 기사가 주는 의미는 무척이나 크다. 수많은 기사를 읽고, 어떤 누군가가 볼 거라고 확신할 순 없어도 끊임없이 사색하고 시를 남겼던 '댓글시인 제페토'라는 시인의 존재. 그리고 삭막한 인터넷 세상에서 누구나 쉽게 시를 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경험의 선물. 특히나 가장 큰 장점은 수많은 인터넷 기사들에 가려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했던 소식들도 시인이 발견해 독자들에게 전해줬다는 것이다.


 짐작건대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대개 슬프거나 안타까운 소식들을 담고 있을 거라 생각하여 은연중에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안타까운 죽음들, 부조리한 현실 등 어두운 이야기도 있으나, 풍경에 대한 감탄과 힘찬 희망을 담은 이야기도 많다. 특히 아무리 어두운 이야기여도 시인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을 기어코 찾아낸다는 점이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정하게 다독이고, 딛고 일어설 힘을 찾는 시인의 모습이 따뜻하다. 이는 그가 남긴 서문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전해오는 봄꽃 소식과, 가뭄을 끝내는 비 소식과, 축복처럼 내리는 첫눈 소식과, 황금빛 물든 억새밭 풍경과, 불편한 몸으로 힘들여 일군 소금을 이웃에게 베푼 염전의 성자와, 생명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사지로 들어간 소방관들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앞서 느낀 혐오와 절망은 적잖이 민망한 것이 되었고, 다시 살아갈 명분과 희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5쪽, 서문 - 풍선을 위로하는 바늘의 손길처럼 모서리를 둥글게 깎는 목수의 마음처럼)

 


 

37쪽, 이름 모를 친구에게
하필 당신 나와 같은 나이냐
전깃줄에라도 매달렸어야지
없는 날개를 냈어야지
누구는 이십 층서도 살았다던데
구 미터는 살았어야지
어떻게든 살았어야지



75쪽, 여생
잠시 헤어지는 것일 뿐 / 다시 만날 것을 믿자//
붐비는 종로 거리에서 / 결혼 앞둔 카센터 청년의 콩팥으로 / 동갑내기 소녀의 심장으로 / 붙임성 좋은 할머니의 췌장으로



95쪽, 다리 위에서
한번 더 기회를 주는 일. / 강물과 / 택시와 / 둔치에 앉은 연인과 / 도시와 / 붉어지는 하늘과 / 별과 / 우주와 / 이발사를 웃게 하는 정수리의 사마귀와 / 쓸 만한 유머 감각과 /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 대단한 주량과 / 악의 없는 거짓말과 / 이제껏 보고 들은 모든 것들과 / 가슴속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앓는 꿈들이 / 사라지지 않도록 허물뿐인 날들에 / 눈 한 번 감아주는 일.

185쪽, 부두에 생각을 매며
그러니 일상은 일상대로 / 가든 말든 놓아두되 / 우리만은 / 배가 출항했던 그날의 부두를 떠나지 말고 / 도통 이해되지 않는 일들과 / 수상한 사람들에 관하여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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