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완전히 나에게만 한정된, 누군가와 공유할 수 없는 <개인적인 체험 - 오에 겐자부로>

 

 

 

 

 

 After Reading

 

 

 

 

  누구나 '개인적인 체험'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와 공유한다고 해서 결코 나눠질 수 없는, 완전히 나에게만 한정된 이야기.

그러고 보면 '개인적인 체험'에 대한 공감이 그리 쉽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상대방의 고민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할 때,

또는 가끔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저 '힘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속의 이야기를 보면 그렇다.

 

  책 속의 주인공인 20대 후반의 직장인 '버드'는 어느날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자신의 아이가 '뇌 헤르니아 (뇌의 일부가 밖으로 튀어나오는)'상태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현실에 절망한 주인공은 술과 여자친구를 만나 방탕한 시간을 보낸다. 그런 일탈을 통해 잠시 '지금'의 좌절을 잊으려한다. 버드만의 고유한 불행은 계속해서 그 불행의 사실을 일깨우면서, 수치심과 죄책감을 불러 일으킨다. 결국 점점 심해지는 심리적 고통은, 버드에게 평생의 염원이었던 아프리카로 떠나 '아기 괴물'에게서 도피하려 하는 희망을 품게 한다. 비참한 현실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그 '아기 괴물'을 어떻게 놔두어야할지도 까마득하다.

 

  실제로 이 소설은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 승화된 문학이다. 고통스런 현실과 혼란스러운 감정을 스스로 느꼈던 작가의 경험이 녹아들어있으며, 이 책 이외에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책들을 여럿 집필했다. 결국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그때문에 나도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아직 내 수준에는 어려웠던 탓일까. 중간 중간 나오는 우주론·영혼론 같은 것들에 대한 단상은 책 속의 깊은 주제와는 관련없이 떠도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또한 표면적인 결말은 너무 이상적으로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주인공 버드의 결심으로 이어지는 그 심리적 과정이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달라보였다는 점이 조금은 독특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만약 이런 '개인적인 체험'이 나에게도 온다면, 과연 용감할 수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어쨌든, 다시 한번 현실에 감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Underline

 

 

 

 

  - "문제는 고통스럽다, 라는 말의 의미군요. 이 아기는 시력도 청각도 후각도, 뭐 하나 갖고 있지 않을걸요, 게다가 고통을 느끼는 부분도 결락되어 있는 거 아니려나? 원장 말로는 뭐라더라? 식물적인 존재니까! 당신은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하나요?" 버드는 입을 다물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했던가? 산양에게 씹히고 있는 양배추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 "어떻습니까? 식물적인 아이가 고통스러워한다고 생각하세요?" 하고 의사는 여유만만 무게를 잡으며 다시 물어왔다. 버드는 솔직하게 고개를 흔들었고 그 질문이 현재 그의 뜨거운 머리의 판단 능력을 넘어선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처음 만나는 낯선 인간에게서 저항을 느끼지 않고 굴복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건만. (47p)

 

 

  - 그는 막대한 수의 타인들과 동거하고 있다. 하지만 식물과 같은 아이에게 있어 이 외부 세계 체재는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은미한 고통의 몇 시간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러고 나서 숨막히는 한순간이 있고 그리고 또다시 그는 몇억 년에 걸쳐 무의 광야의 미세한 무의 모래알 그것이다. 설령 최후의 심판이 있다고 한들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죽어버린 식물과 같은 기능의 갓난아이를 어떤 사자로서 소환하고 고발하며 판결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진주 광택이 있는 빨간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 혓바닥을 하늘하늘해 가며 울음소리를 내고 있던 몇 시간의 지상 체재로는 어떤 심판자에게도 증거 불충분이 아닐까? 그야말로 증거 불충분이야, 라고 버드는 점차 깊어져 가는 극심한 공포에 숨을 죽인 채 생각했다. 만약 그 장소에 증인으로서 내가 불려 나간다고 해도 나는 자기 아들의 얼굴을 확인조차 못할 것이다. 아기 머리의 혹을 실마리로 삼는다면 모를까. 버드는 윗입술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57p)

 

 

