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보급판) - 고문기술자 이근안!! 그는 누구인가?
김근태 지음 / 중원문화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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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 김근태> 일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초판 1쇄가 87년 5월, 원고가 출판사로 들어왔을 때에는 박종철 열사의 사망소식이 있었던 때였다. 민주항쟁이 불같이 일어날 때 나왔던 것이다.

군부독재가 이루어지던 80년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고문에 시달려 하루도 참혹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 중 잔혹한 행위의 대상이 되었던 김근태 님이 쓰신 책이 이 <남영동>이다. 이번에 남영동 1985라는 영화와 군부독재를 비판하는 영화가 개봉하면서 다시 찍어낸 책이 내가 나눔으로 받은 책이다.

김근태 의원은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인물로 두번의 구속을 당하였고 (그 중 85년 아무도 몰래 남영동으로 끌려가 끔찍한 일을 당하셨다.) 2004년에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활동하셨고 국회위원으로 많은 활동을 하셨다. 그리고 얼마전 2011년 12월 말일, 고문후유증으로 몸이 쇠약해지면서 세상을 떠나면서 남영동의 비밀 '고문 기술자'에 대해서도 세상의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나도 김근태 의원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었다.

 

 

 


 

 

1부는 김근태 의원님께서 직접 쓰신 탄원서 내용이 대부분이다. 2부는 징역을 살 당시 아내와 사람들에게 보낸 옥중서신들로 되어있다.

읽기 편한 책이 아니다. 이야기 면에서도, 형식 면에서도 ... 이야기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이 끔찍해서 너무 아프다. 

그리고 일부의 각색없이 김근태 의원의 목소리로 그대로 담은 탄원서와 옥중서신이라 더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읽어야만 했고 기억해야만했다.

 

 

  

 

 

 

그러나 본인은 피신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민주운동단체 대표였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는 피신으로 인한 긴장과 불안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며 정말 내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당할 끔찍한 일이 앞에 있는 줄 알았다면, 선택은 너무나 분명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우리 모두를 위해서, 아니 정치군부를 위해서도 피신했어야 했습니다. 저들은 핀으로 본인을 과녁에 고정시켜 놓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소리없이 칼날을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언제나 무엇이든지 감행할 채비를 갖추고 노려봤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약간의 냄새가 나는 것으로 단정하고 평상시 키워 왔던, 반드시 불온, 불순하고 거대한 무엇이 있을거라는 기대와 열망을 확인하는 작업에 돌입한 것입니다. 이 확인 작업을 위해서는 그 무엇을 해도 좋고, 어떤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37p

 

이 남영동에 끌려온 이래 쉴 새없이 작고 왜소해져서 그 시멘트 바닥에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았던 나는, 짓밟히는 검불처럼 볼품도 무게도 없어져 갔습니다. 어떻게 당해도 좋은, 그래도 마땅한, 마침내 공중으로 사라져 버릴 왜소함 그 자체였습니다. -48p

 

이 고문자들이 시종 뇌까리는, '심장마비라는 의사의 진단서를 붙이면자신들은 완전히 발뺌할 수 있다. 어디 외상이 남아있는가'라는 협박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다가올 수가 없었습니다. - 75p

 

나치 수용소에 감금되어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종전과 더불어 풀려나온 어느 유태인 정신과 의사의 피맺힌 기록이 생각납니다... 인격의 와해, 인간의 허약함을 송두리째 폭로하는 것으로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분노하고 저주해야 할 그 고문자들을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첫날 혹은 둘째 날에는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이 박탈되었던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열쇠를 갖고 있던 그 고문자들에게 모든 힘을 다하여 아양을 떨어야 했던 것입니다. - 95p

 

우리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동력은 이런 사람들이 여기저기 최악의 곳에서조차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성의 절망적인 측면,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인간 동료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악마적 측면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111p

 

