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누이
싱고 지음 / 창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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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하얀 공백을 무서워할 때가 있었다. 글자가 빽빽하게 들어찬 책들은 쉽게 읽어내리면서도 빈 공간에 생각을 꽉꽉 채워야 할 것 같은 시집은 손이 잘 가지 않았다. 해석의 부담감은 내가 '시'에 접근하는 것을 늘 어렵게 했다.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 썼고 왜 이렇게 제멋대로 흘러가는지, 왜 갑자기 이런 단어가 튀어나왔으며 아름답다가도 슬픈지 해석해보려 할수록 시는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어느 날부턴 일부러 편안하게 시를 읽어보았다. 소설처럼, 에세이처럼, 그저 흘러가는 얘기처럼 자연스럽게.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내 상황과 기분에 따라 마음에 쏘옥 담겨 깊이 읽어지는 시들이 있었다. 물론 한도 끝도 없이 불친절한 시들도 있고 그것도 그들만의 매력이 있겠지만,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시가 다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


요즘엔 특히 시를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원래도 시 에세이, 시화집, 시론집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출간되어 있었지만, 종이책에 국한하지 않고 시대에 맞춰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나와 비슷하게, 시라는 장르에 부담감을 가졌던 독자들을 위한 소중한 가이드다. 그중 『시詩누이』 는 듣도 보도 못한 시 웹툰이다. 시와 만화의 조합이라, 독특하고 새롭다.


"시라는 장르가 너무 권위적이고 장벽이 높아졌어요.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면 시집 산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시집을 읽는 걸 별종이라고 생각하거나 마니악한 취미라고만 생각하지, 시집이 소비재가 될 수 있다는 차원까지 안 가더라고요. 문학이 소수를 위한 향유물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다양하게 누리는 것도 문학의 권리라고 생각해요. 결과물이 어떤지는 각각 평가가 있겠죠." (작가 인터뷰 중에서)


 <싱고,라고 불렀다>라는 시집을 쓴 시인 신미나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말을 붙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를 편안하게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인은 이런 웹툰을 구상했다고 한다. '싱고'라는 이름의 작가 캐릭터와,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반려묘 '이응옹'이 함께 만화 속에 등장한다. 다분히 일상적인 고민들과 추억들을 담았고 가끔은 진지한 고민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시인은 함께 읽기 좋은 시를 에피소드의 끝에 소개한다. 언뜻 보기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구성과 연결이지만, 털어놓은 생각들이 그저 시인만의 것은 아니어서.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는 독자들의 것들과 퍽 다르지 않아 이 만화는 시인의 바람대로 아주 깊게- 읽힌다.


왠지 모를 막막함을 주듯 툭- 던져진 시집을 읽기 전에 워밍업으로 읽으면 참 좋을 것이다. 시인이 조심스레 털어놓은 생각을 발판 삼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 시에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어느새 시에 대한 두려움이 떨쳐져 마음에 드는 시집을 집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 연결 속에서 좋은 시를 함께 읽기를 바라는 시인의 다정함이 느껴진다는 게 특별하다. 기분 좋은 책이다.



 

- 마음이란 게 하나의 색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다른 색을 보려 하지 않는다 / 한 사람의 마음 속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가야 / 우리는 그 사람이 가진 고유색을 볼 수 있을까

- 다른 이와 주파수를 맞추며 사는 건 쉽지 않다 / 주는 이는 선물이라 생각하지만 / 받는 사람은 부담스러울 때 / 친해지고 싶어서 건넨 농담이 / 지나고 보면 무례했다 싶을 때 / 적정선을 넘으면 ‘뚜뚜뚜‘ 울리면서 내 감정의 컨디션을 알려주는 센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언제부터였을까요 / 타인의 진정성에 추를 달아 얼마나 묵직한지 재보고 남들은 어떤 가면을 썼는지 의심하는 일로 감정을 낭비했던 날이 / 어른이 된다는 건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세련되게 감추는 거라고 믿게 된 것이

- 위로도 성급하면 체하게 된다 / 마음에 수분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게 그 어떤 말보다 따뜻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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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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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표지 사진을 띄워놓고 며칠째 멍 때리며 시간을 보냈고, 이제는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너무 좋아서 오히려 쓰기 머뭇거려진다고 하면 될까. 좋은 정도를 어떤 말로 어떻게 전달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전에 읽었던 황정은 작가의 『백의 그림자』 생각이 났다. 전체적인 인상으론 두 소설이 비슷하게 좋았는데, 순간순간 멈춰읽은 부분들을 생각하자면 내게는 『계속해보겠습니다』가 더 강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그리 강렬하지도 않고 담담한데 무언가 콕콕 찌르는듯한 인물의 대사 한 줄이 아로새겨지는 순간들. 그것을 생각하자면.