  - 거칠어 보일 만큼 풍성한 빛이 그곳에 넘치고 있었다. 거긴 이미 초여름이 아닌 여름 그 자체, 여름의 내장 속에 있었다. 버드는 그 빛의 난반사에 이마를 데었다. 스무 대의 유아용 침대와 전동식 오르간 같은 다섯 대의 보육기. 그 안의 아기들은 안개를 통해 보듯 어렴풋이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꾸로 침대 위의 아기들은 너무나 적나라하다. 모두들 지나치게 밝은 빛의 독 때문에 축 처져 위축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점잖은 가축의 무리 같은 아기들. 아주 조금씩 손발을 움직이고 있는 아기들도 있지만 그들에게도 흰 면으로 된 속옷과 기저귀는 납으로 된 잠수복처럼 무거워보인다. 모든 갓난아이들이 구속당한 자 같은 인상이었다. (121p)

 

 

  - "분명히 이건 나 개인에게 한정된,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이야."하고 버드가 말했다. "개인적인 체험 중에서도 혼자서 그 체험의 동굴을 자꾸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인간 일반에 관련된 진실의 전망이 열리는 샛길로 나올 수 있는 그런 체험이 있지? 그런 경우, 어쨌든 고통스런 개인에게는 고통 뒤의 열매가 주어지는 것이고. 흑암의 동굴에서 괴로운 경험을 했지만 땅 위로 나올 수가 있음과 동시에 금화 주머니를 손에 넣었던 톰 소여처럼! 그런데 지금 내가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고역이란 놈은 다른 어떤 인간 세계로부터도 고립 되어 있는 자기 혼자만의 수혈을 절망적으로 깊숙이 파들어가는 것에 불과해. 같은 암흑 속 동굴에서 고통스레 땀을 흘리지만 나의 체험으로부터는 인간적인 의미의 단 한 조각도 만들어지지 않지. 불모의, 수치스러울 따름인 지긋지긋한 웅덩이 파기야. 나의 톰 소여는 끝없이 깊은 수혈 밑바닥에서 미쳐 버릴지도 몰라." (204p)

 

 

Add...

 

 

 

 

결말이 이상적이었다고 썼지만, 만약 다른 결말이어도 또 마음에 안들었다고 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미, 내 가여운 개미
류소영 지음 / 작가정신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사는 게 참 신 맛이다. 시리고 또 시리다. <개미, 내 가여운 개미 - 류소영>

 

 

 

 

 

 

 

 After Reading

 

 

  "사는 게 참 신 맛이다. 시리고 또 시리다." 그러나 그 시리고 신 맛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살아가는 우리, 개미를 닮았다.

 

  12년 만에 세상으로 나온 류소영 작가의 소설집, 제목을 보자마자 '개미'가 무엇일까하는 물음 대신 연민부터 올라온다. 가여운,이라는 형용사가 무언가 안쓰럽고 처연한 감정을 올라오게 만든다. 상큼하게만 보였던 표지가 제목과 함께 보면 또다른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가엾다, 제 몸보다 큰, 시디 신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는 개미가.

 

 책 속 8개의 단편들, 그 속의 주인공들은 무언가 부족하거나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어느 순간 없어져 버린, 아니면 어느 순간 없어져 버릴 어떤 것들에 대하여 작가는 이야기해간다. 삶에서 언젠가 맞이할 수도 있는 '상실'과 '부재'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쓸쓸하다. 언젠가 물 속으로 없어져 버릴 한 마을의 모습, 이미 잃어버린 존재, 자신 속에서 숨기고 숨겨왔던 비밀스런 모습, 소통이 되지 않았던 그 고독한 사람들의 모습, 가면 갈수록 자신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고립감.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외롭고 쓸쓸하다. 그러나 그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독한 외로움을 나름대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치유책으로 작용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소설집의 제목으로도 사용된 '개미, 내 가여운 개미'와 '기록'이란 작품이다. 언뜻 발견한다면 지나치고 말 평범하고 개미처럼 작은 이들에게 주목한 작가의 시선이 짠하다. 작가는 이야기에 끝에, 어찌보면 빤한 희망적인 메세지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렇게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본다. 그저 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그들의 모습을 잊지 않기를, 계속해서 그리워하기를, 바라고 있다.