피해와 부담은 늘 자신 혹은 나와 비슷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만 짊어져야 하는가. 민주화의 귀결은 우리에게만 돌아오는 것이 아닌데, 전제와 자의적 지배에서 진정한 법 지배의 실현 채무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정치군부가 이런 나약함, 비열함의 틈을 뚫고 끊임없이 공포심을 조장, 확산시킴으로써 자신들이 지배를 계속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이 무서운 쇠사슬을 어떻게 끊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 148p

 

이제 본인은 징역을 삽니다. 높은 담과 부자유, 징역의 외로움과 슬픔을 뚫으며 살 것입니다. 쇠창살 너머 하늘의 별에서 윤동주 시인의 눈물을 만나면서 이 징역을 살 것입니다. 85년 9월, 정치군부의 고문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회복하는 과정으로서 징역을 살 것입니다. 80년 5월, 부릅뜬 눈으로 정치군부의 총칼에 의해 아스팔트에 쓰러졌던 망월동 시민들의 원혼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징역을 살 것입니다. 이 징역 속에서 민주화의 그날을 꿈꾸며 징역을 깨면서 살 것입니다. -218p


 

 

김근태 의원의 고문, 또한 다른 분들의 고문을 도맡아했다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이 책에서 이름이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에 밝혀졌다. 관절빼기와 볼펜고문의 달인이었던 이근안은 한동안 목사로 활동했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짓들은 고문이 아니라 애국이었다는 당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였다는 이야기를 본적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 네티즌이 비판을 한 글을 보았는데 댓글에 '구원, 예수...어쩌구' .......... 뭐라 할말이 없다.................

 

모든게 철저하게 계획되고 고문을 집행하고, 나중에 혹여 문제될 일이 있을까봐 티나지 않는 방향으로 고문을 끔찍하게 진행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기술적인 고문이 필요했던 거였다.)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던 남영동에서의 날들에서, 첫번째 고문이 5시간동안 이루어진 물고문이었다. 그리고 전기고문, 모욕, 굶주림, 정신적 고통.. 

그리고  김근태 의원이 옥중에서 고문의 증거로 남겨놓았던 상처딱지, 그 마지막 희망마저도 군부정부가 빼앗아갔던 이야기.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더 경악스러운 이 이야기들을 듣고 정말 많이 화가 났다.

 

 

 

 

 

- 고문의 기록 -

 

몸 전체가 시퍼렇게 핏줄이 솟고 헉헉 꺼이꺼이 목은 쉬어 가는데 이것은 멱이 따진 돼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습니다. 소리를 지른다고 강하게 전류를 통하게 하고,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빨로 혀를 꽉 물으면 혀를 빼라고 강하고도 긴 전류를 흘려보내고, 끙끙대면서 참는다고 또 그러고, 이들의 목표는 총체적인 혼란, 착란 상태로 돌입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친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온통 휘감고 그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내 눈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환상이 공포와 광란의 소용돌이로 닥쳐왔습니다. 이것은 슬픔이라든지 외로움이라든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잔인한 파괴, 그 자체였습니다. 담요는 땀에 흥건하게 젖는데 물을 쏟아부었던 몸의 각 부분은 금방 말라 버리고, 특히 머리털은 곧 말라서 물고문을 수시로 해야 했습니다. 이 고문기술자가 내 가슴에 올라타고 쿵쿵 굴리는데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운동화 발바닥으로 얼굴을 쓱쓱 문대고 경멸적으로 걷어차도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도 않고 심리적 거부감이 일어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완전히 지쳐 늘어지기 시작할 때, 이 날의 주제가 제기되고 추궁됐습니다. - 68p

 

리뷰를 뭐라고 써야할 지 모르겠다. 처참하게 짓밟혀진 김근태 의원님의 그 당시 모습이 그냥 '안타깝다'라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다. 의원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피로 죽음으로 얻어낸 지금의 이 사회를 감사하게 살아야될것 같다. 물론 아직도 부조리함은 있지만.... (이런 기분을 얼마전 느껴보았었다. 사람들이 물대포 맞는 모습을 보고) 잊지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일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영화를 볼까, 말까... 영상으로 보는건 더욱더 충격일것 같아서 고민이다. 그래도 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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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청춘 - 보석같이 젊은 날을 위한 15일 인생수업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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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청춘 - 김열규> 청춘이 품어야 할 세상의 모든 가치   