 

소라, 나나, 나기. 세 인물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담담한 어조지만 고백이라 할 수 있는 깊은 말들을 꺼내놓는다. 소라와 나나는 자매, 나기는 옆집에 살던 가족 같은 친구(오라버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온 사이로 굳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살아간다.

 

- 그런데도 때때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순자의 전심전력보다는 애자의 전심전력이 완전한 것은 아닐까. 남몰래 이렇게 생각하고는 하는 나나는 아무래도, 애자와 가장 닮은 천성을 지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심전력, 그러므로 나나는 그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154쪽)

 

셋의 고백이 모두가 소중하지만, 서사로 따지자면 중심에 있는 것은 나나의 고백이다. 나나는 임신을 하고, 소라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눈치채고, 나기는 그들에게 생겨나는 자그만 균열들을 지켜보며 과거를 회상한다. 나나의 임신이 그리 큰 균열이 될만한 것이냐 묻는다면 그것이 혼전임신인 것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애자'라고 부르는 나나와 소라의 어머니와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허무에 빠져버리고 아이들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애자. 사랑이 넘치는 이름이었던 애자는 어느 순간부터 '아무래도 좋을 것'들로만 세상을 채우고, 마치 인생이 중단된 것처럼 살았었다.

 

"엄마가 되는 것은 애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을 꺼내던 소라와, "애자와 같은 전심전력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는 나나는 변해가기 시작한다. 태어나고 싶다고 열심히 꿈을 보내오는 뱃속의 아이를 통해 계속해보리라, 다짐한다.

 

그리 밝지 않은 세계에 놓여있는 그들이지만, 작가가 만들어낸 언어들이 처연한 그들의 세계를 덮고, 계속해서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모습은 우울함을 씻는다. 또한, 썩은 떡을 먹고 있던 아이들에게 "이 떡이 맛있으니 아줌마네 밥과 바꿔 먹자"며 끝까지 삼키던 나기의 엄마 순자, 아픔이 있지만 자매를 보듬는 나기의 모습은 '어쨌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큰 힘이 된다. 책의 제목이 '계속하겠습니다'가 아닌 '계속해보겠습니다'인 것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찮고 무의미해 보일지 모르지만 작은 시도와 희망이 담겨 있으므로. 멸종이 아니라 어쨌든 '살아가고' 있으므로.

 

 

12쪽,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살아가려면 세계를 그런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좋다고 애자는 말한다.

26쪽,
어, 할 새가 있었을까? 어, 할 새도 없었을까? 누구도 모르지, 그 빈틈없는 회전 사이에서 시간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흘렀는지도 몰라. 어쩌면 어, 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긴 순간이었는지도 몰라. 어, 만으로는 부족해서 어어어어어 그렇게 한동안 이어지고도 부족할 만큼, 그건 긴 순간이었는지도 몰라. 길고 길어 누구의 생각보다도 긴, 이윽고 그가 그 틈을 다 통과했을 때 그건 더는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거야. 모습도 아닌거야.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그런 모습이 되고 만 거야. 그렇게 될 뿐. 인간은 그렇게 될 뿐.

104쪽,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 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119쪽,
집으로 모세씨를 불러들여 소라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나나의 세계에서 가장 연한 부분을 모세씨와 만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기 오라버니만이 접근하고 접촉할 수 있던 그 세계를, 금주씨의 죽음과 이미 상당히 죽어버린 애자와 뒤틀림이 담긴 세계를 열어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나나의 내면에서 그 부분은 잠잠한 듯 보여도 끊임없이 떨고 진동하는 곳, 가장 민감한 비늘이 돋는 곳.

