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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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쓴 소설에는, 그의 자전적 체험이 필히 들어갈 것이라 여긴다. 손톱만큼이든 넘칠 정도로 그득한 한 바가지의 경험이든 글쓴이의 삶과 삶에서 느낀 생각들과 어떤 연유에서 '무엇을 쓰리라 구상하는' 생각까지 자전적 요소라 볼 수 있다면, 소설과 글쓴이의 삶이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독자는 책을 통해 작가의 삶 일부를 받아들인다. 때로는 아주 작은 끄트머리를, 때로는 비스듬히 살짝 스치는 정도로 만난다. 그러나, 마치 삶 전체를 끌어다 놓은 것 같은 자전적 소설을 읽을 땐 왠지 조금 힘겨울 때가 있다. (나는 이런 이유로 헤세의 작품을 사랑하면서도, 읽을 땐 폭삭 늙는 느낌이다) 삶의 정중앙을 뚫는 소설의 방식 때문이다.


  바로, 이 소설이 그랬다. 표지에 수록된 작가 루이제 린저의 눈빛, 입꼬리, 자잘한 주름살은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겼고, '삶의 한가운데'라는 제목과 만난 첫인상은 무척이나 강렬했다. 글의 형식 또한 독특했다. 주인공 '니나'의 언니인 '마르그레트'가 오랜 세월을 거친 후에 만나 편지와 일기장을 읽는다. 일기장 속에는 평생에 걸쳐 '니나'를 사랑한 '슈타인'의 절절한 사랑이 담겨있지만, 작가는 그의 시선을 통해 '니나'라는 인물과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전한다. 독일을 넘어,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해마지않았던, 작가의 분신과도 같았던 인물. 그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때로는 냉정하며, 엄청난 고집과 객기를 부리는 성격이며, 자유를 갈망하며 세상의 부조리에 치를 떤다. 우연과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실패도 여러 번 반복되고 나치에 맞서 싸우다 투옥되기도 하며, 여러 번 고통을 겪으며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어떤 고생을 해도 얼굴엔 생기가 넘친다. 도대체 이 얼굴에 감도는 생기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문학작품들이 그렇듯이, 『삶의 한가운데』 속 '니나'도 시대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한차례 전쟁이 휩쓸고 간 세계, 사람들의 희망과 용기는 참담하게 말라붙었고 젊은이들도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 온갖 좌절을 경험하면서도, 새로운 곳으로 떠나 "잘 살고 있다"라고 편지를 전해준 '니나'의 삶은 과연 신드롬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자유를 갈망하고 체제에 굴복하지 않았던 모습은 (당시 독일 평단에선 작품을 미치광이로 표현했다고 한다), 맥없이 인생을 포기하려 했던 이들에게 더한 인상을 남겨주었을 것이다. 내게는 '니나'라는 캐릭터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만큼의 큰 인상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시종일관 날카롭거나 신경쇠약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의 당당한 발언과 확고한 자의식에는 순간순간 멈칫하며 놀랍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지 못한 나를 합리화하려는 속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에서 주인공인 '니나'라는 인물만 유독 강조된 감은 있으나, 소설 속 다양한 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가 있다고 덧붙이고 싶다. 니나를 동경했던 '슈타인'의 마음, 니나의 전남편 '퍼시',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읽고 있는 평범하게 현실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마르그레트'의 모습. 중요한 것은 소설 속에서 다뤄진 다양한 인물의 삶이 작가가 가진 인생관과 대비되는 의미로 쓰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각각의 생이 있고, 우리는 그 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며 모든 것에 부딪혀봐야 한다는 작가의 인생관에 따르면, 어쩌면 니나에게 끈질기게 구애했던 '슈타인'의 삶도 그리 나쁜 삶은 아니었을지도.


"우리는 생의 의미를 알려고 했어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만약 의미를 묻게 되면 그 의미는 결코 체험할 수 없게 돼요. 의미에 대해 묻지 않는 자만이 그 의미가 뭔지 알아요. (319쪽)"


  왜인지 모르겠지만, 양귀자의 소설 속 문장이 떠올랐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는 말이. 고정된 인생의 진리는 없으며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가야된다는 공통적 의미가 두 소설에 담겨 있다.

 

 



65쪽,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하지.



71쪽,
아주 낮게 니나는 덧붙였다. 여기에는 법칙이 있고, 저기에는 삶이 있다는 식은 정말 끔찍해. 우리가 하는 것은 반대인데, 우리가 삶을 극복하면 좀 더 높은 삶을 얻는다는 것이 사실일까?



77쪽,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보여. 어느 것도 진정한 자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수백 개의 자아를 다 합친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사실은 이 여러 자아 가운데 하나의 자아만을, 미리 정해져 있는 특정한 하나의 자아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

100쪽,
나는 저기 서 있는 니나를 보았다. 창백했고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걱정 때문에 손질도 못한 얼굴, 절망적이고 침울한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폭풍우에 의해 약간 손상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깊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바람을 안고 가는 배와 같았다. 이 배를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배는 원하는 곳에 도착하거나, 아니면 어딘가 자기의 행운을 잡을 수 있는 새로운 대륙의 새로운 해안을 가게 되리라고 믿을 것이다. 니나의 절망이 진정에 와 닿고 나의 가슴을 후벼팔지라도 내가 이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닐지.



349쪽,
당신은 행복한가요? 그렇지 않아요. 행복이 무엇인지 당신은 전혀 몰라요. 그러나 나는 행복해요. 나는 당신이 나의 인생을 당신 인생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요. 당신의 인생은 마치 일요일을 망쳐버리는 재미없고 어려운 학교 숙제 같아요. 얼마든지 나를 부박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마 삶에 대한 당신의 불안이 삶을 사랑하는 내 방식보다 더 부박할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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