 

 


"청춘에게 인생이란 시간은 무진장일 것이다. 젊은 시간은 오고, 오고, 가고, 가기를 끝도 없이 되풀이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뿐만 아니다. 젊은이들의 시간은 그 빛이 영롱하게 파르랄 것이다. 그 율동은 돌진하는 기관차처럼 역동에 넘쳐있을 것이다. 파랗게, 힘차게 맥동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12p

 

 

 

 

 

 

"낭만은 태양이다. 그것은 삶의 신천지를 비춘다."

 

 

청춘이란 말을 싫어했었다. 뭔가 오그라 들었었던 이 말. '청춘만 힘든가?' 청춘이 아닌 다른 시간들도 힘들다.

한없이 푸른 계절인 청춘, '도대체 왜 아프고 뭐든 경험해도 넘어지지말아야 하고 일어나야 할까?' '꼭 도전과 고통이 있어야만 진정한 청춘의 행동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쏟아져나오는 청춘을 위한 글들을 보고 의문을 가졌다. 그렇지만 참 사람이 간사하게도 궁금함에 이런 책들을 고르게 되더라.  "정말 좋은가?"하고서 말이다. 중고서점에 꽃혀있던 노란색 표지의 이 책. 제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살짝 훑어본 내용이 끌렸다. 책이 참 이쁘게 편집되어 있기도 하고. 어쨌든 읽어보았더니 꽤 마음에 든다. 그렇지만 그렇게 감동적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좋은 말들이 많았다. 위로와 채찍이 같이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고 어쨌든 기존의 내 삐딱한 시선을 조금은 저울질해주었다. 흔들려야 청춘이 아니라 흔들려도 부서지지 않는게 청춘이었다. 젊음이란 것이 방패가 될 수 있으니까.

 

 

 


 

 

책의 부제는 '보석같이 젊은 날을 위한 15일 인생수업'이다. 시간, 자아, 야망, 고독, 도전같은 것들을 이야기 한다. 몇가지 주목했던 것은 새롭게 보는 키워드 였다. 야망에 대한 정의, 고독, 결핍, 낭만, 죽음. 보통 청춘들을 위한 책들에선 볼 수 없는 키워드가 보였다.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야망이었다. 평소 그럭저럭한 만족까지만 추구하고 보다 높은 곳을 향해 목표할 수 없었던 나에게 야망과 포부는 조금 먼 단어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 동경이라는 뜻의 독일어 Sehnsucht를 발견했다. 독일어의 Sehn(보다)와 Sucht(찾다)의 조합. 진정 참다운 Sehnsucht는 두 눈으로는 안보이고 오직 마음의 눈에만 삼삼한 그것을 찾아나서는 일이라고 한다. 헤세는 Sehnsucht (동경)을 '순수하고 완전한 존재와 활동을 구하는 것, 그러면서 더욱더 순수하고 더욱더 완전하고 더욱더 가치있는 것을 구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을 키워가는 것'이라고 풀이했다(65p)  Sehnsucht, 젠주흐트의 자세로 바라보고 활동하기엔 나는 아직 용기가 없었다.


 

 

 

젊음의 시간은 폭포 같다. 청춘의 시간은 급물살을 탄다. 젊은 시간은 쏜살같다. 해일같이 율동하고 노도같이 내닫는다. 청춘의 시간은 폭풍이 되어 불어닥치고, 회오리가 되어서 몰아친다. 젊음은 그것들과 장단 맞추어서 뛰고 달리고 질주한다. 그래서 젊은 목숨은 질풍노도를 벗한다. - 15p

 

젊음의 자아는 잡동사니가 아니다. 잡것은 더욱 아니다. 입에 당긴다 해도 차마 잡채 같은 건 아니다. 뒤죽박죽의 잡누르미가 되어서도 안 된다. -40p