160쪽,
잊지 마.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거. 제대로 연결해서 생각해야 해. 그런데 이렇게 연결하는 것은 의외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닐지도 몰라. 오히려 그런 것쯤 없는 셈으로 여기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돼. 안 그러면 잊어먹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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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07-16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아서 머뭇거리셨다는 말씀에 ‘아핫!‘했습니다.
전 왜그런지 너무 완벽하게 맘에들었던 책들은 리뷰를 거의 쓰지 못해요. 마치 제 못난 리뷰가 그 책의 감동을 축소시킬 것이 염려되서랄까요.^^ 머뭇거리신 리뷰 꼼꼼하게 잘 읽고 좋아요 누르고 갑니다^^ 잘 읽어용 :)

시읽는리니 2017-08-05 03:07   좋아요 0 | URL
공감해요. 그래서 더 어렵게 읽었고, 어렵게 쓴 리뷰에요. 좋은 마음을 제대로 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ㅎㅎㅎ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제님 :)
 
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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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쓴 소설에는, 그의 자전적 체험이 필히 들어갈 것이라 여긴다. 손톱만큼이든 넘칠 정도로 그득한 한 바가지의 경험이든 글쓴이의 삶과 삶에서 느낀 생각들과 어떤 연유에서 '무엇을 쓰리라 구상하는' 생각까지 자전적 요소라 볼 수 있다면, 소설과 글쓴이의 삶이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독자는 책을 통해 작가의 삶 일부를 받아들인다. 때로는 아주 작은 끄트머리를, 때로는 비스듬히 살짝 스치는 정도로 만난다. 그러나, 마치 삶 전체를 끌어다 놓은 것 같은 자전적 소설을 읽을 땐 왠지 조금 힘겨울 때가 있다. (나는 이런 이유로 헤세의 작품을 사랑하면서도, 읽을 땐 폭삭 늙는 느낌이다) 삶의 정중앙을 뚫는 소설의 방식 때문이다.


  바로, 이 소설이 그랬다. 표지에 수록된 작가 루이제 린저의 눈빛, 입꼬리, 자잘한 주름살은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겼고, '삶의 한가운데'라는 제목과 만난 첫인상은 무척이나 강렬했다. 글의 형식 또한 독특했다. 주인공 '니나'의 언니인 '마르그레트'가 오랜 세월을 거친 후에 만나 편지와 일기장을 읽는다. 일기장 속에는 평생에 걸쳐 '니나'를 사랑한 '슈타인'의 절절한 사랑이 담겨있지만, 작가는 그의 시선을 통해 '니나'라는 인물과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전한다. 독일을 넘어,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해마지않았던, 작가의 분신과도 같았던 인물. 그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때로는 냉정하며, 엄청난 고집과 객기를 부리는 성격이며, 자유를 갈망하며 세상의 부조리에 치를 떤다. 우연과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실패도 여러 번 반복되고 나치에 맞서 싸우다 투옥되기도 하며, 여러 번 고통을 겪으며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어떤 고생을 해도 얼굴엔 생기가 넘친다. 도대체 이 얼굴에 감도는 생기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문학작품들이 그렇듯이, 『삶의 한가운데』 속 '니나'도 시대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한차례 전쟁이 휩쓸고 간 세계, 사람들의 희망과 용기는 참담하게 말라붙었고 젊은이들도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 온갖 좌절을 경험하면서도, 새로운 곳으로 떠나 "잘 살고 있다"라고 편지를 전해준 '니나'의 삶은 과연 신드롬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자유를 갈망하고 체제에 굴복하지 않았던 모습은 (당시 독일 평단에선 작품을 미치광이로 표현했다고 한다), 맥없이 인생을 포기하려 했던 이들에게 더한 인상을 남겨주었을 것이다. 내게는 '니나'라는 캐릭터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만큼의 큰 인상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시종일관 날카롭거나 신경쇠약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의 당당한 발언과 확고한 자의식에는 순간순간 멈칫하며 놀랍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지 못한 나를 합리화하려는 속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에서 주인공인 '니나'라는 인물만 유독 강조된 감은 있으나, 소설 속 다양한 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가 있다고 덧붙이고 싶다. 니나를 동경했던 '슈타인'의 마음, 니나의 전남편 '퍼시',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읽고 있는 평범하게 현실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마르그레트'의 모습. 중요한 것은 소설 속에서 다뤄진 다양한 인물의 삶이 작가가 가진 인생관과 대비되는 의미로 쓰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각각의 생이 있고, 우리는 그 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며 모든 것에 부딪혀봐야 한다는 작가의 인생관에 따르면, 어쩌면 니나에게 끈질기게 구애했던 '슈타인'의 삶도 그리 나쁜 삶은 아니었을지도.


