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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독약 ㅣ 창비세계문학 28
엔도 슈사쿠 지음, 박유미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평점 :
여느 때와 같이 책을 고르다가, <깊은 강>이라는 작품을 발견하였다(물론 발견만 하고 아직 읽지는 못했다). 단조롭지만 큰 물결이 이는 듯한 책이었다. 작가의 이름은 '엔도 슈사쿠'라고 쓰여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앙에 영향을 받아 평생 동안 신과 구원, 선과 악에 대해 몰두했다는 일본의 대표 작가였다. 그리고 <깊은 강>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문학적 집합체와도 같은 작품이었다. 흥미가 일었으나, 작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첫 발돋움을 할 작품이 필요했다. <바다와 독약>은 이러한 점에서 가장 적합한 작품이었다.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 일본에서 행해진 '큐슈 대학 생체해부 사건'을 소재로 한다. 살아있는 미군 포로를 끔찍한 실험으로 '살해'한 실화를 토대로 하여, 동네 의원 '스구로'의 미묘한 행동과 모습을 지켜보는 화자의 서술, 그리고 과거 생체해부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액자식 구성으로 그렸다. 의문을 제기하는 도입부는 다소 평범하나, 본격적으로 작가의 문제를 드러내는 2장부터가 백미라 할 수 있다. 전쟁통 속에서도 권력싸움이 한창인 대학 병원 안에서 생체 해부 사건에 가담하게 되었던 세 사람의 입장이 차례대로 전개된다.
작가는 생체 실험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기 보다는, 세 사람의 내면을 묘사함으로써 '죄의식'의 문제를 끈질기게 묻는 방법을 택한다. 실험 참가를 거절할 용기가 없어 평생 양심에 시달린 의사 '스구로'와, 비슷한 이유로 권력 싸움에 휘말린 간호사 '우에다'보다 더 흥미로운 인간은 '토다'라는 인물이다. 아마도 작가가 가장 공들여 만들었을, 죄의식이 부재한 인간. 그는 수기에서 이렇게 쓴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지금 가책을 느껴 이러한 경험을 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전의 작문 시간 때의 일이나 나비를 훔치고 그 벌을 야마구찌에게 덮어 씌운 일, 그리고 사촌과 간통을 저리는 일이나 미쯔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추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추악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 무섭다는 건 좀 과장된 이야기이고 이상하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이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도 역시 나처럼 한꺼풀을 벗기면 타인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가. 약간의 나쁜 짓이라면 사회로부터 벌받지 않는 이상 별다른 가책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는가. 그리고 어느날 그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진 적이 있는가." (136쪽)
읽으면 읽을수록 소름이 끼치는듯한, 어쩌면 사회적 처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일본인 (또는 가해자들)의 모습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글이다. '모두가 죽어나가는 세상'이라고 체념하기엔 너무 큰 문제 상황 속에서 양심과 죄의식을 잃어버리고 무감각해져버린 인간은, 독약을 한껏 머금은 바다라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끝으로, 나는 이 책을 최대한 이성적으로 읽어보려 노력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큐우슈우 대학 생체해부 사건'뿐만 아니라 '731부대'가 자행한 끔찍한 마루타 실험에 대하여 알고 있었기에, 그 실험의 대상자에 한국인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전범국가로서 일본이 벌인 참혹한 일들을 열거하기엔 이 공간으로는 부족하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부끄러운 치부를 가감없이 드러내며 인간의 존엄을 탐구했던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46쪽, ‘모두 죽어나가는 세상 아이가. 병원에서 죽지 않더라도 매일밤 공습으로 죽어가는 거야.‘ 스구로는 토다가 오늘 오후 화난 듯이 중얼거린 말을 떠올렸다. 회진이 끝난 뒤 공동 입원실에서는 한바탕 헛기침이 울려퍼지고 환자들이 박쥐처럼 침대를 기어서 오르내리고 있었다. 스구로는 만일 인간의 죽음에 냄새가 있다면 그건 분명 이 어두운 방의 악취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83쪽, 아무래도 좋다. 내가 해부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그 파르스름한 숯불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토다의 담배 냄새 때문이었는지도. 이것이든 저것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생각하지 말자. 잠이나 자자. 생각해본들 별도리도 없다.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13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나는 자신을 양심이 마비된 남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내게 양심의 가책이란 지금까지 쓴 대로 타인의 눈이나 사회의 벌에 대한 공포일 뿐이었다. 물론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누구라도 한꺼풀만 벗기면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의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벌을 받거나 사회의 비난을 받은 일은 없었다.
183쪽, ‘그럴까? 우린 영원히 지금과 마찬가지일까?‘ 스구로는 혼자 옥상에 남아 어둠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양떼구름 지날 때‘ ‘양떼구름 지날 때‘ 그는 애써 그 시를 읊으려 했다. ‘뭉게구름 피어오를 때마다‘ ‘뭉게구름 피어오를 때마다‘ 하지만 스구로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입안이 메말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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