 

야망은 희망이되, 빤히 내다보이는 것, 정해진 길을 가기만 하면 손에 들어오는 것, 그 따위에 부치는 희망은 아니다. 미리 계산할 수 없고 결과를 저울질할 수 없는 것,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스라하게, 높다랗게 꿈을 부쳐야 하는 것이라야 가까스로 야망의 지표가 된다. 그래서 야망은 피안에 부치는 염원이고, 초월을 다지는 소원이다. 야망은 아예 피안이고 초월이다. - 58p

 

 

 

 

'청춘의 슬픔'

젊음의 눈물은 철학의 구슬이다.

뭐, 어디선가 많이 들어온 생각같지만 표현이 마음에 든다.

 


 

 

레프 톨스토이의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라'

 

죽음에 대한 테마의 앞부분이다. 이렇게 15일에 걸친 청춘 수업의 맨 앞장에는 선인들의 '시'와 '말'들로 인사를 대신한다.

'죽음을 생각하라 : 메멘토 모리'가 생각나는 구절이다. 끝과 마지막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 '죽음'을 통해서 삶에 대한 희망을 찾는다는게 모순적이고도 획기적이다. 나도 가끔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기억이라는 것의 끝, 그리고 생각이라는 것의 끝, 그 죽음이 어떻게 다가올지 신기하기도 하고 '무'의 존재로 들어선다는 것이 경악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기억을 통해 보다 찬란한 끝을 기약하기 위해서 진지하고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듯이 ㅎ.ㅎ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은 최상이다. 배워서 아는 사람은 버금이다.

고생해서 배우는 사람은 버금의 버금이다. 고생해서 배우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를 바닥으로 치느니라. -공자 <논어> 219p

 

"유머란 인간의 정상적인 행동에서 분간해 낼 수 있는 행동의 미묘한 불일치 또는 어긋남이다...유머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고양하고 우리가 제정신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유머 덕분에 우리는 인생의 부침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 찰리 채플린 

<그대 청춘>이란 책의 제목에는 꼭 부제가 붙었으면 좋겠다. 청춘이 품어야할 모든 교양과 가치라고.

이 책은 단순히 말뿐인 위로와 채찍을 주는 책이 아니다. 세상의 많은 글들과 말들에서 오는 지혜를 이용한 '수업', 청춘수업이다.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매체는 많다. 물론 여러 책을 통해서 많이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지혜와 위로, 채찍까지 함께 준 책으로써 나에게 교훈이 되는 기억을 주었다. (물론 책과 시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 이런 책들은 더욱 소중하게 간직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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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랫말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어른을 위한 동화 12
황석영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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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랫말 아이들 - 황석영> 따스한 추억동화

 

 

 

 

 

이번에 황석영 작가의 신간소식을 듣고서 갑자기 책장에 있는 이 얇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추억의 MBC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딱지가 눈에 띈다. 2001년에 발매된 이 책은 딱 내가 이쯤 두께, 그리고 이쯤의 글자 크기의 책을 읽을 때에 나왔는데, 생각해보니 이 책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아마도 안읽었거나 읽고나서도 별로 공감이 되지 않았거나 그 둘중이 아닐까 싶다. 알고보니 출판사에서 '어른을 위한 동화' 시리즈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왜 어른을 위한 동화일까?