"우리는 생의 의미를 알려고 했어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만약 의미를 묻게 되면 그 의미는 결코 체험할 수 없게 돼요. 의미에 대해 묻지 않는 자만이 그 의미가 뭔지 알아요. (319쪽)"


  왜인지 모르겠지만, 양귀자의 소설 속 문장이 떠올랐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는 말이. 고정된 인생의 진리는 없으며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가야된다는 공통적 의미가 두 소설에 담겨 있다.

 

 



65쪽,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하지.



71쪽,
아주 낮게 니나는 덧붙였다. 여기에는 법칙이 있고, 저기에는 삶이 있다는 식은 정말 끔찍해. 우리가 하는 것은 반대인데, 우리가 삶을 극복하면 좀 더 높은 삶을 얻는다는 것이 사실일까?



77쪽,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보여. 어느 것도 진정한 자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수백 개의 자아를 다 합친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사실은 이 여러 자아 가운데 하나의 자아만을, 미리 정해져 있는 특정한 하나의 자아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

100쪽,
나는 저기 서 있는 니나를 보았다. 창백했고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걱정 때문에 손질도 못한 얼굴, 절망적이고 침울한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폭풍우에 의해 약간 손상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깊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바람을 안고 가는 배와 같았다. 이 배를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배는 원하는 곳에 도착하거나, 아니면 어딘가 자기의 행운을 잡을 수 있는 새로운 대륙의 새로운 해안을 가게 되리라고 믿을 것이다. 니나의 절망이 진정에 와 닿고 나의 가슴을 후벼팔지라도 내가 이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닐지.



349쪽,
당신은 행복한가요? 그렇지 않아요. 행복이 무엇인지 당신은 전혀 몰라요. 그러나 나는 행복해요. 나는 당신이 나의 인생을 당신 인생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요. 당신의 인생은 마치 일요일을 망쳐버리는 재미없고 어려운 학교 숙제 같아요. 얼마든지 나를 부박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마 삶에 대한 당신의 불안이 삶을 사랑하는 내 방식보다 더 부박할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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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독약 창비세계문학 28
엔도 슈사쿠 지음, 박유미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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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때와 같이 책을 고르다가, <깊은 강>이라는 작품을 발견하였다(물론 발견만 하고 아직 읽지는 못했다). 단조롭지만 큰 물결이 이는 듯한 책이었다. 작가의 이름은 '엔도 슈사쿠'라고 쓰여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앙에 영향을 받아 평생 동안 신과 구원, 선과 악에 대해 몰두했다는 일본의 대표 작가였다. 그리고 <깊은 강>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문학적 집합체와도 같은 작품이었다. 흥미가 일었으나, 작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첫 발돋움을 할 작품이 필요했다. <바다와 독약>은 이러한 점에서 가장 적합한 작품이었다.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 일본에서 행해진 '큐슈 대학 생체해부 사건'을 소재로 한다. 살아있는 미군 포로를 끔찍한 실험으로 '살해'한 실화를 토대로 하여, 동네 의원 '스구로'의 미묘한 행동과 모습을 지켜보는 화자의 서술, 그리고 과거 생체해부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액자식 구성으로 그렸다. 의문을 제기하는 도입부는 다소 평범하나, 본격적으로 작가의 문제를 드러내는 2장부터가 백미라 할 수 있다. 전쟁통 속에서도 권력싸움이 한창인 대학 병원 안에서 생체 해부 사건에 가담하게 되었던 세 사람의 입장이 차례대로 전개된다.