 

 

 

 Underline 

 

 

 

 

 

   - 그 여린 마음을, 그 어눌하고 착한 마음을, 이제 막 직장을 버리고 공부를 시작한 스물여덟의 나는, 사는 게 참 신맛이다, 시리고 또 시리다, 거듭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렇게 외면했었다. 터무니없는 비논리로 나는 마음엔 무슨 절대량 같은 게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여 이 봄이 무척이나 힘든 시기라고 생각했던 나는, 인문대학 대학원생이라는 위치로 미래를 기약할 수 없지만 내가 내 중심을 잡고 내 나이를 견디어내고 사는 일의 슬픔 같은 것을 다 감당해내는 것만으로 벅찬 시점이라 생각했던 나는, 그가 너무 무거웠던 것 같다. 마음의 절대량...... 너의 중심을 잡는다는 게 무슨 소리냐, 네가 너를 감당한다는 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무런 답을 내어놓지 못할 터였다. (물소리, 28p)

 

 

  - 그녀가 입안 가득 빵이나 과자를 문 채 당혹스러운 죽음에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을 나는 상상하기 힘들기에. 그녀의 '저 먼 곳'이. '저 건너편'이 평안하지 않을 것이기에. 아니, 무엇보다 그녀가 입안에 무언가 물고 죽었다면 남은 동안 나는 단 한순간도 편하게 먹을 수 없을 것이기에...... 날은 완전히 밝았고, 버스는 어느 작은 휴게소로 들어갔다. 잠에서 부스스 깨어난 사람들은 무언가 따뜻한 것을 먹기 위해 내렸고, 나는 그 무엇도 먹고 싶지 않았다. 남으로 내려올수록 봄빛은 찬란했다. (개미, 내 가여운 개미, 49p)

 

 

  - 애매하고 불안정한 나이. 팍삭 늙어 체면도 힘도 자존심도 없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늘 하고 싶은 게 많고 계획으로 가득 찬 의욕 넘치는 나이도 아닌 그 어정쩡함. 나는 항상 그 불안정함이 불편하고 아슬아슬했었다. 동네 슈퍼가 아니면 맨얼굴로 외출하지 못하지만, 답답하다며 욕실 문을 살짝 열어둔채 볼일을 보는 나이. 부엌일이 싫기도 하지만 아직은 맛난 것을 먹고 싶은 나이. 하여 내가 잘 만들지 못하지만 본인이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끙끙 한숨을 쉬면서 손수 만들기도 하는 나이. 격식을 차려야하는 모임 자리가 있으면 코르셋을 앞에 놓고 언제나 고민하는 나이. (또 밤이 오면, 74p)

 

 

  - 우리들은 저녁 일곱 시나 여덟 시쯤, 친구들이 다 모이기 편하게 시내 한복판에서 만나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하는 친목 모임에 나갈 수 없어 점점 그들과 멀어져갔고, 때때로 어렵게 월차를 내어 참석해도 친구들이 다 보는 인기있는 텔레비전 사극이나 유명한 개봉 영화를 보지 않아 대화에 낄 수 없었으며, 너무 오랜만에 보는 녀석들 앞에서 우습게도 낯을 가리고 머쓱해지는 바람에 쓸쓸해져서는 일찍 자리를 뜨곤 했다. 우리는 함께 근무하는 우리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서로 아껴주고 서로 짜증내고 서로 가여워하며 똘똘 뭉쳤으며, 그 뭉침은 달리 말해 고립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립을 어느새 스스로 편안해하고 있었다. (옷 잘 입는 여자, 104p)

 

 

  - 백열두 개, 백열 여섯 개 ...... 시간의 숨결이 느껴진다. 시간이 무척이나 더디게 흐르고 마치 어딘가에서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주위는 사실 무척이나 소란스러운데 가끔씩 목욕탕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귀가 웅웅 울리면서 나혼자 고립된 듯 멍하고 고요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이대로 혼자 또 다른 세상으로 빠져들 것 같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이 꼴로 넘어간다면 좀 슬플 것 같다. 토끼가 춤추고 코끼리가 기차를 모는 환상의 세계에, 눈을 부라리고 입에 빨대를 가득 꽂은 채 인간 대표로 놀러갔다 올 수야 없지 않겠는가. 머리를 한번 가볍게 흔들며 다시 정신을 차린다. (기록, 140p)

 

 

 

 

Add...

