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누이
싱고 지음 / 창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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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하얀 공백을 무서워할 때가 있었다. 글자가 빽빽하게 들어찬 책들은 쉽게 읽어내리면서도 빈 공간에 생각을 꽉꽉 채워야 할 것 같은 시집은 손이 잘 가지 않았다. 해석의 부담감은 내가 '시'에 접근하는 것을 늘 어렵게 했다.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 썼고 왜 이렇게 제멋대로 흘러가는지, 왜 갑자기 이런 단어가 튀어나왔으며 아름답다가도 슬픈지 해석해보려 할수록 시는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어느 날부턴 일부러 편안하게 시를 읽어보았다. 소설처럼, 에세이처럼, 그저 흘러가는 얘기처럼 자연스럽게.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내 상황과 기분에 따라 마음에 쏘옥 담겨 깊이 읽어지는 시들이 있었다. 물론 한도 끝도 없이 불친절한 시들도 있고 그것도 그들만의 매력이 있겠지만,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시가 다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


요즘엔 특히 시를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원래도 시 에세이, 시화집, 시론집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출간되어 있었지만, 종이책에 국한하지 않고 시대에 맞춰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나와 비슷하게, 시라는 장르에 부담감을 가졌던 독자들을 위한 소중한 가이드다. 그중 『시詩누이』 는 듣도 보도 못한 시 웹툰이다. 시와 만화의 조합이라, 독특하고 새롭다.


"시라는 장르가 너무 권위적이고 장벽이 높아졌어요.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면 시집 산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시집을 읽는 걸 별종이라고 생각하거나 마니악한 취미라고만 생각하지, 시집이 소비재가 될 수 있다는 차원까지 안 가더라고요. 문학이 소수를 위한 향유물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다양하게 누리는 것도 문학의 권리라고 생각해요. 결과물이 어떤지는 각각 평가가 있겠죠." (작가 인터뷰 중에서)


 <싱고,라고 불렀다>라는 시집을 쓴 시인 신미나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말을 붙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를 편안하게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인은 이런 웹툰을 구상했다고 한다. '싱고'라는 이름의 작가 캐릭터와,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반려묘 '이응옹'이 함께 만화 속에 등장한다. 다분히 일상적인 고민들과 추억들을 담았고 가끔은 진지한 고민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시인은 함께 읽기 좋은 시를 에피소드의 끝에 소개한다. 언뜻 보기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구성과 연결이지만, 털어놓은 생각들이 그저 시인만의 것은 아니어서.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는 독자들의 것들과 퍽 다르지 않아 이 만화는 시인의 바람대로 아주 깊게- 읽힌다.


왠지 모를 막막함을 주듯 툭- 던져진 시집을 읽기 전에 워밍업으로 읽으면 참 좋을 것이다. 시인이 조심스레 털어놓은 생각을 발판 삼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 시에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어느새 시에 대한 두려움이 떨쳐져 마음에 드는 시집을 집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 연결 속에서 좋은 시를 함께 읽기를 바라는 시인의 다정함이 느껴진다는 게 특별하다. 기분 좋은 책이다.



 

- 마음이란 게 하나의 색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다른 색을 보려 하지 않는다 / 한 사람의 마음 속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가야 / 우리는 그 사람이 가진 고유색을 볼 수 있을까

- 다른 이와 주파수를 맞추며 사는 건 쉽지 않다 / 주는 이는 선물이라 생각하지만 / 받는 사람은 부담스러울 때 / 친해지고 싶어서 건넨 농담이 / 지나고 보면 무례했다 싶을 때 / 적정선을 넘으면 ‘뚜뚜뚜‘ 울리면서 내 감정의 컨디션을 알려주는 센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언제부터였을까요 / 타인의 진정성에 추를 달아 얼마나 묵직한지 재보고 남들은 어떤 가면을 썼는지 의심하는 일로 감정을 낭비했던 날이 / 어른이 된다는 건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세련되게 감추는 거라고 믿게 된 것이

- 위로도 성급하면 체하게 된다 / 마음에 수분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게 그 어떤 말보다 따뜻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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