 

 작가는 생체 실험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기 보다는, 세 사람의 내면을 묘사함으로써 '죄의식'의 문제를 끈질기게 묻는 방법을 택한다. 실험 참가를 거절할 용기가 없어 평생 양심에 시달린 의사 '스구로'와, 비슷한 이유로 권력 싸움에 휘말린 간호사 '우에다'보다 더 흥미로운 인간은 '토다'라는 인물이다. 아마도 작가가 가장 공들여 만들었을, 죄의식이 부재한 인간. 그는 수기에서 이렇게 쓴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지금 가책을 느껴 이러한 경험을 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전의 작문 시간 때의 일이나 나비를 훔치고 그 벌을 야마구찌에게 덮어 씌운 일, 그리고 사촌과 간통을 저리는 일이나 미쯔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추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추악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 무섭다는 건 좀 과장된 이야기이고 이상하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이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도 역시 나처럼 한꺼풀을 벗기면 타인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가. 약간의 나쁜 짓이라면 사회로부터 벌받지 않는 이상 별다른 가책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는가. 그리고 어느날 그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진 적이 있는가." (136쪽)

 

  읽으면 읽을수록 소름이 끼치는듯한, 어쩌면 사회적 처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일본인 (또는 가해자들)의 모습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글이다. '모두가 죽어나가는 세상'이라고 체념하기엔 너무 큰 문제 상황 속에서 양심과 죄의식을 잃어버리고 무감각해져버린 인간은, 독약을 한껏 머금은 바다라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끝으로, 나는 이 책을 최대한 이성적으로 읽어보려 노력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큐우슈우 대학 생체해부 사건'뿐만 아니라 '731부대'가 자행한 끔찍한 마루타 실험에 대하여 알고 있었기에, 그 실험의 대상자에 한국인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전범국가로서 일본이 벌인 참혹한 일들을 열거하기엔 이 공간으로는 부족하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부끄러운 치부를 가감없이 드러내며 인간의 존엄을 탐구했던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46쪽,
‘모두 죽어나가는 세상 아이가. 병원에서 죽지 않더라도 매일밤 공습으로 죽어가는 거야.‘ 스구로는 토다가 오늘 오후 화난 듯이 중얼거린 말을 떠올렸다. 회진이 끝난 뒤 공동 입원실에서는 한바탕 헛기침이 울려퍼지고 환자들이 박쥐처럼 침대를 기어서 오르내리고 있었다. 스구로는 만일 인간의 죽음에 냄새가 있다면 그건 분명 이 어두운 방의 악취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83쪽,
아무래도 좋다. 내가 해부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그 파르스름한 숯불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토다의 담배 냄새 때문이었는지도. 이것이든 저것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생각하지 말자. 잠이나 자자. 생각해본들 별도리도 없다.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13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나는 자신을 양심이 마비된 남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내게 양심의 가책이란 지금까지 쓴 대로 타인의 눈이나 사회의 벌에 대한 공포일 뿐이었다. 물론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누구라도 한꺼풀만 벗기면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의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벌을 받거나 사회의 비난을 받은 일은 없었다.


183쪽,
‘그럴까? 우린 영원히 지금과 마찬가지일까?‘
스구로는 혼자 옥상에 남아 어둠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양떼구름 지날 때‘ ‘양떼구름 지날 때‘
그는 애써 그 시를 읊으려 했다.
‘뭉게구름 피어오를 때마다‘ ‘뭉게구름 피어오를 때마다‘
하지만 스구로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입안이 메말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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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쏜살 문고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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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보물섬』 이라는 소설로 잘 알려져 있는 소설가 '스티븐슨'에겐 작가의 행복한 명성만 있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던 그는 마흔넷으로 요절하기까지 늘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도 끈질기게 작품을 골몰하고 집필하였다. 활동적인 삶을 갈망하던 그는 많은 곳을 여행하고 뜨거운 삶을 이어나갔다. 그래서였을까. 국내 첫 번역된 그의 에세이집에선 행복과 죽음에 관한 언급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의 삶과 연결해 생각하면 책에 등장하는 행복과 죽음의 상반된 이미지의 연결고리를 파악할 수 있다.