 

 

처음부터 끝까지, 왠지 울적한 느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세계를 다 돌기엔 백년도 부족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요나스 요나손> 

 

 

 

 

 

 After Reading

 

 

 

 

  알란 영감님의 100세 기념 생일파티! 그날 파티의 주인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창문을 넘은 100세 노인의 모험은 시작되는데.

 

  누가 이십대만 청춘이라 했을까! 100세 노인은 비록 나이는 세자리 수에 접어들었으나 아직도 팔팔하다는 사실. 그는 창문을 넘어 처음으로 도착한 터미널에서 어찌어찌해서 트렁크 하나를 손에 쥐게 되는데, 이 속에는 만만치 않은 것이 들어있다. 이 트렁크 때문에 노인의 두 번째 '세기'의 삶이 만만치 않게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 영감 뭔가 심상치 않다. 시끄럽거나 나대지도 않고, 그렇다고 억세거나 덜렁대는 것 같지도 않아보이는데 아주 일을 몰고 다닌다. 그치만 역시 긴 인생을 살아온 탓인지 엄청난 일에 별로 동요하지도 않는다.

 

  과연 연륜 때문만일까? 왜그런가 살펴봤더니 알란 영감의 젊은 시절 역시 만만치 않았던 것. 그는 현대사의 사사건건을 짊어지고 백년을 보내왔다. 폭탄제조가로서 이름을 날리기도 하고, 트루먼 대통령과 마주앉아 술을 마시기도 하고, 스탈린을 노발대발하게 해서 노역을 하기도 하고,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을 속이고 달래주기도 한다.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믿거나 말거나 스토리다. 정치라면 치를 떠는 알란은 오히려 온갖 정치적 일들과 마주하게 되고,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할 일만 하고 살아가면서 이같은 일들을 만난다. 그런데 이 주인공,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들이 아주 대담하고 당찬게, 너무 매력적이다. 보고있으면 누군가가 떠오르는데, 조금 더 순한 '조르바' 같달까.

 

  백 세 노인 알란의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중간 중간 헛웃음 치게 하는 블랙유머와 약간의 병맛이 곁들여진 재미난 소설이다. 물론 조금 과장된 상황도 어이없는 죽음도 일어나지만, 그에게 세상만사는 그 자체, 거리낄 것도 없고 그저 자유롭게 살아가면 되는 것. 정치든, 이데올로기든, 누구의 편이든 상관하지 않는 것, 우연과 우연이 겹쳐진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뿐.

 

 새로운 연장전에 접어든 알란 영감님의 모험이 어디까지 계속될런지, 흐뭇한 마음으로 상상해본다.

 

 

 Capture

 

 

  - 알란은 자기가 단 1분 사이에 쥐와 개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이러고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스탈린은 확실히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알란은 계속 모욕당하면서 앉아 있는 게 지겨워졌다. 그가 모스크바에 온 것은 도움을 주기 위해서지, 이렇게 침 튀기는 호통이나 들으려 함이 아닌 것이다. 이제 스탈린은 혼자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든지 말든지 해야 했다. "근데 말이죠, 아까부터 계속 생각하는 게 있는데요......" 알란이 말했다. "뭔데?" 스탈린이 폭발 직전의 상태로 소리쳤다. "그 지저분한 콧수염 좀 싹 밀어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날 만찬은 이 질문으로 끝이 났다. 통역은 기절해 버렸다. (297p)

 

 