 

 

 

 

 

나는 시체의 썩은 냄새를 생생히 기억한다. 거기서는 간장 졸일 때 같은, 그리고 비린 것이 삭는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다. 발을 오래 씻지 않아 발가락 사이에 끼는 때에서 풍기는 냄새와 같았다. 그런 냄새와 더불어 화로 안에서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타는 듯한 냄새. 전쟁이 온 마을과 거리를 휩쓸고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죽건 말건 아직은 두려울 겨를이 없었다.  - 49p

 

삼봉이 아저씨는 술을 벌컥 들이켜고 나서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람 맘먹은 대로 되는 세상이 아냐." - 84p

 

그해 여름의 땡볕을 생각하면 지금도 혀뿌리에 끈끈한 침이 엉겨붙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집은 그 무렵에 제철공장과 방직공장 부근에 있는 영단주택 동네에 있었고, 밤에 창문을 열면 철도청 영등포 공작창의 찬란한 용광로의 불똥과 거뭇거뭇한 사내들의 벗은 몸집이 분주하게 불빛 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 120p

 

책 표지부터 색이 바랜 느낌의 오랜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모랫말 아이들>은 주인공 수남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배경은 6.25전쟁 이후이다. 그래서 여러 사랑받는 동화들처럼 예쁜 맛은 없다. 그러나 특별한 점이 있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험하지 못한 생소하고 낯설은 그림들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양공주의 딸이나 파란눈을 가진 귀남이라는 아이, 서커스단의 남매들의 이야기가 있다. 책 속의 이야기들은 짧지만 정겨운 그림과 함께 왠지모르게 훈훈한 느낌이 든다.  전후 상황이라고 해서 안타깝거나 슬픈 감정보다도 '아 따뜻하다' 라는 감정이 먼저 올라온다. (물론 안쓰러운 부분도 있긴 하지만 보통 그 끝은 따뜻했다.)

 


 

 

"지금 어른이 되어 나는 알고 있다.

삶은 덧없는 것 같지만 매순간 없어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며 따뜻함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 작가의 말

 

어쨌든 이 책은 분명 '어른을 위한 동화'다. 당연히 어른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동화다.  작가 황석영이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이런 추억들을 그려냈듯이 그 당시의 모습들을 '아는' 사람들은 가슴벅찬 추억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책은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이기도 하다. 이 따스한 옛날얘기를 들려주고 싶어 적었던 작가처럼 이 책은 그 당시의 모습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자장가처럼 잔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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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이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7
헤르만 헤세 지음, 김누리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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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장기판' 위에서 움직이는 법 <황야의 이리 -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는 나에게 아주 짧은 시선을 던졌다. 그것은 연사의 말을, 나아가 그의 전인격을 비판하는 시선, 아 정말이지 그 의미에 대해서만해도 책 한권은 거뜬히 써낼 만한, 잊을 수 없는 무서운 시선이었다... 그 눈빛은 사실 빈정댄다기보다는 차라리 슬픈 쪽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아무런 희망도 없는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슬픈 눈빛이었다. 어느 정도는 안정된, 어느 정도는 습관과 형식으로 굳어져버린, 조용한 절망이 눈빛의 내용이었다. 그건 절망이 내뿜는 밝은 빛으로 허식에 가득찬 연사의 인간성을 관통했을 뿐 아니라, 그 순간의 상황을, 청중의 기대와 기분을, 어딘가 젠체하는 그 강연의 제목을 비꼬아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황야의 이리의 눈빛은 우리 시대 전체를, 바쁘게 돌아가는 모든 부질없는 짓거리들을, 모든 허망한 노력, 모든 허영을, 망상에 가득 찬 천박한 정신의 모든 표피적인 장난질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아아! 불행히도 그 시선은 더욱 깊어만 갔다. 우리의 시대, 우리의 정신, 우리의 문화와 궁핍과 절망보다도 더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가슴속을 파고드는 시선이었고, 어쩌면 이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한 사상가가 인간의 품격이라는 것에 대해, 나아가 인생의 의미 자체에 대해 품고 있는 회의를 한 순간에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시선이었다." -18p

 

 