 

'젊은이들을 위하여 Virginibus Puerisque'라는 책의 원제도, 인생의 '후배'들을 염려하고 행복의 관해 전하는 작가의 말이 왠지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 같다. 책에는 표제작인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을 비롯하여, 다양한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진정한 행복을 찾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겼다. 행복을 위한 삶과 죽음, 청춘과 노년, 사랑과 결혼, 여행의 맛, 아이와 함께 하는 생활 등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포함된다. 철학적 사유와 고뇌가 담긴 글은 그 길이가 아무리 짧다고 하더라도 읽기 쉽지는 않으나, 다양한 은유적 표현과 강렬하고 매력적인 스티븐슨의 문체는 소중한 글들을 깊이 음미하게 한다.

 

그가 전하는 행복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게으름'인데, (예상했을지 모르나) 이는 아무것도 안 하며 빈둥대는 개념이 아니다. 지나치게 근면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지식보다는 지혜를, 소유보단 진정 원하는 것을, 극도의 분주함보다는 여유로움을, 지배계층이 만들어낸 시스템을 벗어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라는 이야기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이들에게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나 젊은이의 패기와 용기가 맞붙어 발휘되는 것을 상상하면 그리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을 보고 "그때 용기가 더 있었더라면"이라는 후회 섞인 말로 잠깐 지난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 늦었다고 아쉬움에만 잠겨 있는 것은 작가의 바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혜와 지성을 찾고, 고정된 일상과 사회에서 벗어나 게으른 행복을 찾는 것. 이 작은 책 속에 꼭꼭 담긴 작가의 마음이 내게 전해준 용기에 고마움을 전한다.

 

"우리는 바닥에 물이 새는 배를 타고 거칠고 위험한 바다를 항해한다. 해군의 구슬픈 옛 노래에서 한 구절을 따오면, 우리는 인어의 노래를 들었고 마른 땅을 결코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늙거나 젊거나 우리 모두 마지막 유람중이다. 담배 한 대를 가진 선원이 있다면 출발하기 전에 부디 한 모금씩 돌려 피우기로 하자!" (50쪽, 심술궂은 노년과 청춘)

 

 

 

 

23쪽, 엘도라도
삶이 행복할 때 우리는 하나가 다른 하나로 끝없이 이어지는 상승 음계에서 살아간다. 앞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우리는 작은 행성에서 보잘것없는 일에 빠져 살아가고 짧은 기간 너머로 영속하지 못하더라도, 별처럼 도달할 수 없는 희망을 품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희망의 시간을 늘려 가게 되어 있다. 진정한 행복은 어떻게 시작하는가의 문제이지 어떻게 끝내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의 문제이지 무엇을 소유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78쪽, 사랑과 결혼의 미로
"아, 잠시만 죽어 있을 수 있다면!" 이라는 톰 소여의 열망을 누구도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그보다는 "해적질을 계속하는 한은 자신의 행동이 절도죄라는 오명을 다시 쓰지 않으리라."라는 두 해적의 결심을 기억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년 시절의 생각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소년기는 끝났고 (글쎄, 언제 끝났을까?), 스무 살에 끝나지는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스물다섯에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서른에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아직도 그 목가적 시기의 한가운데 있을지 모른다."

145쪽, 도보 여행
우리는 너무 바쁘고, 실현해야 할 먼 장래의 계획이 너무 많고, 상상의 성에 착수하여 자갈땅 위에 견고하고 살 만한 저택을 세워야 하므로, 생각의 땅과 허영의 언덕으로 유람을 떠날 시간이 없다. 깍지를 끼고 밤새 난로 앞에 앉아 있으면 실로 시간이 달라진다. 그 시간을 보내며 아무 불만 없이 생각에 잠겨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세계가 달라진다

195쪽, 가스등을 위한 간청
이 별이 그것의 원형만큼 안정적이지 않고 그만큼 밝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 광채는 최고의 밀랍 양초만큼 우아하지 않다. 그러나 가스등은 더 가까이 있으므로 목성보다 실용적이고 유용하다. 또한 가스등이 창공에서 필요에 따라 하나씩 켜지는 별처럼 고유하게 자발적으로 빛을 발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스등을 켜는 점등원은 매일 저녁 부리나케 움직였고 즐거운 마음으로 달렸다. 이렇게 천체의 정확성을 흉내 내려는 사람의 모습은 근사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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