  - 존슨 대통령은 방금 알게 된 이 어처구니 없는 사실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겠다는 것인지, 파리의 군중이 미국 대사관 앞으로 몰려와 '미국은 베트남에서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라고 연호하는 소리까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존슨 대통령은 우거지상이 되어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알란은 잔을 마저 비우면서 미국 대통령의 일그러진 얼굴을 살폈다. "각하, 제가 무슨 도움을 드릴 거라도 없나요?" "뭐? 뭐라고 했소?" 생각에 잠겨 있던 존슨이 반문했다. "제가 각하께 무슨 도움을 드릴 거라도 없느냐고 물었어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셔서......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존슨 대통령은 얼떨결에 자신을 위해 베트남 전쟁을 이겨 달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스탈린에게 원자 폭탄을 넘긴 그 자였다. (400p)

 

 

  - 대뇌는 완전히 활동을 멈췄는데 입만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때가 있다. 라넬리드 검사가 굳은 결심에도 불구하고 알란의 이 마지막 헛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대꾸를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뭐? 정말로 당신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으셨소? 백 살이나 된 양반이?" "아니 내가 미쳤소? 이 나이에 히말라야를 넘게? 내가 항상 이렇게 백 살이었던 건 아니야. 백 살이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지." "아, 그래서요?" "우리 모두는 자라나고 또 늙어가는 법이지." 알란은 철학자처럼 말했다. "어렸을 때는 자기가 늙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해...... 자, 그 어린 정일이를 예로 들어보자고. 내 무릎위에 앉아서 엉엉 울어대던 그 불쌍한 녀석이 이제는 자라서 일국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442p)

 

 

  - 알란은 자신이 나이가 듦에 따라 순진해지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원한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도 여전히 알리스라는 이름의 저 끔찍한 인간이 자신을 깨우고, 여전히 저 끔찍한 죽이 차려져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어쩌겠는가......? 백 살이 되려면 아직 몇 달은 더 남았고,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죽을 수 있으리라. '술은 목숨을 앗아가요!' 휴게실에 붙은 '금주'라는 게시문을 정당화하기 위해 알리스 원장이 하는 말이었다. 술이 목숨을 앗아간가? 흠, 그거 괜찮군...... 앞으로 종종 주류 판매점을 다녀와야겠어...... (...) 최악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양로원 직원들이 알란의 백회 생일 기념 파티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는 우리 속의 동물이 되어, 선물이며 그 멍청한 축가들이며 케이크로 목구멍까지 채워지리라. 자기는 아무것도 요구한 게 없는데도! 그리고 이제 죽을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룻밤 밖에 남지 않았다. (496p)

 

 

Add...

 

 

 

곧 영화화된다니, 알란 영감의 모습이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하다.

약간 무게있는 책이지만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

맨 끝에 나오는 '알란'표 세계사 연표는 소설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료 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모두 돼지
고이즈미 요시히로 지음, 김지룡 옮김 / 들녘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로 배우는 동양철학, '나'와 '행복'을 찾아서 <우리는 모두 돼지 - 고이즈미 요시히로>

 

 

 

 

 After Reading

 

 

 

  중학생인 동생이 집에 있는 이 책을 보고 관심이 갔던 모양입니다. 현재 개정판으로 나와있는 '우리는 모두 돼지'는 조금 더 깔끔한 분위기의 표지로 되어있는데, 이 책은 개정판 보다는 조금 더 오락성이 강해보이는 표지입니다. 그래서인지 동생이 갑자기 이 책을 들어서는 읽기 시작하더라구요. 저는 이 책이 철학 만화라는 걸 알고 있던 터라 '과연 동생이 재밌게 읽을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는데, 말도 못시킬 정도로 읽더라구요.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재밌냐고. 그랬더니 '너무 재밌는데, 뭔가 교훈이 있는 느낌'이라고 하더라구요. (귀여워요ㅋㅋㅋㅋㅋ)

 

  만화는 정말 단순합니다. '덜돼지'라는 이름의 보통돼지에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에피소드를 보여주는데요. 가끔 다른 돼지친구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양(불교)철학 만화인만큼, 부처가 등장해서 가르침을 주기도 하지요. 가끔 부연설명이 필요할때는 글로 설명해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림으로 불교철학을 쉽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또한 '부처와 돼지' 시리즈 중 1편입니다. 책에 수록되는 만화들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탐구하거나, 자아를 찾기 위한 마음,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보여줍니다. 만화 속에 나오는 돼지들은 보통 사람들의 생활과 꼭 닮았습니다. (뭔가 돼지라서 기분나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ㅎ.ㅎ) 책을 보다가, '어 나도 이런 생각한 적 있는데'하고 공감한다면 역시 덜돼지와 같은 '보통 돼지'에 해당되는 사람이지요 :) 역시 저도 돼지였습니다... 하핳.