헤세의 작품의 성격이 나뉘어지는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 있다. 1920년대 헤세 그리고 많은 작가들은  계몽주의가 팽배하던 독일과 혼란스러운 세계 안에서 자아에 대해 강하게 성찰하기 시작했다.  첫번째로 <데미안>, 그리고 두번째로 이 <황야의 이리>라는 책을 보면  그 전의 서정적인 작품(모범적이고 교훈적인 작품)들과는 다르게 보다 헤세가 정신적인 혼란과 고통을 서술하고 존재와 문명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는 면을 확인 할 수 있다. 책은 편집자의 서문과 하리할러의 수기로 되어있다. 하리할러의 수기 옆에는 '미친 사람만 볼 것'이라고 적혀져있다. 혼란스러웠다. 리뷰를 쓸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했다. 하리할러의 수기, 이 황야의 이리가 남긴 글들은 의식에 따라 이야기가 서술되면서 그 의식속으로 쉽사리 내가 파고들 수 없었다. 특히나 하리할러의 수기 중 '황야의 이리론'은 도대체 집중이 안되어 입으로 읽으면서 넘어갔더니 다행히 그럴듯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헤세의 작품을 여러 권 읽고난 후 이 <황야의 이리>라는 제목을 발견했을 때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여 가슴이 뛰었었다.  그 당시 아주 과감하고 문제작이었던 <황야의 이리>는 그야말로 나에게 굉장한 작품이다. 어쩜 이렇게 감정과 의식이란 놈을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인상적인 구절들이 많아서 다소 지저분한 리뷰가 될지도 모른다..)

 

 

 

* 담아두기

 


하리 할러는 개성적 인간이다. 자신을 황야의 이리라고 지칭하는 이 인물은 또한 흔히 말하는 시민들의 가벼운 사회에 들어갈 수 없는 일종의 사회 부적응자이다. 그러나 그는 무조건적으로 그 사회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 한 쪽 구석에서는 그 사회에 대한 동경이, 그 사회의 존재로써 끼어있고 싶은 욕망이 숨어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마술극장'과 세계로서의 연결자 헤르미네를 만나고 (헤르만의 여자이름, 헤르미네는 헤세의 생각이 투영된 존재가 아니었을까) 사회의 쾌락과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하리할러의 내면에는 '인간과 이리, 즉 <사상과 감정의 문화와 잘 길들여진 승화된 본성의 세계>와 <충동과 야성과 잔인함의 어두운 세계, ㅡ승화되지 않은 거친 본능의 세계>가 동거하고 있다.' 그 혼돈의 내면안에서 그는 고민한다.

 

 

 

 

 

이 사내의 고통스런 병은 그의 본성의 어떤 결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그의 천부의 재기와 능력이 너무나 풍요로워서 좀처럼 어떤 조화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나는 할러가 고통의 천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니체가 말한 의미에서 무한하고 무서운 천재적인 고통의 능력을 내면에서 길러왔던 것이다. 또한 나는 그의 이러한 염세주의의 토대는 세상에 대한 경멸이 아니라 자기 경멸이라는 것도 알았다. - 20p

 

과거의 유럽, 과거의 참다운 음악, 과거의 참된 문학을 잘 알고 존중하는 우리들은, 내일이면 잊혀지고 조롱당할, 어리석고 머리가 복잡한 소수의 노이로제 환자에 불가한가?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던 것, 우리가 정신, 영혼, 아름다움, 성스러움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미 오래전에 사멸한 한갓 허깨비에 불과하며, 단지 바보들이나 아직도 그런 것들이 살아 있고 실재한다고 여기는 것일까? 어쩌면 그런 것들이 실재한 적은 한번도 없지 않을까? 우리 같은 바보들이 애써 얻고자 하는 건 어쩌면 항상 하나의 환영에 불과한 건 아닐까? - 56p

 

 모래와 자갈 사이에서도 작은 행복의 꽃은 핀다. 황야의 이리도 그랬다. 그가 대체로 몹시 불행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그가 그들을 사랑하거나 그들이 그를 사랑하는 경우에 말이다. 왜냐하면 그를 사랑한 사람들은 모두 항상 그의 한 면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섬세하고 이지적이고 괴팍한 인간으로 사랑하다가 갑자기 그의 속에 있는 이리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실망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하리는 누구나 그렇듯이, 전(全) 존재로서 사랑받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가 사랑을 받고 싶어한 바로 그 사람들에게 이리의 모습을 감추고 기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황야의 이리는 자기 자신의 이중성과 분열성을 그가 접촉한 모든 타인들의 운명 속에 불어 넣었던 것이다."(p62)