 

 

 

  만화는 학생들도 빠르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이해되는 편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역시 철학적인 물음이니 파고들어가면 어렵게 생각될 수 있는 것들이지요. '나는 누구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진짜 그것일까' 대충 이런 식으로, 묻고 물으면 끝도 없는 물음들. 책의 마지막 부분은 꽤 깊이 있는 철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자신을 찾는 여행의 길 안내 <열 개의 돼지 그림>인데요. 제가 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뭔가 낯익은 걸 느꼈습니다. 바로 대학교 철학강의 시간에 배웠던 불교의 '심우도'인데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기 위해 소(소는 무엇이냐에 관해서 꽤 오랫동안 고민했던 기억이;)를 찾고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린 그림입니다. 실제 심우도에서 인간과 소가 그려져 있었다면, 이 만화에서는 돼지와 멧돼지가 그려져있는 게 유일한 차이점입니다.

(심우도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요기로, http://terms.naver.com/entry.nhn?cid=99&docId=983059&mobile&categoryId=1885)

 

  생각해보면 철학 책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동양철학보다도 서양철학 쪽을 많이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철학적 시각이 큰 차이가 있고, 그들과 동양사람인 우리 사이에도 다른 관점이 많이 존재하는데도요. 저또한 서양철학을 통한 인문서를 많이 봐왔던 것 같은데, 이렇게 만화로나마 동양철학을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물론 철학에 대해 깊이 빠져들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짦은 만화만으로 그리고 기분좋은 그림들로 생각해볼 기회를 많이 던져준다는 점에서 학생들에게도 좋은 교육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Capture 

 

 

* 만화라서 언더라인은 캡쳐로 대신합니다.

 



 

 

 Add...

 

 

'삶의 이치를 제법 알고 있기 때문에 슬플 때는 슬퍼하고, 외로울 때는 외로워합니다.

나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는 일은 없어졌지만, 슬픔은 찾아오네요. 슬픔이란 것이 감기처럼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면 이 책을 낸 의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 맺는 글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섬세해졌을 때 알게 되는 것들 -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철학 에세이
김범진 지음, 김용철 사진 / 갤리온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작음, 연결, 부드러움, 결, 여유로움 <우리가 섬세해졌을 때 알게 되는 것들 - 김범진>

 

 

 

 

After Reading

 

 

 

 

  우리 동네에는 아직까지 살아 남아있는 작은 서점이 하나 있다. 그 구석에 헌책방이 마련되어 있는데 가끔은 그곳에 가서 좋은 책이 나온게 있나하고 기웃대곤 했었다. 이 책은 그 곳에서 골랐다. 오로지 표지에 사진에 마음이 가서 골라들었다. 처음엔 사진 에세이인줄만 알 정도로 표지의 사진이 마음을 끌었다. 그러나 읽어보니 사진보다도 글에 더욱 몰입할 수 있는, 의외로 반짝 빛나고 있는 철학 에세이였다.

 

  작가는 '섬세'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섬세한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그런 섬세한 사람이 이 세상에 넘쳐나기를 바란다. 섬세는 작은 것들이 서로 연결되 있는 것을 뜻하며 그 속에는 '결'이 존재하고 있다. 어떠한 한 이야기의 맥락에 비유할 수 있는 '결'은 누구나 고유하게 갖고 있는 것이며 섬세한 사람들은 그 '결'을 느끼기 위해 노력한다. 섬세를 대표하는 단어들은 작음, 감수성, 연결, 맑음, 부드러움, 생명, 느림과 여유다. 세상에 살고 있는 모두가 부드럽게 연결될 수 있는 조건이 바로 이 섬세함이 될 수 있으며,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한없이 커가고 있는 세상에서 조용하지만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섬세함이다. 

 

  이 섬세함을 토대로 사회의 많은 문제들의 해결점을 찾기 위해 작가는 철학적 사유를 보탠다. 그리고 섬세함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일들과 섬세함이 활약하여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해간다. 간혹 작가가 '섬세'라는 키워드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 단어로 압축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바라던 사람들의 성정이다. 여유롭고 감성적이고 세심하게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다. 최근들어 많이 제시되고 있는 내향성과도 '섬세함'은 접하고 있으며, 요즘 자연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다 이런 마음의 갈망으로부터 온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조금, 조용해질지라도 자신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 자신을 보는 것처럼 남을 다시한번 돌아볼 수 있는 것.

이것이 작가가 바라는 섬세한 세상이다.

 

 

 

Underline

 

 

   - 사람들은 누구나 꿈꾸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그럴 때 우리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과거의 상처와 흔적들을 무시하고 완전히 새로운 나를 세워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흔적과 결을 살려 그 위에 조금씩 더해가거나 줄여가는 것이다. 인격은 건축물로 비유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성장하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면 내 안에 있는 과거의 아픔, 독특한 성격, 때로는 병리적으로 보이는 과도한 개성들을 모두 없애고 새로운 누군가가 되려 한다. 마치 바닷가에 난 소나무의 뒤틀린 결들을 곧게 만들어 버리려는 것처럼. 그러나 깊은 숨을 쉬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 결 속에 길이 담겨있다. 나무의 뒤틀린 결은 거친 환경 속에서 생존하고자 햇던 몸부림이자 상처이자 훈장이다. (47p)

 

 

  - 내가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감사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낳는다. 지금 나를 있게 해준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받은 것 만큼 돌려주지 못한 채 오히려 폐만 끼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미안한 마음이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함, 내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면서 품어주는 자연과 대지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함이다. 가장 깊은 연결은 가장 큰 존재, 즉 전체성과의 접촉이다. 나를 이루는 가장 본질적이고 깊은 부분이 다른 존재들, 그리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전체와 연결되어 있고 하나라는 자각이다. 이런 자각은 다른 존재에 대한 깊은 배려를 낳는다. (123p)

 

 

  - 과거에 느림은 왠지 게으르고 무책임한 인상을 주었다면 요즘에는 느림 속에 웰빙, 인간다움, 정성, 배려가 떠오른다. 섬세는 느림이다.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정성이며, 움직임 하나하나에 깊은 사색과 배려가 담긴 느림이다. 기계로 판박이처럼 찍어내는 편리함이 아니며, 자신의 편익과 이익만을 위해 달려 나가는 조급함도 아니다. 편의를 위해 내면의 소리와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148p)

 

 

  - 아이의 의식은 아이가 보고 자란 하늘의 크기만큼 자란다. 의식은 공간과 매우 닮아 있다. 의식이 맑고 넓어지면 자신이 자각하는 공간 또한 함께 넓어진 듯한 느낌이 든다. 무한히 확장된 의식은 우주에 비유된다. 광활한 대지와 하늘을 많이 접할수록 우리의 의식 또한 더 넓고 커진다. 아파트 단지에서 자라는 요즘 아이들은 좁은 하늘을 보고 자란다. 부모들은 아이가 누굴 닮아 저렇게 집중력도 없고 까질한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쉰다. 아이들은 보고 자란 하늘과 자연을 닮았을 뿐이다. 아이들은 아무 죄가 없다. (191p)

 

 

 - 삶 속에 어느 순간이 찾아온다. 그것은 신체의 감각과 함께 그리고 잔잔한 빛의 번짐과 함께 찾아온다. 그리고 그 빛은 시간이 흐르며 금색으로 번져 나중엔 그 순간을 떠올릴 때면 아련하게 축복처럼 쏟아지는 황금빛 입자들 가득한 장면으로 한가득 떠오른다. 그 순간은 소중하다는 말로는 담을 수 없을 만큼 경이와 아름다움으로 충만해서, 가령 누군가 집채만 한 다이아몬드를 준다고 해도 결코 그 순간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그런 순간은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찾아오기도 한다. (193p)


 

 

Add...

 

 

책 속에 사진도, 물론 멋지고 분위기 있다.

의외로 굉장히 - 만족한 에세이.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