 

 

 

 

 

 

우리의 황야의 이리도 가슴 속에 두 개의 영혼을 품고있다고 믿고, 그래서 자신의 가슴이 이미 몹시 좁아졌다고 생각한다. 가슴, 즉 육신은 언제나 하나지만, 거기 살고 있는 영혼은 들도 다섯도 아니다. 영혼은 무수하다 인간은 수백 개의 껍질로 된 양파이고, 수많은 실로 짜인 천이다. - 85p

 

황야의 이리는 죽지 않을 수 없고, 자기 손으로 그 지긋지긋한 현존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지 않으려면 새로운 자기 성찰이라는 죽음의 불에 용해되어 자신을 변화시키고, 가면을 찢어버리고, 새로이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 이런 과정은 나에게는 새로운 것도, 미지의 것도 아니었다. - 95p

 

그날 나는 다시 우연이 운명임을, 내 존재의 폐허가 신의 파편임을 알았다. 내 영혼은 다시 숨쉬기 시작했고, 내 눈은 다시 시력을 되찾았다. 스스로 형상의 세계에 들어가 불멸의 존재가 되려면, 흩어진 형상 세계를 함께 모아 저 하리 할러의 <황야의 이리>의 삶을 전체로서 형상으로 고양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나는 잠시나마 달아오르는 가슴으로 느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삶이 추구하고 시도하는 목표가 아니었던가? - 201p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 보고, 다시 한번 그 유희를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 할 수 있겠지 - 308p


 

하리할러는 시대의 교차로에서 헤매고 있는 방랑자이다. 시대의 변화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갈피를 잃은 불쌍한인간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 또는 과거의 사람들 속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실제로 헤세는 이 작품을 쓸 당시 가족과의 관계나 우울증 때문에 정신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낼 하리할러의 말을 통해서 자신 또한 희망적인 삶을 그려낸다. 삶을 산다는 게 무엇일까. 진정한 '나'라는 게 무엇일까 그리고 인간이 된다는 게 무엇일까? 내 안에 시민적 영혼 그리고 이리의 영혼 또는 그 무엇들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통일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삶은 수없이 많은 생각의 뿌리인 영혼을, 그 영혼들을 충돌하지는 않게 마음 속 파도에서 떠다니는 것들 처럼 그렇게 남겨둔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저 유머와 얘깃거리를 통해 의미있는 것과 무의미한 것을 가르고, 우연과 운명을 갈라 어떤 곳으로 나아가야 할지 선택하는 것. 그렇게 해서 심각하지 않게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가 삶을 살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은 하리가 이제부터 나아갈 장기말 놀이의 winner로 가는 길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헤세는 이 혼돈의 자아에 대한 해결책으로 '유머'라는 키워드를 던졌지만 보다 상세한 것들에 대해서는 다음 작품인 <유리알 유희>에 집약해 놓았다고 한다. 어떤 이야기로 도움을 줄지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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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평전 - 부치지 않은 편지
이윤옥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그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삶' <김광석 평전 - 이윤옥>

 

 

 

 

 

 

 

 

 

"기나긴 밤이었거든 압제의 밤이었거든 우금치마루에 프르던 소리없는 통곡이어든

살아 이 한 몸 썩어져 이 붉은 산하에 살아 해방의 횃불 아래 벌거숭이 산하에...."

 

故 김광석이 처음으로 인정을 받아 홀로 부른 노래 '김지하의 녹두꽃'. 김광석의 음악인생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함께 흘러왔다.  

"우리가 김광석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는 그런 그의 젊음의 여정이 우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의식에 대한 의무감과 더불어 젊음의 혈기를 풀어놓고 싶다는 욕구, 하지만 대부분 결국은 한쪽에 치우치거나 숨겨버린다. 김광석은 그야말로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생각한 그 길로만 움직이려'했던 솔직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노래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그러한 음악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음악에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사회변혁적인 노래로 대중을 일깨우려는 다른 가수들의 노력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생각할 거리를 주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노래의 힘은 그 역할을 다한 것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민중가요를 부르던 그가 대중가요의 길로 들어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 였다.

 

 

 

 

 

 

나는 김광석 노래를 참 좋아한다. 부모님 시대의 가수였고 어쩌다 흘러나오는 노래에 그렇게 열광하지는 않았었지만

성인이 된 지금, 언제부터인지 김광석의 목소리에 빠져버린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다. 김광석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다... 하는 이야기도 요즘들어 흘러나오고

노래를 들으면 어딘가 구슬프고 무거운 인생을 산 것 같은 느낌에 도대체 이 분은 어떤 사람인가 하고 궁금해졌다. 그런데 한가지 착각이 있었다. 김광석의 유명한 노래는 모두 김광석이 작곡했는 줄 알았다. 그런 만큼 마치 자신과 한몸처럼 또는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그는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고보니 여러 유명 작곡자들이 만든 노래라고. 물론 <일어나>처럼 자신이 직접 작곡한 노래도 많지만 (역시 체념적인 사회에 희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모든 노래에 감정을 담아서 부를 수 있었던 건, 그가 노랫말이 특별히 마음에 드는 노래들을 선택하곤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김광석의 유명한 노래 중 하나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는 녹음 당시 가사의 '막내아들 대학시험'이라는 대목에서 김광석의 목이 메어와 계속 진행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은 술먹고 녹음했다는 이 노래.

 

 

 

 

 

책을 읽고나니 참 솔직하고 재치도 있고 때로는 우울한,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밤의 창가에서'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는데 신인 PD와 함께 '자신들이 들려주고 싶은 노래'위주로만 진행했다는 줏대있는 방송이었다고 한다.

청취자들의 신청곡을 무시하면서 '이 곡은 다른 프로그램에 많이 나오니까 그 방송 들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며... 하하

무려 천번을 넘게 했었던 공연. 그 공연 동안 만류하는 관계자들을 무시하고 관객들을 향해 부르고 싶은 만큼 원없이 노래를 불렀던 가객.

 

사람들은 그의 슬픈 노래를 좋아한다. 나또한 그렇다. '그날들', '너무 아픈 사랑은....','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그도 사랑했다는 '먼지가 되어'.

 그치만 김광석은 감상적이고 애상적인 노래보다 희망적이고 밝은 노래를 부르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언젠가 그는 무언지 모를 상실감에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언가 불안한 마음이 가득한 채로 삶을 지냈던 김광석. 그는 우울하고 감상적인 노래에 빠져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결국 왜인지 모르게 방에서 전깃줄로 삶을 마감했다 . "누군가 살아가면서 삶에 비극적인 요소들은 갖고 있다. 그것이 삶의 어느 순간에 뛰쳐나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또한 비극이다. 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찾아온 비극을 김광석은 극복해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행복하세요'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정작 본인은 행복한 삶을 선택하지 못했다." -204p

 

 

 

 

유명세를 치르고 나서 하루하루 바쁜 나날들을 보내면서 그는 '잘하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가수로서도 가장으로서도 자신의 역할들을 다 잘해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고.... 팬들에게도 아저씨라 불릴정도로 친근하고 장난스럽던 그도

조금은 내려놓은 삶을 살았다면 행복했을까? 그 시대로 돌아가 나도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쫓아다녀보고 싶다.

해맑게 눈웃음 짓고 있는 김광석의 사진이 떠오른다. 오늘은 그의 노래를 듣고 자야지.

 

"우린 화려한 수식어 뒤에 숨은 김광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습과 닮아 있는 그의 노래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을 이해해줄 것 같아 인간적으로 끌리기도 했다. 김광석에게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삶' 이었듯이 남아있는 우리에게도 그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삶'이다" -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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